“네, 수요일 저녁에 뵙는 거로 하죠. 그럼...”
종료버튼을 누르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폐부에 남아있는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내뱉는 행위 따위가 아니다. 뭔가 한 층 더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응어리를, 어떻게든 빼내고 싶다는 욕구. 심리 상담사라면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겠지만, 의사인 내 소견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지만, 지금의 내겐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스마트폰을 책상 모서리에 정확하게 맞춰서 내려놓고 스케줄 표를 열었다. 일별로, 시간대별로 빼곡하게 적힌 글씨들. 저명한 의학자 ‘닥터 그레이’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만들어낸 괴물 같은 테이블. 혹자는 걱정스런 시선으로 너무 몸을 혹사하는 게 아니냐고 묻지만, 역설적이게도 갈라테아 그룹은 그렇게 만들어져왔다. 다소 야만적인 표현이지만 이 그룹이 인력과 시간을 갈아 넣어서 운영되어왔다는 말은 사실이다. 호숫가를 우아하게 거닐고 있는 백조가 실은 물속에서는 미친 듯이 발길질을 하고 있다는 말처럼.
조금 전에 통화한 스폰서와의 약속을 스케줄 표에 적기 위해 눈동자를 굴린다. 수요일 저녁. 그리고, 나는 또다시 작은 한숨을 쉬었다. 왜 진작 확인하지 못했을까? 거짓말처럼 적혀있는 진료 스케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나에게 접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동떨어져있는 지극히 평범한 어느 노인. 꼴사납게도 나는 위인이나 성녀 따위가 아니다. 냉철하게 판단해 그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편이고, 이 노인도 단순히 비용을 맞춰서 의뢰를 해왔기 때문에 받아들였을 뿐이다. 하지만, 방금 전의 스폰서가 가지고 있는 가치는 이 노인 한 사람과는 비교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큰 건수였다.
결국은 나도, 그들처럼 똑같은 속물이었을 뿐이다.
환자를 우선시해야하는 의사로서의 의무와 스폰서와의 저녁약속을 저울질하는 한심한 내 모습에 스스로를 경멸하는 건 잠시였다. 나는 치료 스케줄을 변경하고 남은 날짜를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 중에서 가장 덜 중요하면서도 성격이 너그러운 스폰서는 누구인지에 대해 계산했다. 그리고 조건에 부합하는 한 명을 찾아냈다.
이번에야말로 휴가를 내야 할 것 같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가장 좋은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 최소한 휴가계 문서라도 들여다보고 있다면 잠시나마 기분이라도 좋아질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명함케이스가 있는 곳에 손을 뻗었다.
“...?”
허무하게 허공을 휘젓는 손. 입술을 깨물며 약간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돌린다.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명함케이스가, 없다.
“이걸 찾으시나봐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단정한 검은머리에 여성용 정장차림의 여자. 그녀의 손에는 내가 찾던 스폰서의 명함이 들려있었다.
“...누구시죠? 이 시간에 예약을 받은 기억은 없는데.”
그녀를 보고 뒤를 돌아선다. 그리고 침착하게 책상 밑으로 손을 뻗어 경비원 호출버튼을 눌렀다.
“아마 경비는 안 올 거예요, 닥터 그레이. 진료를 받는데 옆에 경비를 세워두면 이상하지 않겠어요? 후후.”
마른침을 삼키며 바로 옆에 있는 비상버튼을 눌렀다. 차단문을 내리며 바깥과 연결된 비상 통로의 문을 여는 버튼. 하지만 이 역시 작동하지 않는다. 아찔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애써 미소를 유지한다.
“뭘... 원하는 거죠?”
떨리는 목소리로 쥐어짜내듯 말한다. 여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가락 사이에 끼운 명함을 살살 흔들었다. 그리고는.
찌익. 찌익.
“!”
너무나도 쉽게, 갈기갈기 찢어진 명함. 그리고는 마치 꽃가루를 날려버리듯 공중에 흩뿌려버렸다.
“당신... 지금 뭐하는...!”
“후후... 그렇죠? 역시 이거 하나로는 부족하겠죠.”
경악하는 나를 무시하고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내가 그렇게 찾던 명함케이스. 그리고 수요일 저녁에 약속을 잡은 그 스폰서의 명함을 귀신같이 찾아 꺼내, 마찬가지로 찢어버린다.
“쓰레기통은 비워두셨나 모르겠네요? 이 많은 명함들을 다 버리려면 꽤나 부족할 것 같은데.”
“저기, 갑자기 내 방에서 무슨 짓이죠?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고, 경비 시스템까지. 이건 범죄에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말을 떨지 않고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 여자는 누군지, 왜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는 건지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다. 최대한 내가 시간을 끈다면 이상을 파악한 보안 팀에서 바로 경비원을 파견할 것이다. 그럼 상황은 원만히 해결되고 이 일도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겠지. 그렇게 되면 아무 일도 없는 듯 평범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다.
“그런가요? 저는 그들이 당신에게 하는 행동이 훨씬 더 범죄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명함들을 훑어보며 여자는 말을 이어나갔다.
“하나같이 정재계의 거물급 인사들 뿐. 그들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죠?”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 나의 폐부를 찔러온다. 마치, 나의 심리를 꿰뚫어보듯이. 오래전부터 날 관찰해왔던 것처럼.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흐름을 읽지 못하는 자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죠. 불쌍하게도... 이 안엔 전부 그런 자들 뿐이네요? 새 시대엔 새로운 동업자가 필요한 법인데 말이에요.”
나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는 그녀. 명함엔 이상한 문양과 함께, ‘패러데우스’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저희 패러데우스는 당신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답니다? 닥터 그레이. 협력하지 않으시겠어요? 이런 시대착오적인 귀족들따위, 당신하고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그녀의 마지막 말이 내 가슴 속 빗장을 무너트렸다. 그래. 그토록 내가 추구하던, 어쩌면 에둘러 거절의 표현을 찾아 헤매던 내가 그들에게 하고 싶었던 단 한 마디의 말이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뭘 하면 되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온 긍정의 말. 그리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명함케이스를 꺼내들었다.
“후후. 뭘 하냐니. 우선 쓰레기 청소를 마저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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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속에서 다들 건강하십니까 ㅠㅠ
전에 거울단계 후기글에서 쓴 바와 같이, 철혈 소설을 쓰던 중 아직 거울단계 뽕(?)이 다 빠지지 않은 탓인지
짧게나마 단편을 하나 끄적여봤습니다.
이번에 구상한 것은 여러분들이 아주 싫어하는 그레이의 배경스토리입니다.
1. 원래 그레이 박사는 품위나 예절을 중시하는 성격이었을 것이다.
2. 그레이 박사는 본인의 지위 상 사회에 환멸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3. 따라서 패러데우스의 제안을 큰 저항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위 가설 하나를 가지고 어제 하루동안 써봤습니다.
그레이의 정체 역시 다음 스토리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의 배경을 생각해보니 그레이 또한 매력적인 캐릭터인것 같아요!
역시 전 악역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ㅠㅠ
집필중인 철혈 소설은 일상물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그러다보니 참 어렵네요...
조금씩 짬을 내서 쓰고는 있는데 과연 언제쯤 대망의 1화를 올릴 수 있을런지.
사실 1화는 다 쓰고 2화를 쓰는 중인데 2화를 쓰면서 1화를 다시 보다보면 다시 퇴고를 하고...무한의 인피니티...
알파카를 뽑고 싶다는 말과 함께 물러가보겠습니다. (_ _)
네. 알파카... 뉴파카 말고.... 알파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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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스토리에 나왔었나요?? 제가 놓쳤나보네요 ㄷㄷㄷ 그냥 IF스토리다 하고 넘어가주세요 선생님 ㅠ | 21.03.29 17: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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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그나저나 이번 스토리는 스토리에 하바네로 잔뜩 뿌려놓고 또 악역들은 개성있게 잘 뽑았단 말이죠. 실제로 그레이가 자의적으로 협력한 악당이란 설정도 충분히 매력있어 보입니다. | 21.03.29 18: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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