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km씩 비무장지대가 형성됐다.
양측은 72시간 안에
비무장 밖으로 철수해야 했다.
정전의 모습이
조금씩 갖추어지고 있었다.
정전 조인 9일 뒤부터
유엔측과 공산측은 포로교환을 시작했다.
거제의 공산포로들은 복잡한 심정을 안고
판문점으로 향했다.
길가의 주민들은
공산포로들에게 증오심을 나타냈다.
포로들 역시 주민들에게 적대감을 나타내며
창 밖으로 옷을 내던졌다.
이른바 빅 스위치(big switch)로 불린 포로송환은
33일 동안 계속됐다.
유엔측은 7만 5천여 명의 북한군 포로와
6천여 명의 중국군 포로를 북쪽으로 인도했다.
판문점에 도착하자
공산포로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포로라는 신분이 주는 굴욕감과
돌아갔을 때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섞인 불안한 감정의 표현이었다.
공산측은 1만 3천여 명의 유엔군 포로를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판문점으로 돌아온 포로들은 공산측이 지급한
옷가지를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공산측 옷을 벗고
맨몸을 택한 포로들
그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변치않은 그들의 신념을 보여주고자 했다.
전쟁 초기 대전 전투에서
실종됐던 딘 소장도 돌아왔다.
오랜 포로 생활은 늘름했던 육군 소장을
쇠약한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포로들의 처리가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였다.
공산측은 송환을 거부하는 유엔군 포로들을 판문점으로 데려와 카메라 앞에 세웠다.
체제선전을 위한 계산된 이벤트였다.
거제도에는 2만여 명에 달하는
송환거부 포로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민군에 의해 강제 징집된 남한 출신이거나
대만 국민당군 출신 반공포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북한이나 중국이 아닌
남한에 남거나 대만으로 보내주길 바랬다.
53년 9월 송환거부 포로들을
중립국 관리에 맡긴다는 정전협정에 따라
인도관리군 3천명이 포로관리라는
달갑지 않은 임무를 안고 인천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입국을 강력히 거부했다.
인도가 친공산 국가라는게
그 이유였다.
10월 15일 부터 송환거부 공산포로들에 대한
설득 작업이 시작됐다.
설득 기간은 90일
설득 대상은 공산포로 2만 3천여 명,
유엔군 포로 359명이었다.
인도관리군은 송환거부 포로들의
설득 장소로 막사를 짓기 시작했다.
완성된 막사에서 포로들은
본국에서 파견된 설득관에 의해서 설득을 받았다.
그러나 반공포로들은
설득을 거부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북으로 보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이내 폭력으로 나타났다.
"거기 가서 설득을 받는데, 설득이 이게 됩니까?
벌써 들어가면서... 뭐 다, 그... 들어갔던 사람들이..."
"책상 다 뒤집어 놓고... 뭐, 이... 난리치는데...
뭐, 어, 어떻게 설득을 허갔어요?"
"설득을, 이 사람들은 시간은 뭐 무제한이니... 사람을, 고통을 주기를...
공갈 협박에다가... 시간을 계속 끌어요."
"이북으로 가겠단 말 나올 때까지 설득을 하니까.
사람이 완전히 녹아나는 거지."
"그래도 우린 전전 이런거 싫어...
그래서 가겠느냐 안가겠느냐 뭐 한 5분 동안 물어보면 문제가 아닌데..."
"어휴, 이놈들은 갈 때까지 설득을 계속하니 몇 시간을 두고.
그러니 그건 설득을 받을 수가 없는거 아닙니까?"
설득이 진행되면서 북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자
반공포로들은 집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득 작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고
마음을 바꾼 포로는 소수에 불과했다.
53년 12월 23일
정전협정에서 합의한 90일 간의 설득기간이 끝났다.
반공포로들의 강한 반발로 실제 포로 설득기간은
10일이 채 되지 않았다.
북한군 포로 7천 9백여명 중 188명이
마음을 바꿔 북으로 돌아갔다.
14,700여 명의 중국군 포로 중 설득을 받아
중국 본토로 돌아간 사람은 440명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웃어야 할 일이었지만
포로들은 쉽게 웃을 수 없었다.
포로들이 돌아갈 때면 으레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