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야규(柳生) 가(家)의 황금시대
1.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1594년(文祿 3년)은 야규(柳生) 가의 황금시대가 시작된 해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이때부터 야규 렌야사이(柳生連也齋)가 사망하는 1694년(元祿 7년)까지의
100년간, 야규 일족에서는 수많은 영걸들이 활약했고, 최고의 번성기가 계
속 이어졌다.
1594년 5월, 야규 무네요시(宗嚴:石舟齋 세키슈사이)는 도쿠가와 이에야
스에게 초청받아 교토의 임시 막사로 찾아가 뵙고, 데리고 간 아들 무네노
리(宗矩)와 함께 검술을 시범보였다.
두 사람의 검술 솜씨를 본 이에야스는 대단히 흥이 나서 손수 목검을 들
고 무네요시를 상대로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무네요시는 스승인 가미스미 노부쓰나에게서 전수받은 무검술(無
劍術)로서 보기좋게 이에야스를 제압했다.
이에야스는 뒤로 넘어지는 가운데서도,
"훌륭한 솜씨다!"
라고 감탄의 소리를 지르고, 그 자리에서 사범 임명장을 주고 200석의
녹을 내리려 하였다.
그러나 무네요시는 이미 68세의 나이였다.
"노령이라서……"
하며 한사코 사양하고, 대신 자기 아들인 무네노리를 추천하였다.
이리하여 무네노리는 이에야스의 검술사범이 되어 측근에서 모시게 되었
다.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야규 마다우에몽 무네노리(후의 다지마노가미)는 무네요시의 다섯째 아
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웃마을 오쿠하라 딸로서, 현모양처로서 널리 알
려져 있다.
무네노리가 태어나던 무렵, 장남인 요시가쓰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불
구가 되는 바람에 무술의 길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야규 가의
가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무네노리가 15세 되던 해, 가신 중 한 사람이 야규 가에 숨겨진 밭이 있
다고 누명을 씌워 참소하는 바람에 도요토미로부터 처벌을 받아, 가운은
더한층 기울었다.
무네노리의 도쿠가와 가에 대한 봉직은 이러한 야규 가에 있어서 서광이
나 다를 바 없었으며, 가문 부흥의 시발이기도 하였다.
일족의 기대는 얼마 가지 않아 실현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시
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장군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무네노리는 야규 가의 구영토 3천 석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도쿠
가와 히데다다(후에 2대 장군)의 검법 사범이 되었다.
그뒤로도 계속 승진하여 도쿠가와 이에미쓰(후에 3대 장군)의 검법 사범
으로 봉직하였고, 경찰청 장관이라 할 수 있는 관작에 임명되었으며, 마침
내는 다이묘(大名)의 반열에 들어가 1만 2천 5백 석의 녹봉을 받게 되었다.
무네노리는 2대에 걸친 장군 사범으로서, 말하자면 [천하치국의 검]을
이상(理想)으로 하였다.
검의 진수를 깨닫는 데는 참선이 매우 좋다는 점을 이에미쓰에게 설복하
고 다쿠앙(澤庵) 선사를 천거한 결과 이에미쓰가 다꾸앙을 초빙하여 동해
사(東海寺)를 건립하게 한 것 등이 그 일례이다.
무네노리는 물론 무술에 있어서도 명인이었다.
[오사카 여름전투] 무렵, 적병 수십명이 히데다다의 본진을 불의에 습격
하였다. 본진이 거의 무너질 무렵, 무네노리는 히데다다의 말 앞을 가로막
고 눈 깜짝할 사이에 7명을 쓰러뜨리고, 앞으로 계속 전진하여 용전을 보
여줌으로써 사기가 떨어진 아군의 전세를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에미쓰 시대에 있어서도 이러한 이야기가 전하여지고 있다.
이에미쓰는 무술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 때인가 에도성 내 뜰에서 측근
의 젊은 무사들로 하여금 검술을 연마토록 하면서 흥겨워하고 있었다.
이때 마술(馬術)에 능한 도리호베 분구로라는 사람이,
"마상에서의 시합이라면 지지 않습니다."
라고 호언하여, 마상에서의 시합을 시켜보았다.
과연 도리호베는 장담대로 상대가 나오는 족족 차례차례 무찔러버렸다.
그러자 이에미쓰는 무네노리에게 나가라고 명하였다.
무네노리는 말을 타고 나가다가 상대와의 거리가 세 칸 정도 되었을 무
렵 자기의 말을 멈추고 앞으로 나오는 상대의 말의 면상을 한차례 후려쳤
다.
말은 놀라서 뛰어올랐다. 분구로는 말을 진정시키려고 고삐를 조정하였
다.
허점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무네노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고
들어가 분구로를 타격하였다.
이에미쓰는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기회에 따른 허실의 움직임은 참으로 훌륭했다. 과연 명인이라 할 만하
다."
또 성내에서 신하들의 특기 자랑을 보고 있을 때, 무네노리는 이에미쓰
의 지시에 따라 신하들이 행하는 검무 동작 중에 허점이 있는가 없는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검무가 끝나자 이에미쓰가 무네노리에게 물었다.
"허점을 발견하였는가?"
"예. 대신석 쪽에서 출 때만 잠시 허점이 드러났을 뿐, 나머지는 완벽했
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네노리의 이같은 대답에 이에미쓰는 검무를 춘 신하를 불러 물었다.
그 신하 역시,
"그때만 조금 기를 뺐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미쓰는 새삼 무네노리의 안목에 경탄해마지 않았다.
야규 무네노리는 쇠퇴해진 가문을 부흥시킨 사람이었던 만큼 역경에 처
해 있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남달리 많은 것 같이 보였다.
이에미쓰는 무네노리를 대단히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곳도리 성 사만석을
주겠다고 의중을 피력한 바 있었다. 그러나 무네노리는 불우한 처지에 있
던 다른 가문의 복권을 진언하고 자신은 칼 한 자루로써 만족해 하는 그런
위인이었다.
무네노리의 무술과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무네노리는 원숭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 원숭이도 문하생들의 검술 연습을 보고 익숙해져서 검 놀림
을 어지간히 잘 하게 되었다.
하루는 창을 휴대한 무사가 찾아와서 창과 검의 대결을 신청하였다.
무네노리는 우선 원숭이와 맞서보게 하였다.
"원숭이가 지면 그때 내가 상대해주겠소."
"나를 멍청이로 만들 셈인가."
그 무사는 화를 내면서 원숭이와 맞섰지만, 그만 지고 말았다. 그는 부끄
러워하며 물러갔다.
몇 년이 지나서 그 무사가 다시 찾아와 원숭이와의 시합을 요청하였다.
무네노리는 ,
"귀하의 솜씨는 많이 능숙해졌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소."
하고 말했지만, 그 무사는 굳이 원숭이와의 대결을 원하였다.
하는 수 없이 원숭이를 내세우니, 원숭이는 그 무사의 자세를 한 번 보
자마자 질린 소리를 지르며 도망쳐버렸다.
무네노리는 이 창술자의 관직을 주선해주었다고 한다.
이러하였으므로 개중에는 뇌물을 쓰며 주선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청탁을 받아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동해사의 다쿠앙은 걱
정이 되어 엄중한 훈계를 담은 서한을 무네노리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네노리는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는 무척 엄격하였다.
어느 때인가, 장군 이에미쓰가 무네노리의 삼남 무네후유에게,
"아버지와 시합을 해보라"
고 명하였다.
부자는 맞섰지만 몇번을 해도 번번이 무네후유가 지고 말았다.
무네후유는 분해서,
"길이가 좀 긴 칼이었으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
하고 중얼거렸다.
이를 들은 이에미쓰가,
"그렇다면 긴 칼을 가지고 맞서 보아라."
명하였다.
무네후유는 긴 칼을 가지고 시합에 나섰다.
그러나 무네노리는 ,
"이 무례한 녀석!"
호통을 치면서 매섭게 한차례 치자 무네후유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
았다.
"긴 칼이면 이길 수 있다, 라는 그러한 분별없는 말은 야규 가문에 태어
난 사람으로서는 입에 담아서는 안될 말임을 알아야 한다."
라는 것이 무네노리의 교훈이었다.
그런데 무네노리에게는 승패를 다투는 시합의 기록은 거의 없다. 무네노
리는 [천하치국의 검]을 연마하는 데 노력하였던 것이다.
1646년, 무네노리가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이에미쓰는 의논 상대
가 없어졌다고 깊이 한탄하였다.
From - 재미있는 검객이야기 -일본편-
유니텔 무예동 검도/ 거합도 게시판.
Written by - 유재주
1.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1594년(文祿 3년)은 야규(柳生) 가의 황금시대가 시작된 해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이때부터 야규 렌야사이(柳生連也齋)가 사망하는 1694년(元祿 7년)까지의
100년간, 야규 일족에서는 수많은 영걸들이 활약했고, 최고의 번성기가 계
속 이어졌다.
1594년 5월, 야규 무네요시(宗嚴:石舟齋 세키슈사이)는 도쿠가와 이에야
스에게 초청받아 교토의 임시 막사로 찾아가 뵙고, 데리고 간 아들 무네노
리(宗矩)와 함께 검술을 시범보였다.
두 사람의 검술 솜씨를 본 이에야스는 대단히 흥이 나서 손수 목검을 들
고 무네요시를 상대로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무네요시는 스승인 가미스미 노부쓰나에게서 전수받은 무검술(無
劍術)로서 보기좋게 이에야스를 제압했다.
이에야스는 뒤로 넘어지는 가운데서도,
"훌륭한 솜씨다!"
라고 감탄의 소리를 지르고, 그 자리에서 사범 임명장을 주고 200석의
녹을 내리려 하였다.
그러나 무네요시는 이미 68세의 나이였다.
"노령이라서……"
하며 한사코 사양하고, 대신 자기 아들인 무네노리를 추천하였다.
이리하여 무네노리는 이에야스의 검술사범이 되어 측근에서 모시게 되었
다.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야규 마다우에몽 무네노리(후의 다지마노가미)는 무네요시의 다섯째 아
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웃마을 오쿠하라 딸로서, 현모양처로서 널리 알
려져 있다.
무네노리가 태어나던 무렵, 장남인 요시가쓰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불
구가 되는 바람에 무술의 길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야규 가의
가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무네노리가 15세 되던 해, 가신 중 한 사람이 야규 가에 숨겨진 밭이 있
다고 누명을 씌워 참소하는 바람에 도요토미로부터 처벌을 받아, 가운은
더한층 기울었다.
무네노리의 도쿠가와 가에 대한 봉직은 이러한 야규 가에 있어서 서광이
나 다를 바 없었으며, 가문 부흥의 시발이기도 하였다.
일족의 기대는 얼마 가지 않아 실현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시
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장군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무네노리는 야규 가의 구영토 3천 석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도쿠
가와 히데다다(후에 2대 장군)의 검법 사범이 되었다.
그뒤로도 계속 승진하여 도쿠가와 이에미쓰(후에 3대 장군)의 검법 사범
으로 봉직하였고, 경찰청 장관이라 할 수 있는 관작에 임명되었으며, 마침
내는 다이묘(大名)의 반열에 들어가 1만 2천 5백 석의 녹봉을 받게 되었다.
무네노리는 2대에 걸친 장군 사범으로서, 말하자면 [천하치국의 검]을
이상(理想)으로 하였다.
검의 진수를 깨닫는 데는 참선이 매우 좋다는 점을 이에미쓰에게 설복하
고 다쿠앙(澤庵) 선사를 천거한 결과 이에미쓰가 다꾸앙을 초빙하여 동해
사(東海寺)를 건립하게 한 것 등이 그 일례이다.
무네노리는 물론 무술에 있어서도 명인이었다.
[오사카 여름전투] 무렵, 적병 수십명이 히데다다의 본진을 불의에 습격
하였다. 본진이 거의 무너질 무렵, 무네노리는 히데다다의 말 앞을 가로막
고 눈 깜짝할 사이에 7명을 쓰러뜨리고, 앞으로 계속 전진하여 용전을 보
여줌으로써 사기가 떨어진 아군의 전세를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에미쓰 시대에 있어서도 이러한 이야기가 전하여지고 있다.
이에미쓰는 무술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 때인가 에도성 내 뜰에서 측근
의 젊은 무사들로 하여금 검술을 연마토록 하면서 흥겨워하고 있었다.
이때 마술(馬術)에 능한 도리호베 분구로라는 사람이,
"마상에서의 시합이라면 지지 않습니다."
라고 호언하여, 마상에서의 시합을 시켜보았다.
과연 도리호베는 장담대로 상대가 나오는 족족 차례차례 무찔러버렸다.
그러자 이에미쓰는 무네노리에게 나가라고 명하였다.
무네노리는 말을 타고 나가다가 상대와의 거리가 세 칸 정도 되었을 무
렵 자기의 말을 멈추고 앞으로 나오는 상대의 말의 면상을 한차례 후려쳤
다.
말은 놀라서 뛰어올랐다. 분구로는 말을 진정시키려고 고삐를 조정하였
다.
허점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무네노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고
들어가 분구로를 타격하였다.
이에미쓰는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기회에 따른 허실의 움직임은 참으로 훌륭했다. 과연 명인이라 할 만하
다."
또 성내에서 신하들의 특기 자랑을 보고 있을 때, 무네노리는 이에미쓰
의 지시에 따라 신하들이 행하는 검무 동작 중에 허점이 있는가 없는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검무가 끝나자 이에미쓰가 무네노리에게 물었다.
"허점을 발견하였는가?"
"예. 대신석 쪽에서 출 때만 잠시 허점이 드러났을 뿐, 나머지는 완벽했
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네노리의 이같은 대답에 이에미쓰는 검무를 춘 신하를 불러 물었다.
그 신하 역시,
"그때만 조금 기를 뺐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미쓰는 새삼 무네노리의 안목에 경탄해마지 않았다.
야규 무네노리는 쇠퇴해진 가문을 부흥시킨 사람이었던 만큼 역경에 처
해 있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남달리 많은 것 같이 보였다.
이에미쓰는 무네노리를 대단히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곳도리 성 사만석을
주겠다고 의중을 피력한 바 있었다. 그러나 무네노리는 불우한 처지에 있
던 다른 가문의 복권을 진언하고 자신은 칼 한 자루로써 만족해 하는 그런
위인이었다.
무네노리의 무술과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무네노리는 원숭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그 원숭이도 문하생들의 검술 연습을 보고 익숙해져서 검 놀림
을 어지간히 잘 하게 되었다.
하루는 창을 휴대한 무사가 찾아와서 창과 검의 대결을 신청하였다.
무네노리는 우선 원숭이와 맞서보게 하였다.
"원숭이가 지면 그때 내가 상대해주겠소."
"나를 멍청이로 만들 셈인가."
그 무사는 화를 내면서 원숭이와 맞섰지만, 그만 지고 말았다. 그는 부끄
러워하며 물러갔다.
몇 년이 지나서 그 무사가 다시 찾아와 원숭이와의 시합을 요청하였다.
무네노리는 ,
"귀하의 솜씨는 많이 능숙해졌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소."
하고 말했지만, 그 무사는 굳이 원숭이와의 대결을 원하였다.
하는 수 없이 원숭이를 내세우니, 원숭이는 그 무사의 자세를 한 번 보
자마자 질린 소리를 지르며 도망쳐버렸다.
무네노리는 이 창술자의 관직을 주선해주었다고 한다.
이러하였으므로 개중에는 뇌물을 쓰며 주선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청탁을 받아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동해사의 다쿠앙은 걱
정이 되어 엄중한 훈계를 담은 서한을 무네노리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네노리는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는 무척 엄격하였다.
어느 때인가, 장군 이에미쓰가 무네노리의 삼남 무네후유에게,
"아버지와 시합을 해보라"
고 명하였다.
부자는 맞섰지만 몇번을 해도 번번이 무네후유가 지고 말았다.
무네후유는 분해서,
"길이가 좀 긴 칼이었으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
하고 중얼거렸다.
이를 들은 이에미쓰가,
"그렇다면 긴 칼을 가지고 맞서 보아라."
명하였다.
무네후유는 긴 칼을 가지고 시합에 나섰다.
그러나 무네노리는 ,
"이 무례한 녀석!"
호통을 치면서 매섭게 한차례 치자 무네후유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
았다.
"긴 칼이면 이길 수 있다, 라는 그러한 분별없는 말은 야규 가문에 태어
난 사람으로서는 입에 담아서는 안될 말임을 알아야 한다."
라는 것이 무네노리의 교훈이었다.
그런데 무네노리에게는 승패를 다투는 시합의 기록은 거의 없다. 무네노
리는 [천하치국의 검]을 연마하는 데 노력하였던 것이다.
1646년, 무네노리가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이에미쓰는 의논 상대
가 없어졌다고 깊이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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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 유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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