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와영어 그대로 정식 발매가 많이 이루어지는 요즘, 한글화 소프트는 발매되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나 봅니다. 국내에도 많은 팬을 지닌 마계전기 디스가이아 시리즈와 메탈 기어 솔리드 시리즈의 최신작이 각각 한글화 없이발매된 요즘, 전혀 눈에 띄지 않다가 한글화로 인해 이슈가 된 게임이 있습니다. 바로 사이버 프론트 코리아(CFK)에서 발매한 아가레스트 전기입니다.
아가레스트전기는 아이디어 팩토리의 자회사인 컴파일 하트와 사쿠라 대전으로 유명한 레드 엔터테인먼트가 손을 잡고 만든 게임입니다. 레드 엔터테인먼트는사쿠라 대전이나 건 그레이브 등 인상적인 시나리오로 기억되는 개발사고, 아이디어 팩토리는 메이저하진 않지만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에게 묘한 중독성을 제공하는 게임 시스템으로 유명한(?) 개발사입니다. 유명 게임의 후속작이나 애니메이션 원작이 아니면 주목받기 어려운 최근의 게임 시장을 합작이라는 형태를 통해정면 돌파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입니다.
타이틀 화면. |
오프닝도 깔끔하게 한글화. |
물리쳐야할 거대한 악의 세력이 있고, 홀연히 분한 주인공의 곁에 동료들이 모여들어 악을 물리친다는 아가레스트 전기의 전체적인스토리는 다소 고전적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 여느 게임들과 다른 아가레스트 전기만의 특징이 녹아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대를 이어서 게임이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초대부터 5대에 걸친 사명의 대물림을 각 세대의 주인공은 각기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낙천적으로받아들이기도 하고, 어떤 자는 운명을 거부하고 비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성격이 제각각이다 보니 세대가 바뀔 때마다 게임의 분위기 역시 많이 달라집니다.
이런 타입의 아들을 거치더라도. |
의지만큼은 잘 전해져 가는 듯? |
자식을 낳아후대에 걸쳐 모험을 계속한다는 설정은 아가레스트 전기 이전에도 종종 있어왔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 자식들과 모험을 하는 드래곤 퀘스트 V. 플레이어 캐릭터가사망하면 자식으로 뒤를 이어 모험을 이어나갈 수 있는 루나틱 돈. 그리고 죽지 않는 주인공이 동료들의희로애락을 지켜보는 비너스 & 브레이브스 등 일본식 RPG에서도제법 심심찮게 등장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 요소는아가레스트 전기의 시나리오나 시스템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포커스는 결혼, 즉 히로인과의 로맨스 그 자체에 맞춰져 있습니다. 히로인 캐릭터들이최근 인기 미소녀의 기본소양인 튕김내숭은 물론 가터벨트나 동물귀, 망사 스타킹(…)과 같은 페티시 계열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것을 보면 게임 내에서 히로인의 비중이 얼마나 큰 지를 알수 있을 정도입니다.
전형적인 튕김내숭 캐릭터인 퓌리아. |
하나하나 뜯어보면 대단한 설정인 쉘파닐. |
각 세대 종료 시에는 평소와 다른 히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여기에 주인공의후손과 1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함께하는 동료 캐릭터의 게임 내 배치도 꽤 훌륭합니다. 대부분 인간보다 오래 사는 아인종들이라 “네 조부는 말이지…”와 같이 보통의 RPG들과는다른 관점에서 이야기의 운을 떼는 경우도 잦습니다. 4번이나 교체되는 주인공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함께하는 동료이기에 게임의 후반부가 되면 주인공보다 동료에게 감정이입이 되기도 합니다. 조금 색다른느낌이랄까요?
누님 같은 역할을 하는 에리스. |
별로 자식 교육에 도움은 안 될 타입. |
게임의 기본적인시스템은 크게 어드벤처 파트와 전투 파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큰 형태의 맵인 월드맵은 마스 형태의맵을 하나씩 클리어해나가는 형태입니다. 맵을 클리어해나가다가 특정 지역에 들어서면 던전 형태로 된맵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보스전에서는 여러 번의 전투가 연속으로 벌어지기도 합니다. 특정한 이벤트 포인트에 돌입하면 전형적인 텍스트 어드벤처 형태로 진행됩니다.이벤트 도중 나타나는 회화문을 선택해 히로인의 호감도가 오르거나 내려가는 시스템은 영락없는 미소녀 게임의 그것입니다. 미소녀 게임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이 같은 형태에 회화 스킵이나 자동 스크롤 등의 기능도 제공되어 때론 게임의장르를 의심케 하기도 합니다.
월드맵은 전형적인 마스 정복형. |
어디서 많이 본 선택지인데…. |
던전 탐험은 이동속도가 느려서 좀 지루하다. |
인상적인세계관과 캐릭터 배치와는 달리 고해상도와 풀 보이스 지원 정도를 제외하면 유저가 원하는 차세대기 게임에는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도트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캐릭터 스프라이트와 조금 심심한 배경음악은 아쉬운 부분 정도로 치부할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전투맵이 하나뿐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전투에들어가면 ‘인챈트 필드’라 이름 붙은 전투용 필드를 유저가 원하는 것으로 선택해 사용할 수있긴 합니다. 그러나 인챈트 필드를 둘러싼 콜로세움 형태의 배경이 늘 똑같기 때문에 시각적으로단조로운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유저가 익숙한 필드에서 전략을 펼칠 수 있도록 인챈트 필드를 선택할수 있게 해둔 점은 좋으나 보스전이나 중요 전투는 미리 정해진 인챈트 필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유저가 유리한 필드를 선택한다는 의미 역시 많이퇴색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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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스킬의 종류는 다양하게 준비돼 있으며 연출 또한 화려한 편. |
전투 시스템은조금 흥미롭습니다. 보통 SRPG에서는 고저차나 지형 효과, 장해물 등이 전략성을 살리곤 합니다만, 아가레스트 전기에서는 턴과행동력, 그리고 진형이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다름 아닌 진형입니다. 아가레스트 전기의 전투는 이동 페이즈와 전투 페이즈가구분되어 있습니다. 전투를 시작하면 적과 아군이 동시에 이동할 지점을 선택하고 이동 페이즈가 끝나면동시에 이동이 이루어집니다. 때문에 무브 페이즈 때의 진형이 다른 게임들보다 훨씬 중요시됩니다.
전투에 들어서면캐릭터 위치 주변에 녹색 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녹색 칸들은 ‘익스텐드 에리어’라 하는데, 만일 아군이이 칸에 위치해 있다면 두 캐릭터는 서로 링크되어 AP회복 등의 부속 효과와 더불어 ‘익스텐드 어택’이라 불리는 연계 공격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행동력이 느린 캐릭터라 할지라도 행동력이 빠른 캐릭터에게 링크되어 있으면 자신의 턴에 관계없이 공격할수 있기 때문에 진형은 더욱더 중요해집니다.
연계 개념은 후반으로 넘어갈수록 더욱 중요해진다. |
몰매를 때리기 위해서도 필수. |
이런 연계 시스템은또 다른 시스템인 ‘아츠’로 인해 더욱 부각됩니다. 아가레스트전기의 전투에는 AP라 불리는 행동 포인트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공격에는필수, 심지어 아이템을 사용할 때도 필요한 것이 이 AP입니다. 여러 개의 스킬을 조합해 사용하는 아츠는 일반 스킬에 비해 높은 공격력과 효과를 가지지만 많은 AP를 필요로 합니다. 한 명의 캐릭터가 가지는 AP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연계를 통해 아츠를 합체 공격처럼 내는 것이 전투에서 매우 중요시됩니다. 다만 적들도 마찬가지로 진형을 꾸려 연계 공격을 해오기 때문에 적 진형의 중심이 되는 유닛을 다른 칸으로 밀어내거나, 먼저 처리하는 등의 전략을 구사해야 합니다.
내구도가 0이 되면 강력한 브레이크 아츠가 작렬! |
자주 보기는 어려운 엑스트라스킬. |
사실 아가레스트전기의 전투는 꽤 어려운 편입니다. 게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유저는 생각보다 많은 시스템을 익혀야 합니다. 게임 초반 튜토리얼을 통해 유저에게 약간의 어드바이스가 제공되긴 합니다. 그러나레벨업에 따른 캐릭터의 스테이터스 수치 분배나 윌파워(로봇 대전 시리즈의 특기와 유사합니다)에 대해서는 적절한 가이드 라인이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 아이디어 팩토리의 SRPG를 여럿 즐겨본 유저라면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않은 유저는 많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 아가레스트 전기 시스템의 맹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망한 동료는 마을에서 부활하기 전까지 출전 불가. |
셀렉트 버튼을 잘못 누르면 자동 전투가 실행된다. |
실제 게임을플레이하다 보면 게임에 익숙해져 갈 때의 몰입도는 매우 높습니다. 게임의 달성도에 따라 합성 재료 등을얻을 수 있는 칭호 시스템은 게임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장치 중 하나입니다. 동료들의 성장 방향에 맞춰탱커나 힐러, 딜러들의 역할을 부여해 육성해 보는 것도 즐겁고, 무기의인챈트 및 강력한 무기를 제작하는 시스템에도 큰 재미를 느낍니다. 하지만 게임에 한참 몰입한 중반 이후유저는 큰 문제점에 봉착하게 됩니다.
클래스 체인지. |
여간해선 눈치 채기 힘든 컨버트 시스템. |
일종의 도전과제인 칭호 시스템 등 참신한 시스템이 많지만…. |
바로 좋은아이템을 세팅하고 강력한 파티를 구성한 이후에는 게임이 지루해지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게임을진행하다 보면 자연히 자신에게 맞는 필승 패턴을 발견하게 됩니다. 필승 패턴은 게임을 진행해 나갈수록 점점더 개량되고 결국에는 더 이상 고칠 부분이 없는 최종 형태가 완성됩니다. 이제 모든 전투는 이 필승 패턴으로만진행하게 되고, 같은 패턴이 계속되는 게임은 자연히 지루해지기 마련입니다. 보스전을 제외하면 정형화된 전투를 반복하는 것만으로 모든 전투에 승리할 수 있게 되는 점은 큰 문제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매너리즘에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점입니다. 강한적이 나타날수록 유저는 아이템과 스테이터스를 강화해나가며 더욱더 자신의 필승 패턴만을 고집하게 됩니다. 이런지루한 양상은 게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어쩌면 이것은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인SRPG들의 스테이지는 아무리 많아도 100개를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가레스트 전기는 한 세대에서만 80번 가까운 전투가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전투의 규모가 작다고 해도 평균적으로 한 전투당 10분 정도의시간이 소요됩니다. 더구나 캐릭터 육성이 목적이더라도 있더라도 스토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강제 전투가너무 많기 때문에 게이머는 전투에 진저리가 날만도 합니다. 결국 유저는 쉽고 빠른 전투를 추구할 수밖에없게 됩니다. 이런 악순환을 캐치하지 못한 점은 꽤 많은 수의SRPG를 제작했던 아이디어 팩토리의 역량을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보스전 만큼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는 점을 기뻐해야 할지…. |
다행히 자막한글화로 이루어진 한글화는 번역이나 한글 폰트 선정 모두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이루어진 편입니다. 기본적으로전투 장면에서 외치는 음성은 자막이 나오지 않지만 게임에서 중요한 요소인 결혼식 동영상 등은 빠짐없이 한글화되어 있습니다. 다만 480p 이하의 해상도에서 폰트 가독성이 많이 떨어지는 점은조금 아쉬운 점입니다. 게임은 차세대기 스펙에 못 미치는데 유저의AV 시스템은 차세대급을 요구하니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480p 해상도에서는 작은 듯한 폰트. |
이건 미처 생각 못한 부분일까요? |
아가레스트전기는 어찌 보면 일러스트와 시나리오를 빼면 딱히 내세울 게 없는 게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글화덕분에 그 몇 안 되는 장점이 크게 부각된 게임입니다. PS3 스펙에 걸맞은 게임을 찾는 유저들 눈에는차지 않겠지만, 느긋하게 오래 즐길 수 있는 한글화 RPG를찾는 유저들이라면 나름의 재미를 찾아가면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점수로 매기자면기본점은 낮지만 한글화로 1점, 취향인 히로인을 발견했다면 1점, 게임을 극한까지 즐기는 유저라면 또 1점씩, 유저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편애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게임이라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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