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어2를 너무나 재밌게 즐긴 유저입니다.
클리어한 지는 시간이 꽤 지났지만
소감을 정리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남겨봅니다.
전체적으로는 게임의 아쉬운 점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지만,
너무 재밌게 즐겼기 때문에 눈에 띈 아쉬움이라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클리어한 지 나름 시간이 꽤 지난 상황이라
그간 여러 리뷰나 반응들을 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라오어2에 대한 소감 뿐 아니라,
리뷰들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도 정리해 볼까 합니다.
그 중에서 일단 루리웹 공식 리뷰의 내용을 제가 읽은 대로 요약하자면,
조엘의 죽음은 납득할만하고 엘리 파트는 감정적으로 공감이 가고 흡입력 있지만,
애비 파트의 부족한 개연성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균형을 깨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애비 파트의 부족한 개연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 맞춰진 퍼즐은 아니지만,
약간의 디테일의 추가와 정리를 통해 손쉽게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텐데
제작사가 너티독스럽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너티독은 너티독스럽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었을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라오어2에는 전작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전작의 ‘장르’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라오어에 대해 ‘영화적 게임’이라고 말 합니다.
영화는 수동적 매체이고 게임은 능동적 매체입니다.
게임은 영화와 다르게 능동적 매체라는 점에서
게이머의 플레이를 전제합니다.
관객이 졸아도 영화는 흘러가지만
게이머가 졸면 게임은 그대로 멈추고 말겠죠.
결국 게이머를 붙들어 놓기 위해 게임은 게이머에게
플레이의 ‘동기’를 제공해야 합니다.
동기는 보상으로 구체화되고, 동시에 이러한 보상에 이를 수 있는
완료 가능한 미션이 주어져야 합니다.
요컨대 게임이 플레이되기 위해서 게임은
합리적 경험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문제는 ‘영화적 게임’이라는 ‘장르’에서 발생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영화라는 매체의 기계적 형식에
관객에 대한 보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화는 관객에게
비합리적인 상황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은 그럴 수 있을까요?
가령 전작의 도입부에서
마을 사람들이 좀비처럼 변해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 속에서
조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해 자신과 토미와 사라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비합리적 상황이죠.
여기서 조엘을 플레이하는 게이머의 입장이 그와 같을 수 있을까요?
게이머는 이 상황이 게임 속 상황이기에
몇십 미터 떨어진 체크포인트에 도달하면 주인공이
죽지 않고 다음 내용이 이어질거라 생각하며 게임을 진행합니다.
이것은 분명 합리적 상황입니다.
조엘이 아무리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달려도
게이머는 이 상황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게 됩니다.
분명 영화에서도 순전히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위해 나오는
구태의연한 장면들이 있겠지만,
게임은 더 직접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모든 장면이 합리적 해결책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과연 게임은 영화적일 수 있을까요?
닐 드럭만이 불만족스러워했고, 극복하려 했던 대상은
이러한 장르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에 언급한 게임의 기계적 형식을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전히 게임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게이머가 게임을 플레이해야만 하고
거기에는 보상이 필요하죠.
그렇다면 라오어2가 지닌 의미의 차원에서는 어떨까요?
게임의 내러티브에 비합리적인,
다시 말해 보상 불가능한 요소를 넣는다면 어떨까요?
그게 바로 조엘의 죽음이라면 어떨까요?
게임을 플레이한 많은 분들이
이 게임을 조엘의 죽음을 통한 엘리의 성장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셨습니다.
다르게 말해 엘리가
조엘의 죽음으로부터 보상을 얻고
그 보상은 애비를 용서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관점입니다.
저는 여기에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조엘의 죽음이 비합리적 대상일 가능성입니다.
조엘의 죽음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 불가능한 동시에
모든 의미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며,
엔딩에서 엘리가 애비를 놔주는 이유는
애비의 죽음이 조엘의 죽음을 보상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애비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복수를 ‘포기’하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엔딩에서
엘리가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게이머에게 더욱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도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으니
그건 또다시 애비라는 캐릭터입니다.
많은 경우 애비 파트는 부족한 개연성과 디테일로
비판 받았지만, 이 관점에서 애비는
디테일이 과한 캐릭터가 됩니다.
라오어2의 여정이 앨리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고통과
무의미에 빠지는 과정으로 작용하려면,
(그리하여 비합리적 서사를 완성하고 닐 드럭만이 '포주'가 아니게 되려면)
애비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등장하는 악역
안톤 쉬거처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의미를 마주하게 하고
공포를 느끼게 하는 인물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관객이 안톤 쉬거에 대해 샷건으로 사람을
살해한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듯이,
게이머도 애비가 조엘을 살해했다는 사실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게임은 애비의 ‘내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녀가 어떤 일상과 관계 속에서
생활하는지, 심지어 조엘을 죽인 동기까지
자세히 밝혀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갖는 좋지 못한
인상을 수용하더라도, 애비는 결코 싸이코패스가 아닙니다.
애비에게 있어 조엘을 죽이는 행위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이유 없이 행해지는 유흥이 아닙니다.
그녀는 어떤 의미망에 포함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분명 애비를 엘리의 거울로
배치하여 그들의 합이
의미를 갖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관점을 바꿔
앨리가 애비를 용서했음을
설명하는 글을 여럿 읽어보아도
언제나 같은 의문이 맴돌았습니다.
앨리가 애비를 용서했다면,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이러한 용서는 누군가는 알아보고 누군가는 지나칠
지엽적인 디테일이나 소극적 제스쳐 속에
머무르는 것을 넘어 전체적인 사건의 흐름 속에
유기적으로 녹아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보조적인 의미를 작은 디테일 속에 넣어
표현하는 방식은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지만,
그와 반대로 드러나야 하는 핵심적 요소를
작은 디테일 속으로 숨기는 라오어2의
내러티브는 모호하다고 느껴졌으며
이러한 내러티브의 ‘우회’가 필요한 이유도
명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게임을 플레이 한 사람들은
엔딩에서 앨리가 애비를 죽이지 않는 모습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용서 혹은 포기라고 받아들이겠지만,
이는 라오어2의 텍스트가 지닌 풍성함이 아닌
모호함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모호함이 약간은 직무유기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다시 루리웹 리뷰에서 언급되었던 의문,
어째서 너티독이 그들답지 않게
너무 쉬운 실수를 범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너티독과 닐 드럭만은
자신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라오어2에 대해서는 정작 그들이 무엇을 원해야 할지 제대로 결정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요?
장르를 총체적으로 부정하자니 게임이 완성될 수 있을지 불투명하고,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는 방식은 스스로에게 불만족스럽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짐작합니다.
(왠지 닐 드럭만 특유의 힘 없는 표정이 생각나네요)
장르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닐 드럭만에게는 현실적으로 게임 제작 대신
영화나 드라마 제작이라는 선택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게임을 택했고
라오어 2는 제가 너무나 재밌게 즐긴 게임이지만,
이 작품을 장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게임을 만드는지에 대한
그의 대답으로 읽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라오어2에 관한 많은 소감 중에
송경원 기자의 글에 가장 많이 공감 했습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고 그냥 기억나는 대로 몇 자
옮겨 적으며 글을 마치려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오어2는 게이머를 관객으로 대체하려 하고,
게임을 하는 입장에서 이런 시도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일단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
그다음은 최선을 다 해본 뒤 생각할 것.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런 게 아닐까.”
(IP보기클릭)115.22.***.***
어떤 영화감독이 그랬던가요 모든 감정을 말로 풀어버리면 진부해지고 시시해져버린다고..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표정이나 제스쳐를 볼 수 없으니 감춰진 감정을 유추하는데 한계가 있어 감정묘사도 흔히 심도있게 서술되죠. 영상과 텍스트의 영역은 최소한 그렇게 구분이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오어가 그런면에서 비언어적인 감정 표현이 많은 작품이고 때문에 한번의 정주행으로 모든 내러티브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게임이라는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번 엔딩을 보신 분들과 다회차를 플레이한 분들의 소감도 꽤 다른듯 하구요. 지난 2년간 많은 소감들을 봐왔는데 부정적인 의견들중 공통되는 것들이 말씀대로 게임의 동기와 보상에 대한 부분, 즉 조엘의 죽음과 복수에 대한 것에 촛점이 맞춰져서 그런게 아닐까 싶더군요. 파트2에서 제작자들이 가장 공을 들이고 심도있게 표현한 부분이 엘리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엘리는 조엘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난 후에 우울감을 비롯해서 몸을 떤다던지 악몽을 꾸거나 플래시백을 경험하는 등 전형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게 됩니다. PTSD를 잘 알지 못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플레이어들은 당연히 엘리의 감정을 온전히 공감하긴 어려울테죠. 시간이 지날수록 PTSD는 높은 확률로 자책의 감정으로 변하고 엘리 역시 농장에서 엘리에게 구해달라는 조엘의 플래시백은 엘리 스스로가 조엘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걸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고 봅니다. 그 이후 농장에서 디나와 JJ를 뒤로한채 다시 애비를 찾아 떠나는 모습은 더 이상 복수가 목적이 아닌 집착에 가깝죠. 닐 드럭만도 그 장면에 대해서 그렇게 코멘트를 했었구요. 때문에 죽음의 문턱까지 간 애비를 놓아주기 직전 기타를 든 조엘이 온화한 미소로 엘리를 응시하는 장면은 애비에 대한 용서나 복수의 포기가 아닌 엘리 자신에 대한 용서와 해방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IP보기클릭)106.101.***.***
전 솔직히 같은 인물과 사건을 두고 다양한 해석과 관점이 존재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작품의 가치를 높게 치고 싶습니다. 단편적인 예로 누군가는 마지막 들판에서 손가락을 잃은 엘리의 상실을 보겠지만 누군가는 비탄과 분노에 잠식되어 떨리던 엘리의 손이 더이상 떨리지 않은 극복을 보겠죠. 작성자분께선 '모호함'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누군가에겐 그 모호한 단서들에게서 세련미를 느끼기도 한다고 보거든여. 아무튼 재밌는 리뷰 잘 봤습니다. 간만에 작성자분의 주관이 있는 좋은 비평 봤네요 감사합니다
(IP보기클릭)117.111.***.***
제 생각에는 마지막의 엘리는 애비를 용서한것이 아닌 조엘을 용서한것이고, 복수를 포기한것이 아니고, 그 방향으로 나아간 것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기자님의 글이라고 올려주신 부분에서 참 많은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태도?가 있는데요, 바로 게임이란것을 정의하려는 태도인것 같습니다, 게이머가 아닌 관객이라고요? 마치 게임은 정해진 한가지 양태를 띄어야하는것 처럼 말합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네요, 일단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 그다음은 최선을 다 해본 뒤 생각할 것.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런 게 아닐까.” 닐드럭만을 포함한 제작진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라고 봅니다.
(IP보기클릭)99.247.***.***
라오어2 의 내러티브 구조는 의도한거고, 그게 스튜디오의 고집이라고 봄. 개인적으로는 재밌게했고, 게임을 둘러싼 비난은 대부분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논란을 불러온게 스튜디오의 신념에 기반한다고 생각함.
(IP보기클릭)118.130.***.***
(IP보기클릭)106.101.***.***
전 솔직히 같은 인물과 사건을 두고 다양한 해석과 관점이 존재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작품의 가치를 높게 치고 싶습니다. 단편적인 예로 누군가는 마지막 들판에서 손가락을 잃은 엘리의 상실을 보겠지만 누군가는 비탄과 분노에 잠식되어 떨리던 엘리의 손이 더이상 떨리지 않은 극복을 보겠죠. 작성자분께선 '모호함'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누군가에겐 그 모호한 단서들에게서 세련미를 느끼기도 한다고 보거든여. 아무튼 재밌는 리뷰 잘 봤습니다. 간만에 작성자분의 주관이 있는 좋은 비평 봤네요 감사합니다
(IP보기클릭)99.247.***.***
라오어2 의 내러티브 구조는 의도한거고, 그게 스튜디오의 고집이라고 봄. 개인적으로는 재밌게했고, 게임을 둘러싼 비난은 대부분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논란을 불러온게 스튜디오의 신념에 기반한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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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는 마지막의 엘리는 애비를 용서한것이 아닌 조엘을 용서한것이고, 복수를 포기한것이 아니고, 그 방향으로 나아간 것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기자님의 글이라고 올려주신 부분에서 참 많은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태도?가 있는데요, 바로 게임이란것을 정의하려는 태도인것 같습니다, 게이머가 아닌 관객이라고요? 마치 게임은 정해진 한가지 양태를 띄어야하는것 처럼 말합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네요, 일단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 그다음은 최선을 다 해본 뒤 생각할 것.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런 게 아닐까.” 닐드럭만을 포함한 제작진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라고 봅니다.
(IP보기클릭)115.22.***.***
어떤 영화감독이 그랬던가요 모든 감정을 말로 풀어버리면 진부해지고 시시해져버린다고..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표정이나 제스쳐를 볼 수 없으니 감춰진 감정을 유추하는데 한계가 있어 감정묘사도 흔히 심도있게 서술되죠. 영상과 텍스트의 영역은 최소한 그렇게 구분이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오어가 그런면에서 비언어적인 감정 표현이 많은 작품이고 때문에 한번의 정주행으로 모든 내러티브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게임이라는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번 엔딩을 보신 분들과 다회차를 플레이한 분들의 소감도 꽤 다른듯 하구요. 지난 2년간 많은 소감들을 봐왔는데 부정적인 의견들중 공통되는 것들이 말씀대로 게임의 동기와 보상에 대한 부분, 즉 조엘의 죽음과 복수에 대한 것에 촛점이 맞춰져서 그런게 아닐까 싶더군요. 파트2에서 제작자들이 가장 공을 들이고 심도있게 표현한 부분이 엘리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엘리는 조엘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난 후에 우울감을 비롯해서 몸을 떤다던지 악몽을 꾸거나 플래시백을 경험하는 등 전형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게 됩니다. PTSD를 잘 알지 못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플레이어들은 당연히 엘리의 감정을 온전히 공감하긴 어려울테죠. 시간이 지날수록 PTSD는 높은 확률로 자책의 감정으로 변하고 엘리 역시 농장에서 엘리에게 구해달라는 조엘의 플래시백은 엘리 스스로가 조엘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걸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고 봅니다. 그 이후 농장에서 디나와 JJ를 뒤로한채 다시 애비를 찾아 떠나는 모습은 더 이상 복수가 목적이 아닌 집착에 가깝죠. 닐 드럭만도 그 장면에 대해서 그렇게 코멘트를 했었구요. 때문에 죽음의 문턱까지 간 애비를 놓아주기 직전 기타를 든 조엘이 온화한 미소로 엘리를 응시하는 장면은 애비에 대한 용서나 복수의 포기가 아닌 엘리 자신에 대한 용서와 해방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