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저자의 구상: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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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전이나 멸망 후나 바뀌지 않는 인생의, 혹은 바이오로이드생의 철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은 바라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레프리콘 213번은 슬쩍 토굴 너머를 엿보았다. 쫒아오던 칙 놈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철충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다. 정반대다. 놈들은 인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영리한 놈들이다. 어딘가에 매복해서 그녀들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환장하겠군”
레프리콘은 혼잣말을 하며 토굴 바닥에 주저앉았다. 섣불리 나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여기서 천년만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으니, 진퇴양난이다.
“죄...죄...죄송해요”
레프리콘의 혼잣말을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들은건지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던 포티아가 울먹었다. 레프리콘은 고개를 흔들면서 키친메이드의 등을 토닥였다.
“포티아 씨 보고 한 말 아니니까 쫄지 마요”
“뭐 틀린 말은 아니잖슴까”
뒤에서 브라우니 418번이 작게 툴툴대자 레프리콘은 눈치 좀 챙기라고 뒤를 돌아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 놈의 418번은 상병이 되어도 눈치가 없다. 오히려 상병쯤 되니까 이젠 분대장이 뭐라 해도 쉽게 물러나지 않는 게 더 골치아프다. 이번에도 그녀는 가만히 좀 있으라는 레프리콘의 시선에 쉽사리 승복하지 않았다.
“그렇잖슴까. 그 가까이 있는 것도 못 맞추고. 그거 맞췄으면 이런 상황까진 안 왔슴다”
브라우니 418번을 위해 변호해주자면 그녀가 항상 이렇게 까칠하고 퉁명스러운 건 아니다. 그녀들은 대체로 바보스러울 정도로 명랑한 게 보통이다. 그러나 또한 그녀가 말한 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브라우니 말마따나 원래 여기까지 올 상황은 아니었다. 이렇게 심각해질 상황도 아니었고 말이다.
...
두어 시간 전, 레프리콘 213번과 브라우니 418번, 그리고 포티아 82번으로 구성된 탐색조는 자원 탐색의 임무를 받고 출동했다. 으레 있는, 흔하디 흔한 자원탐색 임무였고 레프리콘과 브라우니에게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귀찮았을 뿐.
그러나 포티아는 약간 달랐는데, 그녀는 오르카 바깥 구경을 하는 게 몇 개월만이었다. 그래서 인솔역을 맡은 레프리콘은 약간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라우니야 바보같긴 해도 하던 일은 잘 수행하는 녀석이니 그렇다 쳐도, 오르카 바깥의 공기를 마셔본 적 자체가 오래 전 일인 포티아는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았던 것이다. 실제로 그랬고 말이다.
“저기, 포티아씨, 발 아래 돌부리 있...”
“네? 네? 꺄악!”
하, 하고 레프리콘은 이마를 감싸쥐었다. 포티아가 브라우니보다 멍청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말도 안되는 모함이요 소완부터가 오르카 주방의 명예에 먹칠하지 말라고 화내겠지만, 언제나 매끈한 인공물의 금속제 바닥에만 익숙해 있던 포티아는 폐허와 야생의 굴곡진 땅을 걷는 데도 실수를 해댔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서야.
“죄...죄송해요, 제가, 그, 모자라서...”
단순히 지형이 익숙하지 않은 건 시간이 좀 지나면 해결될 문제다. 진짜 문제는 이 포티아가 지나치게 허둥대고 또 의기소침해 있다는 것이다. 간만에 오르카 바깥의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되어 싱글벙글해하는 브라우니와 달리, 포티아는 이런 야외 임무 - 잘못하면 철충을 조우해 전투를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 가 전혀 즐겁지 않아 보였다.
“긴장 풀어요. 별 일 없을 겁니다. 우리가 이런 일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작은 실수에도 오들오들 떨며 무슨 일 터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포티아를 보니 레프리콘 자신이 불편했다. 그렇게까지 긴장할 일은 아닌데도 말이다. 레프리콘은 한숨을 쉬고선 뒤에서 수레를 밀고 있는 브라우니를 가리켰다.
“걱정 마십쇼. 이미 수거할 만한 자재는 다 실었어요.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도...도움이 못되어드려서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불안해하실 거 없어요.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날려구요”
....말이 씨가 된다고, ‘무슨 일’이 일어났다.
복귀 중에 그녀들은 기습을 당했다. 칙들이 그녀들이 돌아가는 길에 매복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 측면의 바위틈에서 붉은 불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총탄이 날아들었다. 두 스틸라인 병사들은 투덜대며 머리를 감싸쥐고 신속하게 산개했다. ‘아 이제 돌아가면 씻고 개인정비 시간 받아서 잘 수 있다’던 기대에 부푼 기분이 한없이 나락으로 처박혔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몸은 오랜 훈련과 실전으로 체득된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그녀들은 스틸라인, 태생부터 전투요원이었다. 이런 일을 겪는 건 익숙했다. 철충놈들이랑 총탄 교환하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뭐.
“아-! 포티아! 지금 뭐 함까!”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조차 태생이 비전투 요원에 전투에 나서 본 적도 얼마 없는 포티아는 얼을 탔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총탄 사이에서 머리를 감싸쥐고 덜덜 떨면서 옴짝달싹 못하는 그녀를 보자 레프리콘은 암이 걸릴 것 같았다.
“미쳤어요? 죽고 싶어요?”
레프리콘은 이를 악물었다. 포티아를 구하려다 잘못하면 죽겠지만,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그녀는 쏟아지는 탄환을 피해 포복 자세로 기어가 황급히 제대로 움직이도 못하는 포티아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녀를 질질 끌어 바위 뒤로 데려갔다.
“쫌 제발! 이런 때까지 얼타지좀 마요! 다 죽어요!”
‘죽는다’는 소리가 나오자 포티아가 움찔했다. 조금 전 그녀를 안심시키려던 레프리콘과는 확연히 다른 화난 태도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은 잘못하면 진짜로 죽으니까.
그러나 그런 포티아까지 신경써줄 상황이 아니었기에 레프리콘은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불빛들의 숫자를 가늠해 보았다.
‘둘...셋...십여 기쯤 되겠군’
탐색조의 세 배는 되는 숫자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은 숙련된 전투원이었고 실제로 숫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어렵잖게 대응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방금 칙 하나를 벌집으로 만들어놓은 브라우니는 신나기까지 해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브라우니는 바보지만 싸울 줄은 알고 잘 하는 것도 그거고 사실은 할 줄 아는 것도 그거뿐이니까.
“빵! 하하! 또 하나 잡았다!”
“418! 총알 아껴요! 고개 숙이고! 흥분 쫌 하지 말고 쫌!”
머리에 피가 쏠려서 신나게 총질하는 그녀들을 말리는 게 분대장인 레프리콘이 할 일이고.
‘하지만...숫적으로 너무 밀려’
이대로면 숫적 우위 앞에 압도당할 것이다. 하지만 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레프리콘은 아직도 자기 옆에서 겁먹은 채 부들부들 떨고 이는 포티아를 바라보았다. 전투를 맞닥뜨리자 오히려 신이 난 브라우니와는 정반대로, 그녀는 지금 상황이 굉장히, 아주 싫은 것 같았다.
“포티아씨, 제 말 잘 들어요”
“네...네...네?”
당황해서 더듬거리는 그녀가 불안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은 그녀를 믿어야 했다. 레프리콘은 제발 포티아가 침착해져주길 바라며 그녀의 어깨를 턱 짚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동작에서조차 힉, 하고 겁먹는 그녀를 보아 희망적이지 않았지만...
“저랑 418이 엄호하겠습니다. 놈들이 몰려오는 저 좁은 길목 보이시죠? 저기다 한 번 뜨겁게 쏴갈겨주세요.”
그녀는 포티아의 과충전이 되게 개조된 건틀릿을 톡톡 건드려 보였다. 이거 한 방 제대로 들어가면 저 개1자식들에게 화끈한 불지옥을 선사할 수 있다. 놈들을 구워버리고, 남은 놈들을 그녀와 브라우니가 소탕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깔끔하게 모든 일이 종료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일이 좀 더럽게 돌아갈 터다.
“저...전...이런 거....하, 한 번도.....”
그러니까 지금 포티아의 저 건틀릿에 모든 것이 걸려있는 거다. 일을 모두에게 행복하게(철충놈들만 빼고) 종결지을 것이냐, 더럽게 꼬이게 만들 것이냐. 레프리콘은 양손으로 포티아의 뺨을 탁탁 치고 감싸쥐었다.
“정신 차려요! 당신이 일 제대로 못해주면 우리 다 죽어요! 할 수 있죠?”
전쟁이란 참으로 얄궂은 것이다. 단 한 순간의 실수 혹은 행동으로 그 다음 모든 것이 결정되곤 한다. 그리고 레프리콘은, 겁먹은 채 타성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포티아가 미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그녀는 브라우니에게 소리쳤다.
“418! 포티아씨 갑니다! 엄호해요!”
“하하, 아알게씀다! 니네들 오늘 다아 치킨 프라이다!”
“자, 가요, 포티아씨! 어서!”
아직도 무서워 비틀거리는 포티아의 등을 밀며 레프리콘은 경기관총에 불을 댕겼다. 성공만 한다면 모두 무사히 살아서 오르카에서 치킨을 뜯을 수 있을 거다.
....성공만 했다면 말이다.
<계속: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3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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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몇 개월 전에 "닭계꿩치"님이 소설 아이디어를 주신 게 있었는데 그걸 이제야 써 보네요(출처: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8100 )
등장하는 레프리콘과 브라우니는 언제나 제 소설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구덩이 이야기(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903)'의 그녀들입니다.
내일이나 모레 쯤 중편을 쓰고 그 다음날쯤에 하편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문해주신 분의 아이디어에 맞춰 쓰고자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만, 캐붕, 설정붕괴, 혹은 원래 아이디어와 안 맞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저의 불찰입니다.
그럼, 재미있게 읽어주시길. 덧글과 추천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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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디 천한 말단 B급들은 으레히 저 낮은 땅구덩이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굴러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에헴 | 20.12.31 17:3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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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스카이나이츠 시리즈도 계속 쓸겁니다 ㅎㅎ | 20.12.31 19: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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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상 418이 상병 -브- 니깐 좀 대들 짬이 되긴했죠 ㅎㅎ | 20.12.31 19:53 | |
삭제된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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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추종자
이게 다 저 두 스틸라인 병사들 탓입니다. 레프리콘 213은 불운(13)이 연속(2)으로 오는 애입니다(하지만, 21을 3으로 나누면 행운의 숫자 7이 나오듯, 그 와중에 행운이 숨어 있기도 하죠) 브라우니 418은 죽음의 숫자 4+아이 씻팔!하는 18이 들어 있죠. 사, 십팔이라고 읽으면 아이샤48의 그 48과도 맞닿고요. 하지만 늘 해맑은 만메발 48처럼(그리고 브라우니의 천성대로) 얘도 생각없이 밝습니다. | 21.01.01 21:5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