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소설의 영광은 제껍니다. 하하!
원저자의 구상: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8100
전편: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8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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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진짜 이해 못 하겠슴다. 어떻게 그 거리에서 그걸 못 맞춤까?”
간신히 찾아내 황급히 몸을 숨긴 토굴 안에서 브라우니가 으르렁대자 포티아는 다시 힉, 하고 고개를 움츠렸다. 레프리콘은 뭐라 말하기도 지쳐서 그냥 머리를 감싸쥐고 쭈그렸다.
계획은 완벽했다. 그러나 계획은 언제나 망쳐지는 게 세상의 법칙인 법. 누구나 잘 짜인 계획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겁먹은 포티아가, 기껏 철충 코앞까지 다가가는 데 성공한 포티아가, 귓가를 스치는 총탄과 철충의 흉악한 몸짓에 겁먹어 불을 잘못 댕긴 순간, 그 계획은 다 어그러졌다.
포티아의 건틀릿 화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왼손에서 타오른 불꽃은 너무 강렬해서 두 스틸라인 병사는 눈도 못 뜰 정도였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포티아의 화염에 직격당한 바위를 녹여버릴 정도였으니까. 철충들이 그걸 맞았다면 아마 꽤 보기 좋은(물론 스틸라인 병사들 입장에서) 뜨거운 곤죽이 되었을 터다. 문제는 그걸 철충 무리에 못 맞췄다는 거다.
화르륵! (그리고 "꺄악!" 하는 포티아의 앳된 비명과 함께)하고 분출된 화염은, 철충에게 겁을 먹을 대로 먹은 포티아가 팔을 엉뚱한 데로 돌리는 바람에 철충을 빗겨갔다. 작렬하는 불의 구체는 철층을 지나가 놈들 뒤의 나무를 태웠고...곧이어 주변의 수목들을 태우며 불타 올랐다.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가렸지만 그게 철충들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좌절감에 빠진 세 바이오로이드들이 철충을 피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었을 뿐. 그러나 나무 몇 개 태운 연기가 그녀들을 오래 숨겨주진 못했고 따라서 그녀들은 멀리 가지 못했다. 그나마 잠시 몸을 숨길 자그마한 토굴(土窟)을 찾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아아, 축하드림다. 작은 산불 하나 일으키셨슴다. 엘븐들이 정-말 좋아할 검다”
418의 말빨에 한껏 물이 올랐다. 레프리콘은 브라우니들은 빡치면 지능이 올라가나? 는 시답잖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러 포티아 들으라고 작게 박수까지 탁탁 치는 거 보면 비꼬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다. 화가 나도 아주 제대로 난 모양이긴 한데, 브라우니가 저 정도로 비꼴 수 있는 지능이 있었다니.
“그래도 포티아씨에겐 감사함다”
갑자기 브라우니가 말을 바꾸자 포티아가 고개를 들었다.
“저..저요?”
“그거 팔 잘못 돌려서 우릴 향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님까? 제가 원한 건 칙 프라이였지 스틸라인 프라이가 아니었슴다. 아, 아니다. 그거 맞았으면 프라이가 아니라 스틸라인 잿가루가 됐겠슴다.”
....진짜로 브라우니들은 화가 나면 지능이 상승하나 보다. 시간차로 들어오는 정교한 빈정거림에, 레프리콘은 저 둘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기 이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비아냥에 포티아도 항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의 항변은 자그마한 웅얼거림으로밖에 나오지 못했다.
“저...저는...”
“네? 좀 크게 말해보시지 말임다. 이젠 말도 제대로 못 하심까?”
브라우니가 눈을 부라렸다. 레프리콘은 418번은 아마 부대 내에서 한 갈굼 하는 선임이 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곤 속으로 한숨지었다.
“저는...저는 전투용이 아니에요....”
“뭔 소림까. 그럼 팔에 그 건틀릿은 장식임까?”
포티아는 자신의 건틀릿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도 이렇게 개조되고 싶어서 개조된 게 아니었다.
“이건 원래 요리용이에요. 전...전 키친 메이드라구요”
“아하이고. 세상 무슨 요리가 바위도 녹일 불을 뿜슴까? 뭐, 돌덩이라도 구워드실 검까?”
“......”
“좀 정신 차리십쇼. 우린 저항군임다. 누구라도 철충과 싸워야 함다. 당신 그 건틀릿도 개조된 거 아님까. 싸우라고.”
“저는...싸우고 싶지 않아요.”
이제껏 야유하는 정도에 그쳤던 브라우니의 눈에 확하고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싸우기 싫다고 작게 웅얼대는 포티아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힉!?”
“418! 그만둬요!”
“다시 말해보십쇼”
“네...네?”
“다시 말해보라고 했슴다. 뭐라 그랬슴까?”
“싸, 싸우기 싫다고...꺄악!”
브라우니는 잡아올린 포티아를 그대로 토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레프리콘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418! 진짜 멈춰요! 명령입니다!”
분대장이 명령하자 부하인 브라우니는 멈칫했다. 상급 명령권자의 명령을 거부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불타는 눈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주먹을 말아쥐고 뚜둑, 하고 손가락을 꺾었다.
“이유를 말해보십쇼. 대답 여하에 따라 제 주먹이 좀 바쁠 수도 있으니.”
“브라우니 씨는 싸우는 게 재밌나요?”
뿌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저만치서 황망하게 둘을 바라보는 레프리콘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누굴 전쟁광으로 아심까? 저는 피에 굶주린 학살자도 전범도 아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싸우나요? 왜...제게 전쟁을, 불길과 잿더미를...강요하세요...“
거의 우는 소리였으나 메시지는 또렷했다.
“전쟁에 나가고 싶지 않아요. 저는 키친메이드로 만들어졌어요, 어쩌다보니 살상병기가 되있지만....싸우고 싶지 않다구요!”
그 ‘어쩌다보니’라는 한 단어에 담긴 기나긴 사연도 기구할 것이다. 그러나 브라우니는 사납게 내뱉었다.
“씨1발, 저라고 전쟁이 마냥 행복한 줄 아심까?”
그녀는 팔을 휘저었다.
“한 번 전투할 때마다 떼거지로 죽어나가는 게 제 자매들임다! 브라우님다! 도대체 사망률이 몇이나 되는진 저도 모르지만,”
사망률이란 단어까지 알다니, 이 와중에도 레프리콘은 분대원의 지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다만, 첨언하자면, 브라우니의 궁금증에 레프리콘은 잠시 답해주고 싶어졌다. 사령관이 온 후에 하늘을 치솟던 브라우니의 사망률은 사라졌다. 예전 같았으면 죽어 넘어졌을 브라우니들이 중상 선에서 살아남는 바람에 중파자가 엄청나게 급증하여 수복실 다프네가 대신 죽게 생겼지만, 어쨌든 죽는 것보다는 고통스럽게 사는 편이 더 낫다. 그러고보니 잘못하면 우리가 사령관님 온 이후 오르카 첫 사망자로 기록되게 생겼군. 레프리콘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래도 싸워야 함다! 그게 브라우니니까! 그게! 우리가 만들어진 목적이고 임무니까!”
브라우니들은, 아니 어쩌면 스틸라인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그녀들은 싸우라고 만들어져 있고 또 자기가 맡게 된 의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인다. 명예롭게 여긴다. 같은 스틸라인으로서 레프리콘은 그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포티아는 다르다.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는 본래 키친 메이드다. 가지고 있는 장비가 개조되었다고 해도 그녀가 살상이나 전쟁을 극도로 꺼리고 피하려 하는 것도 당연하다. 피를 무서워하는 어린아이에게 최신형 기관총을 들려준다고 그 아이가 광전사가 되는 건 아니니까. 그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하던 간에, 그녀에게 있어 전쟁은 폭력이다. 둘을 말려야 할 레프리콘은 거기서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솔직히 그것도 맞는 말이니까.
그러면, 남에게 폭력을 강요할 권리가 그녀들에게 있는가?
레프리콘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스틸라인의 법도를 키친 메이드에게 강요해도 되는 것인가? 그래서 그녀는 그만, 브라우니와 포티아 사이의 균열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음, 몇 개월 전에 지하 대피소에서 이 비슷한 꼴에 처해봤던 거 같은데.
“그러면 여기서 대신 해주실 수 있는 게 뭠까? 진흙으로 만든 계란 프라이?”
“그만둬요 418! 진짜 화낼 거에요!”
전장에서, 임박한 전투를 앞두고 내분이 일어나는 것만큼 한심하고 멍청한 바보짓도 없다. 레프리콘이 정말로 정색하며 한소리하자 브라우니는 칫, 하고 삿대질하려던 손가락을 거두었다. 하지만 어쨌든 브라우니의 적대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으므로 포티아는 울먹이지 않을 수 없었다. 레프리콘은 그런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지만, 포티아 씨.”
레프리콘은 포티아를 토닥이며, 그러나 그러면서도 일부러 약간 냉랭한 투로 말했다.
“418번이 한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닙니다.”
포티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동정심이 솟구쳐올랐지만 레프리콘은 애써 무시하며 할 말을 했다.
“두 가지를 얘기해야겠군요. 첫째, 지금은 싸우기 싫다는 투정을 받아 줄 수가 없군요. 싸우지 않으면 우린 죽을 겁니다. 아마 높은 확률로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무한한 투쟁의 반복이라는 멸망전 어느 철학자의 전쟁광스러운 어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무튼 저 바깥에 그녀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괴물딱지들이 돌아다니는 건 사실이니깐.
“둘째, 저항군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바이오로이드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죠. 그리고 지금, 지구상 유일한 인간은 오르카에 있지요.”
그리고 그녀는 포티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사령관님을 지키는 게 우리 임무입니다. 그게 바이오로이드의 존재 이유잖아요”
저항군의 가장 미력한 말단 레프리콘조차 자신의 노력이 지구상 최후의 인간을 지키는 데 나름대로 기여한다는 점을 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기여일지라도, 그 작은 기여가 사령관을 지킨다. 그리고 그것이 바이오로이드들을 움직이게 한다. 인간을 지키는 것. 바이오로이드들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
그러나 포티아는 고개를 숙였다. 물론 포티아도 오르카의 인간님을 안다. 당연하다. 오르카 포티아들의 주인님이니까. 주방에 오신 걸 직접 보기도 했었으니. 늘 냉정하고 매섭던 소완이 사령관님이 온다니까 눈에 띄게 부산스러웠더랬다. 사령관님 오시기 전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그녀 포함 주방 식구들을 닦달했더랬다. 평소에 자기들 대할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그 나긋나긋한 태도하며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에 포티아는 그만 헛웃음이 나올 뻔했더랬다. 하지만...그 날 오르카의 주방을 방문한 포티아의 주인님에게 그녀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더랬다. 그 표독스런 주방장이 사랑에 빠질 만했다. 그 날, 그분은 포티아 하나하나를 챙겨 주시고 따뜻하게 대해주셨으니까.
‘주인님...’
포티아가 스스로 공언하였듯 그녀는 키친 메이드다. 메이드로서 그녀는 자신의 주인에게 헌신하려는 의지는 굉장히 강하게 만들어져 있다. 스틸라인이 싸우도록 만들어져 있듯이, 포티아는 성실하고 또한 헌신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한다. 그건 위기에 처한 옆의 스틸라인 병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도...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 그러고 싶은데....’
비록 소심하고 겁은 많지만. 문제는 옆에서 계란프라이를 만드는 정도로는, 지금의 레프리콘과 브라우니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는 생각에 그녀는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나는, 주인님은커녕 옆의 동료들도 못 지키는구나’
우울해져서 말없이 웅크린 포티아를 달래는 레프리콘에게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언제나 세상일은 그녀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녀 번호가 213인 것에 대해 이뱀이 놀린 적이 있었지. 2번 불운(13은 불길한 숫자다)이 오는 녀석이라고.
“저기...병장님”
“왜요, 418”
“놈들...이리로 오고 있슴다”
레프리콘은 머리를 짚었다. 아무래도 둘 간에 벌어졌던 다툼이 소음이 심했던 모양이다.
“하아...들킨 거 같군요”
그녀는 포티아에게 손짓했다. 어차피 싸울 수 없는 전력이라면 처음부터 방해나 안 되게 뒤로 빼는 게 낫다.
....그리고, 어쩌면 뒤에서 숨어있으면 그녀만이라도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418, 준비해요. 신호에 맞춰 사격합니다”
레프리콘은 입술을 다셨다. 탄약이 충분할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데....놈들이 다가온다.
“418, 조준....”
포티아의 말은 맞다. 레프리콘도 물론 파괴와 죽음이 두렵다. 전쟁이 두렵다. 죽음이 귓가에서 어두운 운명을 속삭일 때, 그것이 두렵지 않을 산 자가 그 어디 있으랴.
그러나 그 앞에서 꽁지 빼고 달아날 수는 없다. 그녀는 누군가를 책임져야 할 분대장이니까. 비록 작고 미력한, 일개 보병 바이오로이드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분대원을, 그리고, 나아가, 인간, 사령관을 지켜야 하니까. 그것이, 바이오로이드니까.
“지금입니다! 쏴요!”
“뒤져라 이 치킨새1끼들아!”
요란한 브라우니의 고함과 함께 그보다 더 시끄러운 총성이 공기를 갈랐다. 수색을 위해 선두에 섰던 칙이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그러나 그 뒤로, 이 안에 그녀들이 숨어있음을 확인한 칙들이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왔다. 놈들의 사격에 그녀들은 바위 뒤로 엄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틈을 타 놈들이 달려왔다.
“이 시1발! 오지 마!”
어차피 다음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므로 레프리콘까지 호탕하게 욕을 내뱉으며 총을 쏴댔다.
두 바이오로이드가 요란하게 싸워대는 사이 포티아는 토굴 뒤편에 숨어 웅크린 채 벌벌 떨었다. 총성만 들어도 눈에서 눈물이 솟았다.
“미안해요...미안해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두 병사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서. 그녀는 한 손으로 패닉에 빠지기 직전인 심장을 부여잡고 심호흡했다. 도와야 하는데. 나도 내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 하겠다. 레프리콘은 그런 그녀를 이해해 준 것 같았지만, 그에 만족해서 여기서 이대로 멈춰만 있을 것인가. 두 손 놓고 저들을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사령관을...지키지 않을 것인가.
갑자기 총성이 멎었다. 포티아는 살짝 고개를 들어 보았다. 지친 두 병사가 바위 뒤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끄...끝났나요...?”
“일단 1파는 저지했습니다. 놈들, 제파식 전술을 쓸 모양입니다. 젠장.”
제파식 전술이 뭔지 포티아는 알지 못했지만, 레프리콘의 복잡한 표정에서 그게 꼭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놈들은 좁은 곳에서 농성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의 탄약을 효율적으로 소모시키고, 자기들끼리 부딪히는 병목현상을 막기 위해 파상공격(波狀攻擊)을 감행하고 있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상대방을 지치게 하는 효율적인 전법이다. 그리고 죽어도 자신의 의식을 업로드할 수 있는 철충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나마 그녀들에게 숨 돌릴 시간이 주어졌다는 점만이 위안이었다.
“하하, 제엔장. 요번에 한다는 아이돌인지 뭔지 콘서트 가야 되는데”
“418, 그거 전국노래자랑 같은 거 아니에요.”
“떼창은 할 수 있지 않겠슴까. 이미 티켓팅 사전예약 했지 말임다. 그거 참치가 얼만데.”
초연하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둘을 바라보자니 포티아는 슬퍼졌다. 만약 저 둘이 오르카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건 누구 탓인가? 기습해 온 철충 탓? 그녀들을 도와주지 못한, 무능 딱지가 붙은 키친 메이드 탓? 어느 쪽이건 저 두 병사가 살아남지 못한다는 결과는 같다. 포티아에게 원죄를 돌리든 아니든 그녀는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살아있는 두 병사는 다시 바깥을 내다보곤 한숨을 토했다. 그리고 총을 장전했다.
“다시 오는군요, 하, 총알 얼마 안 남았는데”
“흑흑, 병장님, 사령관님이랑 자보고 싶었슴다”
“개소리 하지 마요. 이제 겨우 마리 대장님 선인데...옵니다!”
다시 한번 요란한 사격음이 사방을 울렸다. 포티아는 귀를 막고 웅크렸다. 그리고 되뇌었다.
“제발, 제발 제게 힘을 주세요.”
누구든 좋았다. 누구라도, 누구라도 그녀에게 일어설 힘을 줄 수 있다면....포티아는 주인님, 오르카의 사령관을 생각했다. 자신 같은 말단 키친 메이드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던 그분을. 자신 같이 겁 많고 나약하고 소심한 이에게도 웃어 주던 그분을. 주인님은 지금 여기 없지만,,,포티아는 사령관의, 가끔은 생각 없어 보일 정도로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을 생각했다. 그 얼굴이 내게 힘을 주길. 그 얼굴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길. 봉사할 인간이 없다면 키친 메이드 바이오로이드는 누구를 위해 살아가야 할까? 그녀는 울상이 되어 일그러진 얼굴로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을 죽이려 괴물들이 달려오는 저 바깥을.
“아씨, 저새1끼들 저거 끝도 없네! 뭔 칙들만 끝없이 나옴까!”
그 때, 포티아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브라우니 말마따나 달려오는 다종다양한 칙들 중, 개중에서도 유난히 특이하게 - 좀 더 역겨운 쪽으로 특이하게 - 생긴 놈. 뱃속에 뭔가 냄새나는 것을 잔뜩 채우고 있을 것 같이 생긴 녀석.
케미컬 칙이 다른 칙들 뒤에서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었다. 케미컬 칙 종류 중에서도 유독 흉물스럽게 생긴 거로 봐서 X형인 것 같았다. 뱃속에 가득찬 인화성 물질 때문에 다른 녀석들보다 뒤처진 모양이다. 그리고, 포티아는 저놈이 왜 이리로 오는지 알 것 같았다. 모름지기 좁고 폐쇄된 곳에 고립된 적을 소탕하는 데는 화염방사기나 화생방 무기 같은 것이 제격이다. 멸망 후라 제네바 협약 같은 것도 없고 말이다. 뭐, 철충놈들이 인간들(어차피 지금은 다 죽고 있지도 않지만)의 군사협약을 지킬 의무도 없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놈은 이 토굴 안에다 역한 부식탄 세례를 쏟아부을 작정인 것이다. 좁은 곳에 갇혀 농성하는 적을 고통에 절어 녹아죽게 만드는 데는 참 좋은 방법이다. 천재적인 발상이다. 악마적이기도 하고.
놈을 불태울 불만 없다면 말이다.
포티아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면 모두 다 죽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녀에게는 불이 있다. 그녀는 일어섰다. 머릿속으로 한 수천 번 정도는 주인님을 불러 가면서.
‘주인님, 주인님, 제게 힘을 주세요’
다리가 파들거린다. 핑 하고 정수리 위를 스치는, 칙의 총알에 금방이라도 다리가 플려 주저앉을 것 같다. 앞으로 걸어가는 것조차 두렵고 무서워 천릿길 같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그녀는 군용 메이드가 아니다. 키친 메이드다.
메이드로서, 그녀는 남을 돕고 싶어한다. 곤란에 빠진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한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메이드로서, 그녀도 주인님을 지키고 싶어한다. 어엿하게, 헌신적으로.
그러면 지금, 여기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를 악다문 포티아가 덜덜덜 떨리는 턱을 겨우 열었다.
“다들, 비, 비, 비켜요!”
뭐야, 하고 뒤를 돌아보는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의 얼굴이 당혹으로 몰들었다. 화롯가의 포티아가, 주체할 수 없을 만치 와들와들와들와들 떨면서도, 그녀의 건틀렛의 점화기를 올리고 있었다.
“포티아씨? 여긴 왜 왔슴까?”
“포티아씨! 위험해요! 물러나요!”
“무...무...물러나야 할 건 여러분이에요! 빨리 비켜요!!”
레프리콘의 얼굴에 이 여자가 죽을 때가 되니 드디어 돌았나, 란 표정이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보는 건 유감이었으나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간신히 바위를 엄폐물 삼아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데 거기서 물러나라고 말하는 건 죽으라는 것과 이음동의어일 터다.
“미쳤어요, 포티아씨? 진짜 여기서 다 죽을 셈입니까?”
더 이상 말할 시간이 - 그리고 사실은 계속 말싸움할 만한 깡도 - 없었기에 포티아는 말없이 건틀릿의 출력을 올렸다. 포티아 앞에 선 두 병사가 흘긋 뒤돌아보기만 해도 그 우악스럽게 큰 건틀릿이 심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물며 그걸 직접 착용한 포티아가 느끼는 건 진동이 아니라 거의 지진 수준이었다.
푸쉬-익, 증기를 뿜으며 가스밸브가 요동친다.
타탁거리며 점화기가 으르렁댄다.
삐걱거리며 유압 피스톤이 미친 듯이 용트림한다.
끼긱, 푸쉭, 칙, 기기기기긱-!
그리고 그 모든, 폭주하는 기계부속들의, 분노에 찬 듯한 진동은, 과출력을 내도록 개조된 기계장치들의 미치광이같은 울부짖음은, 그녀의 건틀릿 손바닥의 한 점에 집중되었다. 건틀릿이 최대 출력에 다달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건틀릿은 자신이 한계 화력에 다달았음을 타이런트 같은 울부짖음으로 알렸다.
포티아는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두 번의 실수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주인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나 모두에게 다정하신 분. 그분께 도움이 되고 싶었다. 오늘, 이 둘을 살려내지 못한다면,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주인님께서는 슬퍼하시리라.
‘이번엔, 이번엔 실수하면 안 돼요’
이 미친 괴물을 팔을 낀 포티아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팔에 달린 이 날뛰고 싶어 안달하는, 불이라는 괴수를 풀어줄 때가 왔음을.
그리고 그 순간, 레프리콘도 깨달았다. 지금은 비켜줘야 할 때임을. 그녀는 브라우니에게 달려들어 아직도 상황파악 못한 그녀를 무턱대고 몸으로 덮어 내렸다.
다음 순간, 포티아는 점화기의 불을 댕겼다.
열기가 솟아올랐다.
아니, 열기란 말로는 그녀가 내뿜어 낸 무지막지한 불줄기를 형용하는데 부족하다. 마치 신화 속의 드래곤이 온 힘을 다해 내지른 숨결과도 같이, 작렬하는 열기의 폭풍이 자기에게 닿는 그 모든 것을 짜부라뜨리고 우그러뜨리며 나아갔다. 그건 그 경로상에 있는 철충들, 특히 그 불줄기에 똑바로 직격당한 케미컬 칙도 예외는 되지 못했다. 불길이 놈을 감쌌다. 그리고....
푸확
놈의 체내에 가득 저장되어 있던 인화성 액체가 열기에 반응했다. 열기에 취약한 놈의 몸은 불길을 이기지 못했고 잠시 비틀대는 듯 하더니 성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으지직, 소리와 하께 사방으로 매캐하고 역겨운 뜨거운 역청 덩어리와 불길이 튀어올랐다. 그리고 그 2차 폭발의, 대재앙의 물결, 아니 불결에 휩쓸리는 것은 주변에 있던 칙들이었다. 순식간에 토굴 앞은 아비규환의 불지옥이 되었다. 그 불길들 사이로 정신을 차린 스틸라인 병사들의 사격이 날아들었다.
“아하하하!! 꼴 좋다!! 이거나 먹어라!!”
열기로 녹아내리는 칙들의 장갑을 뚫고 연약한 금속성 맨살에 수없는 납탄두들이 사정없이 박혔다.
“우리 몇 개월 전에 어디 지하에서 이 비슷한 거 본 거 같슴다! 유우우우-쾌함다!”
“418, 혹시 방화광(Pyromaniac, 불을 지르거나 불타는 걸 보고 기뻐하는 이상성욕) 기질 있는 거 아니죠?”
칙들이 터져나간다. 타오르는 화염으로 인해, 혹은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의 맹렬한 반격으로 인해. 불타면서, 혹은 벌집이 되어가면서 칙들이 쓸려나갔다. 전세가 역전되어 신나 하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포티아는 주저앉았다. 치이이이익- 하고 모든 연료를 다 소모한 건틀릿이, 그러나 여전히 타오르는 화염의 여운을 잊지 못해 바위를 빨갛게 달굴 정도로 달아오른 건틀릿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하아, 하아...”
포티아는 숨을 몰아쉬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기운이 다 까라졌다. 미친 듯이 울부짖는 건틀릿을 간신히 제어하며 케미컬 칙을 정확히 조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건틀릿을 제어하는 것보다 그녀 안에 내재한 공포와 두려움을 제어하는 것이 더더욱 힘들고 피곤했다. 이렇게 진이 다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그래도 해냈어...’
그녀를 얼싸안으려 브라우니가 달려온다. 그 뒤에서 레프리콘이 미소짓는다. 자신감 없고 겁도 많지만, 오늘 포티아는 드디어 선을 넘었다. 공포라는 선을. 그녀도 레프리콘을 향해 미소지어 주려고 했다.
......그녀가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정도로 뜨거운 건틀릿을 끼고 있다는 것도 잊고 무턱대고 자신을 껴안으려 달려드는 바보 브라우니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계속: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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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핫하! 새해 라오게 첫 소설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이 소설은 몇 개월 전 "닭계꿩치"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작성되었습니다(출처: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8100)
1.
중간에 브라우니가 언급한 "요번에 한다는 아이돌 콘서트"는 말할 것도 없이 스카이나이츠의 아이돌 프로젝트를 의미합니다(참고: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80416). 제 스카이나이츠 소설에서 이 두 병사들이 스카이나이츠들과 같이 구보를 뛴 에피소드가 있는데(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81561), 이 브라우니는 바보라서 그 때 그 스카이나이츠가 이 아이돌이라는 걸 모른다는 설정입니다(같이 구보 뛴 건 그냥 공군인 그녀들이 헛바람 들어서 자기들 훈련 참관하러 왔던 걸로 알고 있고요)
한편, 또한 중간에 브라우니가 언급한 "몇 개월 전 어디 지하에서 이 비슷한 광경 본 것 같다"는 제 소설 '구덩이 이야기'의 이 부분을 의미합니다: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608.
위에서 레프리콘이 언급한 "몇 개월 전에 지하에서 이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다"역시 '구덩이 이야기'의 시작 부분을 의미합니다: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16
제 소설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저 레프리콘과 브라우니의 번호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번호랍니다.
항상 꾸준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여러분의 호응해 주시는 덧글과 추천은 정말 감사한 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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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을 드리겠읍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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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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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 둘이었더니 ㄷㄷ 번호는 미처 기억 못했는데 적들 도발하는 브라우니 대사가 그 친구가 맞나 보군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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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연구한 고증(?)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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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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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옵나이다^^/ | 21.01.01 03: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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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연구한 고증(?)이셨군요 | 21.01.01 11: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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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 둘이었더니 ㄷㄷ 번호는 미처 기억 못했는데 적들 도발하는 브라우니 대사가 그 친구가 맞나 보군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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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습니다 ㅎㅎㅎ | 21.01.01 11: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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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면 개조한 게 알렉산드라였죠. 자랑스러워할 만하겠군요. | 21.01.01 13:4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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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추종자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분이 계신다는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라요. | 21.01.01 21:5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