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
바이는 무의식적으로 완전한 전투 태세를 취했다. 그 증거로 뼛속까지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목 깊숙한 곳에서 저절로 새어나왔다. 꼬리의 독침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더 이상 바이의 시야에는 폭포도, 절벽의 절경도, 보금자리도, 번개도 없었다. 온 신경이 오직 쟝고에게만 집중되었다.
그런 변화는 새로 나타난 쟝고에게도 똑같이 일어났다. 쟝고는 번개 앞에서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세비퍼를 발견하자마자 정신을 잃어버릴 듯이 분노했다. 쟝고의 서슬 푸른 발톱이 세워지고 온몸의 털이 치솟았다. 몸은 자동적으로 낮은 자세를 취했다. 쟝고가 의식적으로 한 행동은 하나도 없었다.
세비퍼와 쟝고는 태곳적부터 그래왔던 것 같은 자세가 되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곳에 의지는 없었고, 오직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만이 존재했다.
쉬─
바이가 다시 쉭쉭거렸다. 듣는 이의 다리를 마비시키는 깊고 낮은 울림이 지표면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소리에 호응하듯,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아─!"
비명소리는 쟝고도, 번개도, 바이도 아닌 다른 이의 것이었다.
바이는 새로운, 그렇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비명소리의 주인공은 작은 니드런 두 마리였다. 니드런 두 마리는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나무 밑동에 나동그라져 서로를 붙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둘은 바이가 잘 아는 포켓몬이었다.
바이가 좋아하는 이웃 중에는 커다란 니드킹과 니드퀸 부부가 있다. 바이와 비슷하게도 니드킹 니드퀸 부부는 흉악한 외모와는 달리 매우 친절한 이웃이다. 특히 니드킹은 니드리노 시절 인간과 오래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것이 많아, 지혜롭고 싸움도 굉장히 잘해 이웃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다. 게다가 니드퀸을 세상에 둘도 없이 아끼는 애처가라서 폭포 주변 포켓몬들의 장난기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는 포켓몬이기도 했다.
비명을 지른 두 니드런은 니드킹 니드퀸 부부의 자식들이었다. 독 타입이기 때문인지 처음 바이를 봤을 때부터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잘 따랐던 아이들이다. 형제가 굉장히 활발해서 보모 노릇을 하는 바이를 자주 지치게 하는 꼬마들이기도 했다.
다소 짖궂긴 하지만 니드런 형제는 귀여운 이웃 꼬마들이었고, 그 사실은 바이가 이성을 찾게 했다.
"얘들아......?"
"으아악─!"
니드런 형제는 깜짝 놀라 도망가려는 듯 다리를 휘저었다. 하지만 반쯤 땅에 드러누워 있는 듯한 자세여서 도망은커녕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니드런 형제의 눈에 눈물 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떠는 니드런들에게는 끔찍한 상황이었겠지만,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바이는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성이 돌아오자 온갖 생각들이 둑이 터진 것처럼 밀려들어왔다. 아이들이 무서워하네? 이제 어떡하지? 저 뒹구는 모습 너무 귀여워. 귀여워서 울 것 같아. 내 평판은 이제 어떻게 될까? 이제 아무도 나를 찾지 않겠지? 빨리 일으켜줘야 돼. 아니, 저 귀여운 궁둥이를 조금만 더 보다가...... 어차피 이제 아이들은 나를 무서워할 게 뻔해! 쟝고가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맞아, 쟝고!'
바이는 다시 쟝고를 돌아보았다. 쟝고도 얼이 빠진 표정으로 니드런 형제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뱃속에서 다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이성이 본능보다 강했다. 아무리 철천지원수 앞에서라도, 바이는 아기들이 있는 곳에서 전처럼 무서운 모습으로 돌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대로 원수진 상대 앞에서 상냥한 이웃으로 돌아오는 것도 여의찮았다. 바이는 요동치는 것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 안에서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얼핏 보기에 쟝고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두 포켓몬과 두려움에 떠면서도 도망치지 못하는 두 포켓몬이 있는 상황은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그런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상황을 부숴버린 것은 번개였다.
"까르르르!"
번개는 자지러지듯 웃었다. 번개 역시 울면서 나뒹굴고 있는 니드런 형제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진 것 같았다. 번개는 땅바닥에 널부러져 까르르 웃어댔다. 자기들과 비슷한 또래의 꼬마 포켓몬이 신나게 웃어대자 니드런들도 울음을 그치기 시작했다. 니드런 형제는 눈물 가득 담은 눈동자를 영문 모르겠다는 듯 이리저리 굴렸다. 그 모습이 또 번개를 웃겼다.
"꺄르르!"
번개의 웃음소리에 바이는 유리가 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깨진 유리를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도. 극도의 긴장 상태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탁 풀어져버린 셈이니, 아무래도 몸에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바이는 여기저기 쑤시는 몸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하......"
바이가 웃기 시작하자 니드런 형제도 두려움이 가시기 시작한 것 같았다. 두 니드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바이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바이는 더욱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바이가 힘차게 웃자 니드런 형제의 얼굴에도 서서히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번개가 웃었고, 바이가 웃었고, 두 니드런이 웃었다.
그곳에서 웃지 않는 것은 쟝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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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만화를 그리고 싶었는데, 그림 실력이 개판이라...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