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김정호, 『조선의 탐식가들』, 따비, 2012.
사자성어 중에 순갱노회(蓴羹鱸膾)라는 말이 있습니다.
순채로 만든 국과 농어회라는 뜻으로, 중국의 장한이라는 사람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장한은 원래 오나라 사람으로 제나라 왕의 눈에 들어 관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가을이 되어 바람이 불자 고향 땅의 진미인 고채(줄풀) 나물과 순챗국, 농어회를 그리워하던 나머지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다. 어찌 명성이나 권력을 구하려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어가며) 수천 리 타향에 묶일쏘냐.”라며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후로 관직 생활을 그만두는 이유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함께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다름 아닌 순챗국이라는 음식의 정체였습니다.
그 좋은 벼슬자리도 마다하게 만드는 환상의 음식. 도대체 순채가 무엇이길래 고향을 떠올리는데 정다운 사람이나 아름다운 풍경도 아니고 국 한 그릇부터 생각나게 만드는 것일까.
기대를 잔뜩 안고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지만, 화면에 뜬 사진은 이야기 속 환상의 음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연잎 같기도 하고 개구리밥 같기도 한 둥근 이파리가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맛있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요.
혹시나 잘못 검색한 것인지, 아니면 연근처럼 뿌리를 먹는 식물인가 싶어 이리저리 찾아보아도 이 보잘것없는 이파리를 살짝 데쳐서 요리에 사용한다고 나올 뿐입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순채. 요리법을 찾아보니 요리하기 전에 살짝 물에 씻어서 살짝 데쳐야 한다고 나와있습니다.
물에 씻어도 순채를 감싼 점액질은 쉽게 벗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순채를 손질할 때면 이 모습이 얼음에 둘러싸인 모습과도 같다고 해서 "얼음을 삶는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고 하지요.
제게는 그야말로 처음 보는 신비로운 식재료인데, "조선의 미식가들"이라는 책에 나오는 설명을 보면 이 맛에 매료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서진의 문장가 육기는 강동 사람으로, 어느 날 재상 왕무자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을 방문했다. 왕무자가 창고에 가득 쌓인 양락(치즈)을 가리키며 강동에 저 맛을 당할 만한 것이 있느냐고 자랑하자, 육기는 천리호의 순채로 만든 국은 어찌나 맛과 향이 좋은지 소금이나 된장조차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이렇듯 순채는 중국의 강동사람들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맛있는 고향의 진미로 여겨져 왔습니다.
심지어는 고려말 목은 이색의 시에서도 “순채를 보면 월나라 사람이 생각나고 양락을 보면 북방 사람들이 생각나듯 우리는 두부를 맛있는 음식으로 꼽는다”라며 순채를 강동지방(오늘날 강소성 일대)의 향토 음식으로 꼽기도 했지요.
하지만 저자는 순채가 반드시 중국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님을 강조합니다.
“왕실에 올린 공물 목록을 보면 순채 두 항아리가 있는데, 한 항아리의 값은 넉 냥이라고도 적혀 있다. 연산군이 순채를 즐겼는데, 먼 곳에서 진상하는 순채는 아무리 항아리의 물을 갈아도 삭아서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결국 승정원의 의견대로 순채는 가까운 경기 감사에게 공상하게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 두 가지는, 임금님이 즐겨 찾을 정도로 순채의 맛이 좋았다는 점과 전국 각지에서 진상할 정도로 순채가 흔한 식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책에 따르면 순담계곡, 순동리, 순호리 등 순채 순(蓴)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모두 순채 명산지였다고 하니 고려와 조선의 문장가들이 고향 이야기를 할 때면 순갱노회의 고사를 인용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정도.
한국과 중국뿐 아니라 일본인들 역시 순채를 ‘준사이’라 부르며 각종 요리에 즐겨 넣었는데, 순채 사랑이 어찌나 지극한지 일제강점기 때는 “이 좋은 음식을 조선인들에게 줄 필요 없다”라며 전량 공수해갔다고 하네요.
한일수교 정상화 이후 1970년대에는 일본에 수출하는 효자 상품이 되었는데, 어찌나 수익이 좋던지 순채가 자라는 호수나 습지를 ‘돈못’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한·중·일 삼국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순채.
그 맛을 경험해보려고 인터넷에서 1.5ℓ들이 페트병에 담긴 순채를 주문해서 요리를 시작했습니다.
순채는 다양한 요리법이 있고, 특히 일본에서는 “산에는 송이, 밭에는 인삼, 물에는 순채”라고 할 만큼 귀한 재료라고 여기다 보니 튀김, 무침, 절임 등 다양한 일식 요리법이 유명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소모되는 순채 대다수는 일식당에서 사용될 정도.
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그 맛을 즐기려는 급한 마음에 우선 순채차를 타서 마셔보기로 합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순채를 맛보는 것을 다음과 같이 신선의 취미로 소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오미자를 우려낸 물에다 벌꿀을 탄 다음, 순나물을 적셔 먹으면 달콤하고 시큼하며 맑고 시원한 맛이 흡사 선미(仙味:신선이 즐기는 맛)라, 이를 당할 만한 맛이 없다.”
붉은빛이 감도는 오미자차에 꿀을 섞고, 준비된 순채를 띄워 먹는다. 시원하고 달콤하고 시큼한 맛이 단번에 입 안을 사로잡습니다.
그런데 단맛은 꿀맛이고 신맛은 오미자의 맛이니 순채의 맛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돌돌 말린 이파리는 희미하게 신맛이 나긴 하지만 이는 순채를 보존하기 위해 식촛물에 담가두었기 때문일 테고,
그 외에는 아무리 씹어봐도 식물의 향이나 맛이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순채가 미각이 아닌 촉감으로 먹는 음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미끌거리며 술술 넘어가는 그 느낌은 마치 버블티의 타피오카 펄을 먹을 때처럼 부드럽고,
투명한 막을 자르고 들어간 이빨이 얇은 잎사귀를 톡톡 끊는 느낌이 다른 어떤 식재료로도 흉내내지 못할 맛이니까요.
순채차를 한 잔 마시니 시원하면서도 독특한 그 식감이 일품입니다.
냉방 시설도 없던 그 옛날, 시원한 우물물에 오미자를 우려내고 순채차를 마시면 그야말로 신선의 취미로 느껴질법 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하지만 지금은 일본어로 "일본의 맛, 쥰사이"라는 딱지가 붙어있고 정작 내용물은 중국산인 순채를 한국에서 먹고 있으니 이것이 세계화의 장점인지 부작용인지 혼란스러운 기분도 들지만요.
순채차를 음미하며 그 유명한 순챗국도 끓여 봅니다.
책에는 붕어를 종이에 싸서 구운 다음 뼈를 발라내고 각종 약재와 함께 달여내는 방법이 적혀 있는데,
너무 한약 느낌이 나는 조리법이라 대거 생략하고 일반적인 생선국 끓이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생선 뼈를 푹푹 삶고 생선 살을 갈아넣은 육수에 된장과 소금만 약간 풀어서 순채를 넣어 국을 끓이는 것이지요.
생선을 손질하면서 포를 뜨면 생선 가시를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 외에도 뼈만 따로 모아서 국물내기 좋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동안 냉동실에 모아두었던 생선뼈를 푹푹 끓이고 한 번 걸러내면 뼈에 붙어있던 살점은 다 흩어져서 국물에 녹아듭니다.
냉장고에 식히면 젤리처럼 굳을 정도로 진한 생선 육수는 그대로 매운탕을 끓이거나 다른 생선 요리에 활용하는 등 용도가 다양합니다.
순챗국은 생선 국물 특유의 고소한 맛에 짭짤한 된장의 풍미가 살짝 느껴지지만 여기서도 순채의 맛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맛을 뽐내며 광고하지 않고 다른 재료의 뒤에서 그 식감으로 묵묵히 받쳐주는 역할.
마치 젤라틴이나 제비집처럼 음식에 질감을 더해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는 재료입니다.
그렇기에 가을바람에 불현듯 생각나는 고향 음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맛과 향이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다른 재료들과는 달리, 순채는 자신만의 고유한 촉감을 통해 기억 밑바닥에 흔적을 남기니까요.
마르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향기를 통해 잃어버린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이 나오듯,
순채가 없으면 똑같은 생선국을 먹어도 그 독특한 질감의 빈자리 때문에 더욱더 고향을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아쉬운 점은 이제는 순채를 먹어도 고향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연잎은 부처님이 중생 구제하듯 더러운 진흙탕에서도 꽃을 피워 올리지만, 순채는 선비를 닮아 조금이라도 더러운 곳에는 아예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순채는 맑은 물에서만 자라는 수생식물이거든요.
그런데 산업화 과정에서 호수와 웅덩이를 메꿔 논과 밭으로 만들고, 새로 지은 공장이 수질을 오염시키며 순채가 자생할만한 환경이 줄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순채는 멸종위기 야생식물로 지정되어 보호 대상이니 우리가 먹는 순채는 죄다 중국산입니다.
살 곳이 사라져 떠밀리는 것은 비단 순채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학교와 일자리,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린 지도 몇 세대가 지났습니다.
이제는 부모님은 물론이거니와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향’ 역시 서울 및 수도권 지역인 경우가 많을 지경.
그러다 보니 초가지붕 얹은 고향 시골집은 동화책에서나 등장하고, 고향의 맛은 감칠맛 내는 조미료 포장에나 찾아볼 수 있는 공허한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고향 없는 사람이 살 곳 잃은 순채를 먹는다는 점에서 서로 어울린다는, 씁쓸한 감상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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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 보는 채소인데 조상님들은 정말 좋아했던 채소라니 생소하네요 잊혀진 과거 같은 식재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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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집에서 나오면 종종 먹곤 했는데 유명세만큼 맛은 없더라고요. 멋진 글 솜씨에 감탄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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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낯선 채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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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잘보았습니다. 맛은 궁금하지만 확 끌리지는않는 오묘한느낌이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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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좋은 글 써주셔서 문학 작품 읽는 기분으로 매번 읽고 추천 드립니다 심지어 이번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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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잘보았습니다. 맛은 궁금하지만 확 끌리지는않는 오묘한느낌이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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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줄기도 무친거 진짜 밥도둑이죠! | 23.12.03 03:5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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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줄기 자체는 수확철이면 구하긴 쉬운데 다듬는게 일임... | 23.12.03 10: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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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줄기 나물 정말 맛있는데... 그냥 먹으면 빳빳하죠. 겉껍질을 다 벗겨내면 정말이지 밥도둑이 따로 없는데, 손이 많이 가서... 밖에서 사 먹는건 거의 볼수 없다는게 아쉬움... | 23.12.03 21:5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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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이 껍질 벗기시는거 봤는데... 시중에 절대 팔수 없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23.12.04 14: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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