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44503
2화: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44716
2.5화: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45016
3화: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45082
4화: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46169
5화: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47386
에필로그(1)
아침, 커튼 사이로 비치는 옅은 햇살이 날 깨워.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해 뒤척이는 다른 환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 사이로 먼 복도에서부터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와. 나는 문이 열리기 전부터, 그 발소리의 주인이 당신이라는 것을 알지.
열린 문 뒤에서 나타난 당신은 항상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 어설프게 만든 가면으로 숨기려 하지만, 그거 알아? 당신은 연기에 소질이 전혀 없다는 거.
오늘도 작게 떨리는 당신의 손 끝이 이번엔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낼까. 메스구나.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은 꽤 크지만, 상처가 깔끔해 회복이 빠르지. 내가 당신이라면 날을 조금 무디게 만들어서 오래도록 아프게 만들텐데. 뭐, 바보같을 정도로 착해빠진 당신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야.
나름대로 애써가며 내 살갗을 이리저리 들쑤시는 당신. 하지만 칼 끝에서 숨길 수 없는 친절함이 느껴지는걸. 봐, 지금도 내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도록 고통스러운 부분을 다 피해 가고 있잖아. 이제 와서는 솔직히 별 느낌도 안 들지만, 아픈 척 정도는 해야 당신이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겠지.
내가 과장스레 고통 어린 신음을 내며 몸을 조금 비틀면, 당신은 작게 미소지었다가,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가면을 쓰고 강한 척을 해. 화난 것 같은 목소리로 충분히 반성했냐 묻고, 저녁에 돌아오기 전까지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라 이르지. 그래, 그건 뭐 좋아. 그런데 문 닫자마자 울며 토하는건 슬슬 그만둘 때 되지 않았어? 너무 대놓고 소리가 들려서 모르는 척 해주기가 민망할 정도라고. 뭐, 당신에게 그런걸 바라는건 조금 무리한 요구일까.
[미친 년놈들끼리 잘도 붙어먹고 있네. 역겨워서 토가 다 나와.]
당신이 나간 즉시 입을 여는 또 다른 나. ‘벌’이 그다지 아프지 않다 보니 이런 부작용도 생겼어. 처음엔 당신에게 ‘벌’을 받으면 몇 시간 정도는 잠잠했는데, 이제는 거의 24시간 내내 곁에 붙어서 쉬지도 않고 쫑알대.
[야,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지? 무시하지 말라고!]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까. 이젠 나름대로 대처법을 찾아서 그다지 괴롭지 않아. 뭐라고 떠들든 그냥 무시하는 거지.
“점심으로는 뭐가 나오려나. 허기가 지니까 좀 든든한 메뉴면 좋겠다.”
[이 망할 년아! 그딴 개소리 하지 말고 대꾸를 하라고!]
아니면 아무 상관도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가. 그럼 제 분을 못 이기고 애처럼 악을 써 대거든.
“제가 소완 씨께 말씀드려 볼게요. 환자용 점심 메뉴의 단백질 비중을 조금 늘려달라고요.”
“아, 그래 줄래? 고마워. 이왕이면 닭고기로… 아니, 그건 너무 갔나.”
[야!!! 대답! 하라고!!! 씨이…!]
옆에서 열심히 지혈을 해주는 다프네와 가볍게 잡담을 나누는 걸 보고 목이 갈라지도록 소리를 치네. 눈물까지 머금고 있어. 이렇게 되면 오늘 하루는 좀 편하게 쉴 수 있지. 이 정도로 철저하게 무시당하면 꽤나 의기소침해져서 조금 덜 귀찮아지니까.
“요즘 상태가 굉장히 좋아지고 계세요. 이 추세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퇴원하실 수 있겠어요.”
“그거 참 반가운 소리네. 퇴원하면 뭐부터 할지 슬슬 생각해야겠어.”
지혈이 끝나고 나서도 가벼운 잡담이 이어져. 퇴원이라. 별로 상상이 안 가네.
“사령관님의 ‘벌’.... 처음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효과가 있네요. 그것도 엄청.”
“뭐… 그게 그 녀석의 대단한 점이지. 현실성 없는 망상을 진짜로 해낸다는 거 말야.”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솔직히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어. 그런 발상을 정상이라고 말하기는 좀 힘들잖아? 결과적으로는 이렇게까지 나아졌으니 엄청 고맙긴 하지만.
“장화 양의 상태가 나아지고 있다고 계속 말씀드리고 있는데… 사령관님께서는 어째서 ‘벌’을 계속 하시는 걸까요? 하다못해 강도라도 조금 낮추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예요.”
“뭐… 엄밀히 말하면 아직 완전히 치료된 건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예전에는 상태가 많이 심각했잖아? 그 때를 생각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지.”
“하긴….”
다프네가 예전의 내 모습을 떠올리곤 몸을 부르르 떨어. 조금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지. 다 내가 뿌린 씨니까.
“앗, 너스 콜이다. 죄송해요. 잠시 자리 비울게요.”
그렇게 다프네가 나가고, 방에 또 다시 침묵이 맴돌아.
[야, 내 말 들리지? 들리잖아. 그러니까 뭐라고 대답 좀…]
이제는 엎드려 빌다시피 하는 또 다른 날 흘긋 보고서 눈을 감아. 그리고 당신을 떠올려.
있잖아. 사실 다프네에게 말 못한 게 있어.
나 말야. 어째서인지… 당신이 주는 고통이 따뜻하다고 느껴. 나른한 오후의 포근한 햇볕, 하루 일을 마치고 들어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욕물…. 대충 그런 느낌이야.
그리고 나, 당신의 발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숨길 수 없을 만큼 거세게 요동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문을 열고 당신이 들어올 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게 ‘벌’을 내려줄 때, 문을 닫고 나가 소리 죽여 울 때. 그 모든 행동으로부터 애정을 느끼고, 나아가 기쁨을 느껴.
나, 아마도… 당신을 좋아하고 있는가 봐. 생각해보면 꽤나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동안은 확신할 수 없어서 말하지 못했어.
당신에게 짐을 지우는 게 아닐까 해서 말하지 못했고.
당신에겐 나 같은 년은 어울리지 않을 거라 말하지 못했지.
그리고, 우리 관계의 시작은 꽤나 비틀려 있었잖아? 다짜고짜 홍련을 죽이러 나타나서는 멋대로 떠나고, 또 멋대로 돌아와 눌러앉고. 그리고서는 당신을 죽일뻔 하기까지 했으니. 내가 무슨 낯짝으로 당신을 좋아할 수 있겠어.
우리의 관계를 비유하자면… 그래,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결승점 반대 방향으로 100킬로미터 지점까지 이동한 거나 마찬가지지. 거기에 신발끈은 엉망으로 엉켜 있어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상태. 시합은 커녕 당장 그 자리에서도 움직일 수 없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지.
이게 시합이라면 포기하는게 이롭겠지. 아무리 노력해봐야 제대로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사람들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니잖아? 아무리 느려도,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려도, 최후에 결승점에 도달하기만 하면 돼. 당신이 알려줬지. 내가 이제껏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은 얼마든지 남아있다고. 그 긴 시간동안 때로 주저앉아 멈춰서고, 또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올바른 방향으로 간다면 문제없어.
필연적으로, 나는 결승점에 맨 마지막으로 도착하겠지. 당신 곁에는 이미 수많은 이들이 있을 거고. 하지만 상관없어. 당신은 그런 나라도 똑같이 사랑해 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엉킨 신발끈은 이제 다시 제대로 묶었어. 발걸음을 떼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나의 의지 뿐이지. 조금… 아니, 솔직히 많이 무섭고 떨리지만 오늘 첫 걸음을 떼보려고 해.
저녁까지 시간이 좀 남았네. 사령관, 어서 내게 와줘. 오늘은 특히나 당신을 기다리기 힘들 것 같으니까.
————————————————————————
드디어 에필로그네요. 에필로그 2는 라오19게에 올라갑니다.
(IP보기클릭)58.227.***.***
(IP보기클릭)22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