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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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키리, 어느 겁쟁이 바이오로이드의 기록 (1):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04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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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키리, 어느 겁쟁이 바이오로이드의 기록 (9):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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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키리, 어느 행복했던 바이오로이드의 기록 (10):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05532
전전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07255
전편: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7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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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셨나요, 주임님”
비록 보안을 위해 폐쇄적인 구조를 취한 연구소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만한 실내 정원 정도는 있었다. 인간이란 참 복잡하고도 연약한 동물이라, 심신을 안정시킬 조금의 녹색이라도 없으면 지치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그게 상섭이 자신을 여기까지, 단둘이만 있는 장소로 불러낼 이유가 될 것 같진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발러 앞에서 크흠, 상섭은 헛기침했다. 그러고선 뭐가 그리도 어려운지 그대로 말문이 막혀 우물쭈물했다. 발러로서는 이 남자가 자길 불러놓고서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발러가 고개를 두 번 더 갸웃한 다음에야 그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지난 번 그 일은 괜찮아?”
본부장과의 그 짧았지만 유쾌하진 못했던 사건이 떠오르자 발러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그러나 그녀 생각엔 상섭이 지금 바이오로이드인 자길 걱정할 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그쪽이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뭐...일이 좀 있긴 했지. 소장님은 상부에 시말서 쓰고, 나는 감봉 처분 먹고...”
그녀의 담당연구원이 멋적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이 시국에 안 잘린 게 어딘가. 전쟁이 깊어지며 블랙리버도 점점 인간이, 특히 고급인력이 귀해지는 건 분명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회사 높으신 분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으면 잘리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그리고 기업국가의 시대에, 그리고 이 전쟁통에, 해고된 사람들은 사람 대접 못 받기 일쑤니, 이 정도면 상당히 관대한 처분이다. 상섭은 이제 지나간 일이니 별 거 아닌 것처럼 하하 웃었지만, 오히려 발러가 미안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아, 걱정하지 마. 이젠 다 끝났으니깐”
발러는 그를 걱정했고 실제로 아즈라일이 돌아간 직후 좀 잡음이 있긴 했다. 그의 부하들은 그를 대신해서 연구소 직원들에게 짜증을 부렸고 - 그러나 별로 털 게 없어서 그들도 더 할 말은 없긴 했다 -,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상섭이 소장에게 불러가 한바탕 혼난 건 사실이지만, 그는 별로 큰 불만도 후회도 없었다. 어쨌든 일개 연구원이 블랙리버 고위 임원에게 무례를 저지른 건 사실이었으므로 소장도 관리자 된 입장에서 그를 혼내고 징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거하게 꾸중한 다음에는, 소장도 그의 옆을 지나가면서 그에게 잘했다고 슬쩍 말해주었으니까. 이 연구소 사람들은, 다들 좀 쫄보일진 몰라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답지 않게, 바이로오이드인 발러와 아우디도 같은 동료로 대해줄 만큼.
“사람들은 바이오로이드들을 좀 더 존중해줄 필요가 있어”
“저는 괜찮아요”
“바이오로이드들이 아니면 자기들이 대신 위험한 사지로 내몰렸을 텐데.”
거기까지 말하고서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더 말하고는 싶은데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눈치인 것 같아 그녀는 그를 좀 도와주기로 했다. 둘이 서로 지내면서 상섭만 발러를 이해하게 된 게 아니니까. 발러도 마찬가지로 이 수더분한 학자를 이해해 왔으니까. 그의 성격, 그의 말버릇, 그의 몸짓, 하나하나를.
“저..그래서 따로 부르신 이유가?”
“가만히 생각해 봤어”
“?”
“그 아저씨가 너한테 막 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네가 바이오로이드였기 떄문이야”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서 오히려 발러 쪽이 어이가 없어졌다. 그럼 자신이 바이오로이드지 인간이겠는가. 그보다 블랙리버 계열사의 본부장에게 ‘그 아저씨’라니. 이거 이래도 괜찮은지. 그러나 상섭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너에게는 인간으로서의 법적 지위가 없어.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막 대하는 거지.”
“그렇죠”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는 듯 덤덤하게 답하는 그녀를 보자니 상섭은 마음 한 켠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보호자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져”
“?”
“법적인 보호자 말이야. 현행법상 바이오로이드는 인간과 특정한 인간관계를 맺으면 나름의 법적 지위가 생겨. 그, 그러니까 예를 들면 배우자라든지...”
여기서 다시 한 번, 상섭은 말을 우물쭈물했다. 발러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이 사람 오늘 왜 이러지. 그녀는 군인이지 독심술사는 아니었던지라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유들유들하게 하하 웃고 다니는 그답지 않게 얼굴이 홍당무 같이 달아오르는 이유를. 그러나 이왕 여기까지 온 것, 한번 시작한 걸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었다.
“저기 말야, 발러.”
“네?”
“저, 음, 그러니까, 너도, 그, 어, 결혼을 하면, 음,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돼.”
“?”
“그...너를 배우자로 맞이할 사람만 있다면, 그러면...”
“??”
“그, 누군가가, 너를, 음, 좋아해 준다면 말야, 결혼도 할 수 있잖아...?”
“저, 주임님, 무슨 말을 하시고 싶으신 거죠.”
“저...호...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이, 있어...?”
“마음에 두다뇨?”
“그, 평소에 신경쓰이는 남자라든지”
“그건...”
크게 생각 없이 ‘주임님인데요’, 라고 말하려는 발러의 턱이 순간 멈칫했다.
그제야 발러는 상섭이 뭘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아졌다. 갑자기, 그녀와 마주선 그와 같이, 그녀도 가슴이, 격렬하게 벅차왔다.
인간과의 혼인과 완전히 동등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바이오로이드와 결혼 혹은 그에 준하는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가능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되면,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의 배우자이자, 인간의 잠재적인 모친으로서 나름의 법적 지위를 갖게 된다. 그렇더라도 인간과 완전히 동등하지는 않지만, 이전처럼 그녀를 완전히 물건이나 도구처럼 다루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법적으로 자연인의 인격이 어느정도 인정받는다는 것이니까. 실제로 철층과의 전쟁 이전에 그런 사례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삼안이 지배하는 한국에서는 실제로 후손을 낳을수있다는 점때문에 바이오로이드와 혼인과 유사한, 아니 일반적으로 혼인신고와 대등한 법적 관계가 가능했으니. 그러나...
‘내게....? 나에게?.....내가???’
이곳에 온 뒤로, 친절한 연구소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그리고, 이 수더분한 인상의 연구원을 만난 뒤로, 그녀는 항상 스스로를 엄히 다잡았다. 나는 인간이 아니라고. 그들과 같은 반열에 설 수 없다고. 그들과 함께 어깨를 맞댈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결혼? 군인으로 태어난 이상 그녀에게 그런 것은 연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와락, 두려움에 가까운 의심마저 들었다. 대체, 도대체, 왜, 어째서, 나같이 딱딱하고 애교도 없는 바이오로이드의 어디가 좋아서, 왜....
그 대답은 그녀의 건너편에 서 있는 인간 남자가 쥐고 있었다.
“발러, 너는 좋은 여자야”
아니요. 저는 도구입니다. 심지어 살상도구죠.
“여기 사람들 다 그걸 알지만, 난 더 잘 알 거 같아. 어, 음, 당연한가? 그야 계속 붙어다녔으니까...”
뭘요? 제가 좋은 여자라는 것? 저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저는, 저는....
“안 그런 척하지만, 정이 깊고. 남을 신경써 줄 줄도 알고....”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된 건, 전부 다 당신이 곁에 있어서....당신 떄문에.........?
머리통을 세게 두드려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도, 그 동안 이 남자를 계속 바라봐왔다는 것을. 그가 발러를 바라본 만큼이나, 그녀도. 그로 인해 그녀도 변했다는 것을.
가슴이 울렁여 왔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도저히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 난 말이지, 음, 널 더 알아가고 싶어. 어, 그, 그러니까, 이건 연구자로서의 학술적 호기심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게, 으...”
“.......”
“아, 아무튼, 난, 네가, 아니 당신이, 더 떳떳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녀와 함께하니 알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끔찍했던 옛 전장의 기억으로든, 망나니 같은 인간 때문에든, 자기가 거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녀의 책임자로서, 그녀의 담당자로서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책임자를 넘어서.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
“어, 도, 동반자라고 해야 하나?”
서로 동등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서 함께하는 것.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같이 어깨를 맞대면서.
“.....흑..”
뭐라고 대답해야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만 울음 같은 신음이 발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약간은 횡설수설하는 듯한, 앞뒤 없이 말하는 듯한, 논리정연한 학자 답지 않게 말을 주워삼기는 그를 앞에 두고서. 그러나 말은 중구난방일지언정 그의 마음은 너무도 그녀에게 잘 전해져왔다. ‘인간’이 아닌 그녀조차도 알 수 있을 만큼.
“아...진짜! 난 이런 거 무드있게 잘 못하겠어.”
그는 결국 다 포기한 듯싶었다. 세상의 법칙을 연구하고 만물의 운동을 관찰하는 과학자도 이런 데에는 서툰가 보다. 그는 정신 사납게 자신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곤 주머니를 뒤적였다. 한참이나 서툴고 긴장된 듯 주머니를 뒤적이던 그의 손은 마침내 자그마한 반지 상자를 꺼냈다. 그다지 호화롭다고는 못할.
“으...제대로 된 거 구해주고 싶었는데. 지금이 전시라서.....미안해”
그런 변명따위 필요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했으니까. 발러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자기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키예프의 그 지옥에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기에.
“크흠, 어, 음, 발러, 그, 저기,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그녀의 연구원이, 어느새 그녀 앞에 정중하게 무릎 꿇은 그 인간 남자가, 마침내 그 말을 입 밖에 내었다.
“나하고, 결혼해줄래?”
발러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계속: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7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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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출처에 대한 이야기
1) 삽입된 곡은 "투웬티 원 파일럿츠(Twenty one pilots)"의 "Screen"(2013)입니다. 가사의 내용은 (가수 특성상 종교적으로 읽힐 여지도 있지만) 사랑 고백 노래로, 대충 말하자면 노래하는 자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자신이 이상해진단 내용입니다. 사이언티스트(?)인 남자가 바이오로이드에게 고백할 정도면 뭐, 그렇겠죠.
2) 상단 정원 사진은 아모레퍼시픽 본사의 실내정원입니다.
1. 설정에 대한 이야기
1)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결혼 관계에 대한 설정은, 다음 게시글들에서 정리한 세계관 설정들을 참조했습니다.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03887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0150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98076
2. 본편에 대한 이야기
1) '어느 행복했던 바이오로이드의 기록'은 발키리의 회상편입니다.
3. 잡담
1) 다음 편은 주말이나 다음주 중반쯤에 올라오겠습니다.
소설은 읽는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도, 제 서투른 글들을 항상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이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달아주시는 댓글에 모두 빠짐없이 답글을 단답니다 ㅎㅎ
(IP보기클릭)58.227.***.***
(IP보기클릭)211.44.***.***
수정했습니다 ㅎㅎㅎㅎ | 21.08.27 13:59 | |
(IP보기클릭)211.201.***.***
(IP보기클릭)211.44.***.***
아 결혼식은 바로 10편(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105532)으로 이어집니다 ㅋㅋㅋㅋ 주임님이 주인님으로 보이는 건....저도 그렇게 보이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 설정상 얘가 주임연구원이라 그렇긴 한데...이거 참 직급이나 직무명칭을 바꾸는 게 나았으려나요 ㅎㅎㅎㅎ | 21.08.27 23:5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