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마타자에몬 토시이에....
특이한 화장, 복장으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가부키모노"였으며....(마에다 케이지의 화장, 복장, 행동이 가부키모노의 그것입니다)
창을 잘 써서 "야리노 마타자(창의 마타자에몬)"라고 불렸습니다.
창을 얼마나 잘 썼냐면,
지휘관이 되어 군대를 통솔하기 전. 직접 전투에 참가했을 당시에는 적군의 무사들 중 무용이 뛰어난 자들을 직접 죽였을 정도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가 오와리 지방 수호다이묘의 아래에 있던 수호대리. 그 수호대리의 가신이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와리를 평정하기 위해 평생 전투만 하다가 후계자 결정을 죽기 직전에 해놔서,
노부나가가 동생 오다 노부유키와 후계자 다툼을 벌일 때부터
마에다 토시이에가 세운 전공은 적군의 강한 무사를 죽인 것이었습니다....
.......노부유키의 친위대장을 죽인 것. 미노의 "목베기 명수 아다치 시치로베"를 죽인 것 등.
........그러나 이런 전공이 1등 공적은 아니어서 마에다 토시이에는 출세를 빨리 하지는 못했습니다.
노부나가가 후계싸움에서 승리했을 무렵에는 노부나가의 친위대장(쿠로호로중)이 되었습니다.
이 당시 다른 친위대장(아카호로중)은 삿사 나리마사였고,
하시바 히데요시는 창고관리역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농민 출신에 외모가 경박해서 남들로부터 무시를 당했지만,
.......그 히데요시를 인간적으로 대한 것이 마에다 토시이에였다고 합니다....그래서 굉장히 친했다고 합니다.
오케하자마 전투가 있기 1년여 전, 노부나가의 잡무를 담당하던 스님(쥬아미)을 죽여 오다령에서 추방당했고,
오케하자마 전투에 임의로 참여하여 적군의 머리 셋을 베어오기도 했으나 노부나가의 용서를 받지 못했다가
미노 공략전에서 "적의 목을 정말 잘 따는 강한 무사", "아다치 시치로베"를 죽임으로써 용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마에다 토시이에는 군대통솔 어느 정도는 했지만, 능력이 아주 뛰어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일군의 지휘관이 되서 참전한 전투가 "아네가와 전투"였는데, 아사이 군의 공격에 꽤나 고전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에치고의 우에스기 켄신을 견제하기 위해 북국(호쿠리쿠)지방으로 시바타 카즈이에 부대에 삿사 나리마사 등과 함께 배치를 받는데,
이 때, 친구인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미 25만석이 넘어가는 요코하마성의 성주가 되어 서국의 모리氏를 공략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가 미노 출신의 "다케나카 한베에", 히메지 출신의 "쿠로다 칸베에"의 지략 덕분에
서국(엄밀히 말하자면 쥬코쿠)을 효과적으로 공략하던 것과는 달리,
토시이에 등 북국세력은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우에스기 켄신에게 대패를 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에스기 켄신이 병사한 이후로는 북군이 꽤 활약하여 카가 지방을 전부 회수하고 에치고로 쳐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부터 마에다 토시이에의 지휘능력이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고,
북국에서 철군을 하지 못한 시바타군과는 달리 하시바군은 "쿠로다 칸베이"의 협상력 덕에 모리氏와 강화를 맺고 철군.
니와 나가히데의 부대를 흡수하여 야마자키에서 혼노지의 변 주동자인 "아케치 미츠히데"를 격파하고 세력을 확장합니다.
이후, 오다 가문의 후계자 결정을 두고 세력이 강해진 하시바 히데요시와 오다 가문의 제1 가신이었던 시바타 카즈이에의 대립합니다.
두 군세는 산악지형인 시즈가타케에서 대치하게 되는데,
하시바군의 압도적인 물량공세를 감당하기 위해서 시바타 카즈이에가 취한 진법이
산의 높은 봉우리를 점령하고 적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전법이었습니다..
즉, 먼저 군대를 움직이는 쪽이 불리한 산악지형의 특징을 이용한 진법이었는데....
시바타군의 사쿠마 모리마사가 성질을 참지 못하고 먼저 군을 움직임으로써 시바타군이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 때, 마에다 토시이에는 우정(히데요시)과 의리(시바타...오야지라 불렀다고 함)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그만 철군하게 되었고
그 직후 시바타 군세는 와해되어 패전하게 됩니다.
철군 직후, 히데요시는 토시이에에게 "전처럼 사이좋게 잘 지내보자."라고 건의했고,
토시이에는 그 직후 하시바군에 합류하여 시바타 카즈이에의 근거지였던 "키타노쇼"를 공격. 시바타, 오이치 부부는 자결하게 됩니다.
이제 하시바 히데요시가 관백이 되고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아 천하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을 때.
마에다 토시이에는 종 2품 쥬나곤에 올랐고, 호쿠리쿠의 전 영토('카가' 지방)를 영지로 받아 석고 120만석을 이루게 됩니다.
친구 덕에 벼락출세한 것으로도 보이지만, 사실 마에다 토시이에가 벼락출세하면서도 잡음이 없었던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바로 그의 인망이었습니다.
토시이에는 주변에 자신을 싫어하는 상대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의 성격이 모나지 않고 사려 깊으며 인정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히데요시가 키운 "시즈가타케의 7본창". 히데요시의 처남이자 정권의 핵심인물이었던 "아사노 나가마사('네네' : 아사노가문 사람)"는 물론
모리氏, 우에스기氏, 우키다氏, 고바야카와氏 등 5대로 일원들 거의 전부가 마에다 토시이에를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 머리가 비상하기로 이름난 "쿠로다 칸베에"조차도 마에다 토시이에를 믿고 의지하다가,
토시이에의 죽음을 예상을 한 이후에나 도쿠가와로 갈아탈 정도였으니....
마에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변덕과 폭정이 있을 때마다 히데요시를 말리고 간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고,
다이묘 간의 분쟁을 조정할 능력이 되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마에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 얼마 안있어서 위장병으로 죽습니다.
어린 히데요리의 양육을 담당하며 지켜줘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고,
걸림돌이 없어진 이에야스가 천하를 향한 야심을 드러냅니다.
후세의 사가들은 말합니다.
만일 토시이에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키가하라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p.s. 마에다 토시이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오다가문의 당주가 될 무렵부터 그의 측근으로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죽는 시점까지 정권의 핵심이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존중하여 자신의 친손녀딸을 며느리로 준 거물 중의 거물입니다.
마에다 가문은 에도시대 제 1 다이묘(번주) 즉 세력이 막부 다음으로 큰 가문이었고,
역대 쇼군들이 항상 견제하던 가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꽃피는 남자 마에다 케이지"라는 만화책에서 안습 캐릭터로 등장하여 오명을 얻기도 했으나,
그것은 실재와는 다른 허구입니다.
쓸 말은 정말 많은데, 여기서 대충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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