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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칸다르 (알렉산드로스 3세는 ) 는 아게아스 왕조 25대왕 필리포스 2세(B,C 382 ~336) 와 알렉산드로스 1세의 누나인 올림피아스
(B,C 375~316) 의 아들로서 태어났습니다. 이스칸다르가 태어날 무렵 발칸반도 서부지역에 사는 인도유럽인 일리리아 인들의 전쟁에서 마케도
니아가 승리하며 필리포스 2세의 말이 올림픽 게임에서 우승할것이라는 울림푸스 제전의 신탁이 들려오자 필리포스 2세는 이스칸다르 가 불패의
인물이 될거라 선언했다고 전해집니다. 태어날 때부터 비범한 징조 를 보이던 그는 어린시절 남들은 길들일수 없을만큼 사납고 인육만 먹는다는 디
오메네스 의 식인암말의 후손이라불리는 황소의 머리 란 뜻을 가진 명마 부케팔로스 를 길들여 그의 애마로 삼았으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B.C 384~322) 으로부터 배움을 받았으며 이 둘의 관계는 오랬동안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16세가 되었을 무렵 필립포스 2세가 이스탄불로 원정을 가있을때 왕국의 섭정으로 왕국을 통치하고 있을 무렵 발칸반도 남동쪽에
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반란을 일으킨 이들을 모두 추방하였으며 다른 이들을 불러와 알렉산드로폴리스 라는 도시를 건설하는것을
시작으로 군사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하여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치며 군사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되었습나다
그리스의 철학자 이자 저술가인 플루타르코스 (B.C 46?~120?)는 당시 마케도니아 인들은 이런 이스칸다르의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고
전합니다.
" 이스칸다르 (알렉산도르) 가 마케도니아의 왕이며 장군이다 "
이런 말이 돌자 아버지 필리포스 2세는 매우 기뻐했다고 플루타르코스 의 기록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37년 필리포스 2세가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 와 결혼하면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게는 차츰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본처인 올림피아스와 이혼을 해버렸고
거기에 에우리디케 의 결혼식날 에우리디케의 친척들의 불쾌하고 몰상식한 행동으로 싸움이 벌어질뻔하기도 하는 일이 벌어지는등 여러모로
불화가 극한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이스칸다르의 모친 올림피아스를 내쳤다가 테마라토스 란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돌아오는 일이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필리포스 2세 와의 불화가 최고조에 달했던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당시 카리야 (오늘날 튀르키에) 를 다스리던 총독 픽소다로스 가
자신의 딸을 이스칸다르 의 이복형인 필리포스 3세 와 결혼시키려 했는데 이를 이스칸다르가 알게됩니다 만약 결혼이 성사될경우 자신 보다 형인
필리포스 3세가 왕국을 다스릴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배우인 텟살로스를 보내 픽소다로스 에게 형대신 자신에게 딸과 결혼할것임을 이야기 하면서
픽소다로드소 마음에 들어했는데 문젠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이 사실을 알게되어 이스칸다를 엄히 질책하였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해집니
다.
" 페르세아 제국의 노예인 카리아 인과 결혼하려하다니 너의 지위와 맞지 않는 행동이다 ! "
이 여파로 이스칸다르 와 오랜 세월 함게 했던 친구들을 모두 해외로 추방시킴으로서 이스칸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습니다. 이중엔 훗날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조 프톨레마이오스 1세도 있었지요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기원전
336년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스칸다르에게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 암살당하는 필리포스 2세 - 앙드레 카스테뉴 삽화 )
바로 부친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것인데 전처인 올림피아스의 동생인 알렉산도르스 1세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날
올림피아스의 경호대장인 파우사니아스 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이사건을 기회로 이스칸다르 는 2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왕위에 오르게 되며 왕위에 오르자 그는 잠재적 인 계승자들을 제거함과 동시 필리포스 2세의 후처 였던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 에게
자결을 강요했으며 에우리디케의 친인척 의 남자들 역시 숙청함으로서 자신의 왕권에 방해가 되는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게됩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이 사건의 배후자가 이스칸다르의 어머니 올림피아스 가 주도한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군대의 최선임인 파르메니온 (B.C 400 ~ 330) 장군이 이스칸다르 를 지지함으로서 왕위를 지킬수 있었지요
하지만 왕권을 안정시킨것도 잠시 선왕 필리포스 2세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작살났던 그리스 의 폴리스 들이 대규모의 반란이 터지게됩니다
필리포스 2세가 없어지고 왠 애송이가 왕위에 올랐으니 이때를 기회로 보고 반란을 일으킨것이였는데 이스칸다르는 3천명의 기병만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자 반란을 일으켰던 폴리스들은 일제히 항복을 함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1년뒤 이스칸다르 는 이스탄불 북쪽에 자리잡은 인도유럽
계인 트리키아 를 공격을 시작으로 도나우강 (* 독일에서 발원하여 중부유럽과 남동부해 을 흘러 흑해로 들어가는 강 ) 에 자리잡던 게타이부족
을 격파하고 있을 무렵 발칸반도 서쪽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서 이마저도 진압을 하러 이동했습니다 그런대 이스칸다르가 이 반란진압 도중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오래전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박살났던 그리스의 폴리스 테베가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친 마케도니아 인사들을 숙청하고 반 마케도니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함과 동시 아테나 와 스파르타 역시 반란에 참여하여 마케도니아 군이 자리
잡던 카드메이아 요새 를 압박해들어가자 이스칸다르 는 3만 3천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게 됩니다 이 여파로 테베는 완전히 초토화
되어 두번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고 하지요
이렇게 반란을 진압하고 다음해가 되자 이스칸다르는 본격적으로 다르네스 해협을 건너 튀르키예 의 비가 시에 있는 그라니코스 강에서
대규모 전투를 시작으로 페르시아 원정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라니코스에서 승리한 이스칸다르는 페르시아 군의 갑옷 300벌을 파르테논 신전에
보내어 이전 크세르 크세스 3세 에 의해 아테네가 불바다가 된것에 대한 보복을 알리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이스칸다르 는 비문을
다음과 같이 새기라 지시합니다.
" 필리포스의 아들 이스칸다르 (알렉산도르) 는 스파르타 인을 제외한 그리스 연합군이 아시아 에 사는 야만인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을 바치니아
다. "
한편 페르시아 아케네메네스 왕조의 왕 다리우스 3세는 이런 이스칸다르의 진출을 좌시하지 않고 맞붙게되었는데 튀르키에 이스켄데룬 시
북쪽에 위치한 이소스 란 곳에서 대규모 접전을 벌이게됩니다 그러나 뛰어난 이스칸다르의 지휘와 전략으로 다리우스 3세 왕은 패퇴하여
도망쳤고 아카네메스 왕조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한편 다리우스 3세는 다시한번 군세를 모으려 했으나 다리우스 3세의 조카 인 베수스 에
의해 최후를 맞이함으로서 끝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페르시아 를 정벌하고 시리아 와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서 명실공히 중앙 아시아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바빌론에 입성하는 이스칸다르 - 샤를 르 브륑 1665년)
하지만 이 페르시아 원정에 성공한 이후 마케도니아의 장교들에 의해 암살당할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암살원인 은 이스칸다르 가 페르시아 에 왔으니 페르시아 식으로 행동하라고 했던게 원인이였는데 거기다 적이였던 페르시아 인들을
동등하게 대하는것 자체에 불만을 품고 벌어진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이스칸다르 를 지지했었던 군벌 이자 왕권을 이을수
있게 해주었던 파르네미온 장군마저 숙청해버립니다 거기다 뜻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 예법을 강요하는걸 보다못해 한소리 했던 친구
이자 글라코니스 전투 때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클레이토스 마저 죽이고 맙니다 자신을 도와준 이들을 뜻하지 않은 일에 숙청을 하고
만 이스칸다르 는 씁슬함만을 남기고 말았지요 하지만 페르시아 에서 그쳤어야 할 원정은 저 멀리 인도 까지 손을 뻐치게 됩니다
이스칸다르가 왜 인도정벌을 꾀하기 시작했는지 에 대해서는 이스칸다르가 대륙의 끝자리에 자의 이름을 남기는 비석을 위해 서였다는겁니다.
그렇게 파키스탄 을 정벌하고 인더스 강 남쪽 까지 확보하는데 성공하지만 오랜세월 함께해왔던 부케팔로스가 30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부케팔로스의 이름을 부케팔리아란 도시를 건설하고 인도정벌에 착수하나 뜻하지 않은 일들이 이스칸다르 의 발목을 붙잡게 됩니다
오랜 원정으로 병력역시 많이 줄었고 거기다 정글에 습한 기후와 풍토병 등으로 인해 병사들의 파업이 시작되었고 결국 이스칸다르는
인도정벌을 포기하고 오랜만에 고국인 마케도니아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대 막상 돌아와보니 관료들의 부정축재가 심한것이 드러나 부정축재를 한 이들을 처벌했고 이스칸다르를 따라 종군했던 이들에게 막대한
포상 을 내렸지만 당시 병력체계는 징집병들이여서 고향에 내려가는것 보다 혜택을 누리고 싶었지 실업자가 되기는 무엇보다소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버리고 말았는데 이에 이스칸다르는 이들을 엄히 꾸짖고 반란 주동자 들만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슬픈일이 그를 덮치고 말았으니 그의 동성애인인 헤파이스티온(B.C356~324) 가 열병으로 죽자 그는 상실과 좌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헤파이스티온 의 주치의 를 헤파이스티온을 돌보지 못햇다는 죄로 십자가 형을 내렸으며 이후 콧사이오이
부족을 정벌했을때 부족의 청 장년들을 모조리 도륙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려는 도중 갑자기 쓰러지게 되었고 1주일 뒤에는 말조차 할수 없게되는 상황으로 까지 번지게 되었으니
그를 만난건 몇 고위급 이들만 만날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강한자가 왕권을 계승하라 라는 이상한 말만 남긴체 32세의 나이로 요절
하고 말았습니다. 이스칸다르가 이룩한 제국은 디아도코이 (장군) 들에 의해 분열되었고 그의 유해는 훗날 프톨레마이우스 1세 가 가져가
알렉산드리아 로 이장되어졌으며 이후 프톨레마이우스 1세에 의해 신격화 되어졌습니다
한때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국했지만 튼실하지 못한 영향으로 그의 제국은 그의 사후 오래가지 못한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디아도코이 들에 의해 갈라진 제국 중 유일하게 프톨레마이우스 1세 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만이 300년의 통치를 한것 외에는
다른 국가들은 반역 혹은 암살등으로 짧은 국가의 통치의 시대를 누리고 사라져버리고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정복왕 이스칸다르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더 쓰고 싶었는데 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작성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