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고요한 실내. 케케묵은 장식장과 딱딱하게 굳은 혈흔.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붕대가 아무렇게 널브러진 이 곳은 차가운 공기까지 흘러서 묘하게 싸늘하고 두려운 느낌을 주었다.
흐릿한 시야를 유지하기위해 몽롱한 정신을 바로잡고 고개를 드니, 휠체어를 탄 늙은이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바로 내게 피를 수혈할 의사였다.
"아아, 그래 창백한 피.. 그래, 아주 잘 왔어. 야남은 피의 묵회의 고향. 자네는 그 비밀을 풀어헤치기만 하면 된다네."
끼릿 거리며 휠체어가 움직였다. 늙은이가 이쪽으로 가까이 오니 흐릿했던 그의 모습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늙은 노인은 눈 주위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고, 구부러진 챙에 큰 통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마 교단 소속의 사람 일 테지.. 이 곳으로 오면서 교단의 사람들을 여럿 보았는데, 그들은 자신의 눈 주위를 붕대로 감아 교단의 표식으로 삼았다. 인간의 형상을 한 야수에 대한 일절의 자비심을 거두겠다는 뜻 인걸까.
노인의 입에서 또다시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자네 같은 외지인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머나먼 동쪽.. 깊은 산속..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고도 야남.
뛰어난 의료기술을 가진 이 도시에는 끔찍한 풍토병이 돌고 있었다. 바로 야수의 병. 야수의 병에 걸린 환자들은 말 그대로 야수처럼 이성을 상실하고 살아 있는 모든 자들을 적대한다. 나 역시 피를 수혈 받을 필요 없었다면 이런 기괴한 곳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피의 수혈을 받아야 할 나로서는 이 곳을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남 시민들은 이 특수한 수혈을 매일 같이 복용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야남 특유의 피의 치료를 받은 자는 이후 같은 수혈로 살아가는 힘과 감각을 얻는다고 하기에.깊이 생각에 빠져있던 나에게 늙은이는 다음 말을 건넸다.
"간단해, 야남의 피를 조금 가져가면 된다네. 하지만.. 그래, 그 전에 계약을 하도록 하지."
노인은 내게 피가 얼룩진 계약서를 건넸다. 이름과 직업, 성별과 나이 등 빽빽하게 적인 계약서였다.
나는 하나하나 신중히 작성하며 다 적은 계약서를 노인ㅡ야남 의사에게 건네주었다.
"좋아.. 서명과 봉인이 끝났군. 그럼 수혈을 시작하지."
계약서를 받은 노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야남에서 받은 특유의 수혈은 처음이라 조금 긴장되었다.
의사도 그 기분을 아는지 위로랍시고 한마디 던졌다.
"걱정 말게나. 모든 일이 그저.. 나쁜 꿈처럼 여겨 질 거야."
천장이 돌아간다. 겨우 잡고 있던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서서히 주변이 뿌옇게 변해갔다. 야남 의사의 웃음소리가 서서히 정신을 잃어가는 내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그 후. 오직 어둠만이 있었다.
* * *
꿈인지는 모르겠다.
피 웅덩이 속에서 늑대인지 모를 야수가 꿈틀거리며 나왔다. 너덜거리는, 벗겨진 피부의 기괴한 야수였다.
겁에 질린 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숨을 거칠게 뱉었다.
야수는 천천히, 내게로 손을 뻗어 내밀었다. 날카로운 발톱은 금방이라도 나를 갈기갈기 찢을 것 만 같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찰나.
....불꽃이 일었다.
작은 불꽃은 큰 불이 되어 야수의 모든 것 을 불태워버렸다. 야수는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다가 얼마 안 있어서 재가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체 의문을 떠올리기 전에 기괴한 난쟁이들이 이번엔 내 몸에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작고, 창백한 피부에 우는 듯한 외모의 난쟁이들. 그 난쟁이들은 나의 얼굴을 향해 몰려왔다. 마치, 죽은 자를 애도하듯이..그들은 울부 짖었다. 그리고 또 다시 의식이 희릿해지며..
꿈결처럼 가녀린 음성이 들려왔다.
"아아. 사냥꾼을 찾았군요."
* * *
야남의 아침. 이오셰프카 진료소.
눈을 뜨니 어두운 천장이 보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니 나에게 수혈을 하던 의사는 온데간데 없고 낡은 병실만이 보였다.
'어디 간 거지..'
어두컴컴한 병실은 붉은빛을 띄고 있었다. 정신이 몽롱하다. 아마도 조금 전에 받은 야남의 수혈 덕분이겠지. 몸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막하고 어두운 병실의 탁자 옆 의자 위에 새하얀 쪽지가 한장 놓여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다가가 쪽지를 집어 들었다.
[창백한 피를 구해라. 사냥을 완수하기위해.]
'창백한 피..? 그게 뭐지..'
의사가 수혈을 할 때도 창백한 피를 거론하였다. 창백한 피.. 나 같은 외지인이 알리가 없다. 아니 잠깐만.
그런데 글씨체가 묘하게 낯이 익는다.
'누구의 글씨일까..'
또 정신이 몽롱해진다. 깊게 생각해봐야 지금 당장 알 수는 없지만 가슴속에선 이 것은 사명이다라고 속삭이는 듯 하였다.
뇌리에 각인이 된 것처럼. 하지만 창백한 피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나는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문으로 다가갔다.
문 너머로 붉은 빛이 스며 들어 오고 있었다. 마치 나에게 이리로 나오라고 인도 하는 거처럼. 나는 조심스레 양손으로 문을 열었다.
철컥 끼이익.
적막한 병실에서 쇳소리가 난다. 나는 뚜벅뚜벅 계단을 밝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상한 존재들을 보았다.
[우어어.]
[우으으으]
깨지고 허름한 바닥. 그리고 바닥위로 꿈틀거리는 무언가.
마치 난쟁이 유령들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 작고 가녀린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억울하게 생겨서 귀엽기까지 하였다.
'이 것들은 뭐지..'
딱히 나에게 적대감을 표출하지도 않고 다가가서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 이승의 존재가 아닌거는 분명하다.
'일단, 이 곳을 빠져나가야겠어.'
나는 그들을 지나쳐 다른 병실로 나아갔다. 그리고 묘한 흥분감이 나를 감싸안는다.
찌걱찌적. 쩝쩝.
게걸스러운 포식의 광경이 펼쳐졌다. 코로는 깊은 혈향이 들어오고 눈으로는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보였다. 시체 속에는 나에게 수혈을 하던 휠체어 노인도 있었다.
검은 무언가는 환자와 의사로 보이는 시체들을 마구 파해치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수복히 감싼 검은 털들. 거대한 늑대였다. 덩치는 곰 만한게 이러한 늑대는 나는 본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반항조차 할수 없는 공포스러운 모습, 그 자체였다.
늑대는 먹던 걸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주변에 있는 혈흔들이 모두 늑대의 짓 이라는걸 바로 알 수 있는 모습 이였다.
'녀석은 아직 배고프다.'
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언가 무기가 될 만한걸 찾아보았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공격을 피할수 있는 침대들만이 눈에 들어올 뿐.
그리고 이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이리 냉정해 질수 있지.'
하지만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눈 앞으로 늑대가 거대한 발을 들어올려 나를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윽!'
몸이 붕 떠오르다 바닥에 떨어졌다. 사람 머리만한 발로 공격했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배가 뻥 뚫린 기분을 맛보며 바닥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가만히 당하진 않는다.'
나는 옆에 있던 장식장을 들어 올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채 들어올리기 전에 늑대의 2차 공격을 받았다. 늑대가 나의 옆구리를 물어뜯은 것이다. 늑대의 돌진과 같은 이 공격에 나는 약품들이 즐비한 수납선반에 부딪혀 쓰러졌다.
그리고 잠깐 정신을 차리려는 사이에 아랫배에 통증이 심해진다. 늑대.. 아니 커다란 야수는 거침 숨소리를 내뱉으며 나의 몸을 마구 유린하고 있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 이였다.
'세상에.. 치료받으러 온 병실에서 죽음을 맞이하다니. 야남에 온 게 아니었어.'
그것이 나의 마지막 생각 이였다.
* * *
사냥꾼의 꿈
향긋한 꽃 내음은 내 코를 간질였다.
부드러운 흙의 감촉. 살랑 이는 바람소리. 나는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커다랗고 창백한 달. 그리고 달 아래로는 작은 건물과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앞서 봤던 어두컴컴한 병실과는 대조적인 광경.
나는 단층으로 된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언덕위의 건물 아래에는 인형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은색 머리칼에 사람보다 약간 더 큰 인형은 아름다운 외모를 하고 있었다.
'인형..'
[우으으으]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꿈틀거리는 난쟁이들이 보였다. 그들의 손에는 접이식 톱날무기와 총이 들려있었다. 다가가 손을 내밀자 무기를 나에게 넘겼다.
'이 녀석들은 뭐지..'
"그들은 사자(死者)들이라네. 무기를 받았으면 이리로 들어오지 않겠나."
건물 내부에서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자의 말대로 계단을 올라 열려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타닥타닥.
벽난로의 장작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주황색으로 빛나는 방안에는 수복히 쌓인 책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 중 쪽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사냥꾼의 악몽에 사로잡혔다면 야수 병의 원인을 부숴라. 그렇지 않으면 밤은 밝아오지 않는다.]
쪽지에서 눈을 떼자 방 가운데에는 휠체어에 앉은 늙은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검고 낡은 모자를 쓴 백발의 노신사였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의문을 그에게 표출하였다.
"당신이 나를 이리로 데리고 온 겁니까?"
"아하, 자네가 새로운 사냥꾼인가보군."
"사냥꾼..?"
"사냥꾼의 꿈에 온 걸 환영하네. 한동안 여기가 자네의 안식처가 될 꺼야."
"사냥꾼들이 방문하는 곳이란 얘기인가요?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
"나는 게르만이라고 한다네. 자네 같은 사냥꾼들의 친구이지."
"이해를 못하겠군요. 전 방금 죽었는데.."
"안개 속을 걷는 기분 일테지.. 아직은 자세히 알지 못 할 테지만 너무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어. 생각해도 답은 떠오르질 않을 테니.. 무기는 받았는가?"
"...아.. 뭐 받았습니다만.."
"그 무기로 나가서 야수들을 좀 사냥 하게나. 다 자네 좋으라고 하는 거야."
"이 걸로 야수들을.. 사냥하라는 말인가요..?"
나는 접이식 톱 무기를 펼쳤다. 붕대로 감겨진 톱날무기가 펼쳐지자 길이가 내 어깨까지 오는 듯 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야수들에게 크게 한방 먹일 수 있을 거 같았다.
"이 무기는 뭐라고 부르죠?"
"톱단창이라고 한다네. 어떠한가 마음에 드는가?"
"방금처럼 어이없게 죽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로군."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스스로 게르만이라고 소개한 늙은 노인은 웃으며 손을 뻗어 작업대 가리켰다.
"한때 여기는 사냥꾼들의 안식처였지. 사냥꾼들이 피를 이용해 무기를 만들던 공방工房이야. 예전처럼 무기나 재료가 많지 않지만 여기 있는 것들을 마음껏 써도 좋다네. 원한다면 인형도 말이지."
나는 건물 계단 아래의 인형을 떠올렸다. 그 인형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 곳이 대충 어떤 곳인지는 알거 같았다. 야남엔 야수들이 많았고, 그런 야수들을 사냥하는 사냥꾼들도 분명 존재 했다. 이곳은 그 사냥꾼들을 위한 장소였던 것이다.
"그 일이 창백한 피와 관련 있는 건가요?"
내가 질문을 하며 앞을 보자 어느새 노인은 없고 뿌연 안개만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건물을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우으으으으]
비석에 자리잡은 난쟁이들이 이리로 오란 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비석에서 진료소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나는 이 비석이 사냥꾼의 꿈과 진료소랑 연결된 통로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신비한 곳이로군. 그럼 한번.. 가볼까?"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정신이 서서히 몽롱해져갔다.
[우... 우.... 으...]
난쟁이들의 우는 소리도 점점 희미하게 들려온다.
아마 이동중이리라.
진료소를 생각하니 덩치큰 늑대가 떠올랐다.
나는 결심 한 듯 이를 악물었다.
'더는 죽을수 없다.'
나의 의식은 밝은 빛과 함께 서서히 사라져간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듯, 내 의식은 어두운 야남의 진료소에서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