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추천으로 멋모르고 시작한 파판6가 제겐 파판 시리즈의 첫 입문작이었습니다.
그땐 일본어도 몰랐고 더욱이 RPG라는 장르 자체에 문외한이기도 했지만 당시 파판6는 저에게 신세계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렇게 빠져 들기 시작한 파판 시리즈는 제 게임 라이프에서 있어서 항상 필수요소가 되었습니다.
꼬깃꼬깃 용돈을 모아 18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구입한 파판7에 날 세는 줄 몰랐고
인기가요 1위곡보다 아이즈 온 미가 더 친숙했으며 복귀시간을 코 앞에 두고 직거래로 구입한 파판9을 부대로
어떻게 하면 밀반입할 수 있을까 고심했고 아론 형님의 이제부터 너희들의 시대다를 입에 달고 다니다시피 했습니다.
그렇게 파판 팬보이가 된 후 지금껏 단 한번도 파판을 게임 라이프에서 떼어낸 적이 없었는데
그런 저에게 파판13(이라고 쓰고 라이프닝 판타지라고 읽는)은 악몽 그 자체였습니다.
사실 13 오리지널까지는 별반 문제 없었습니다.
저같은 진성 팬보이에게는 13의 여러 단점들도 파판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여전히 옥의 티에 불과했으니까요..
이때까지만해도 파판13은 저에게 있어서 그다지 다를 게 없는 언제나처럼의 파판이었습니다.
하지만..
13-2와 라이트닝 리턴즈까지 겪게 되면서 처음으로 파판이라는 브랜드에 진절머리가 나게 되더군요.
라이트닝 성애자 하나가 애캐 하나 띄워주자고 작정하고 만든 파판이란 이름을 가져다붙인 괴작에 정말 학을 떼고 말았습니다.
수십년 넘는 게임 인생에서 파판의 진성 팬보이를 자청하며 살아온 제가 이 3편의 괴작들을 겪고 나서는
한순간에 완전히 파판 시리즈에서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파판 관련 신작 소식이 들려와도 무시하기 일쑤였고 혹시 토리야마 모토무라는 이름을 듣기라도 하면 이를 갈았습니다.
그렇게 파판은 제 게임 인생에서 완전히 잊혀지는것 같았습니다.
이번 파판15편을 시작하게 된 이유도 예전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이전까지만해도 당연히 앞뒤 안 가리고 구입했을텐데 이번에는 그저 딱히 할만한 게임이 없어서 그냥 속는 셈치고 사서
대충 엔딩만 보고 후딱 팔아버릴 심상에서였습니다.
이전처럼 뭔가 기대감을 가지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파판이라는 제목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더군요.
그렇게 시작하게 된 15편의 첫 인상은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처음 몇 시간 동안은 그저 무덤덤하게 플레이만했는데 플레이 타임이 점점 늘어날수록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어느새 플레이 타임 2~30시간을 넘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완전 몰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투가 너무 재밌었고 땀내나는 남정네 파티 따위라며 무시했던 녹티스 일행들의 대사에 언제부터인가
낄낄대며그 분위기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맵 이곳저곳을 레갈리아를 타고 다니며 경치 구경하는 재미에 빠졌고
캠프에서 이그니스의 요리로 눈호강하며 경험치 정산하는게 어느샌가 낙이 되어버렸습니다.
분명 단점들도 느껴졌지만 그런것 따윈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집 나간 파판이 돌아왔는데 그런것 따윈 다시금 스물스물 기어나오기 시작한 진성 팬보이 기운 앞에
전혀 문제될거 하나 없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8장까지 쉼없이 달려오는동안이 너무나도 즐거울 따름이었습니다.
퇴근시간은 언제나 달달한 커피 한잔의 여유와 파판이 함께 했습니다.
"역시 스퀘어구나. 그럼 그렇지 역시 파판. 그래, 파판 아직 안 죽었다."
그런데 그렇게 즐겁던 15편도 9장을 접어들면서 뭔가 이건 아니다 싶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과연 내가 8장까지 진행해 온 그 게임이 맞는건가? 싶을 정도로 저하된 퀄리티가 속출하기 시작했고
그래도 에이 설마하는 마음에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계속해서 진행을 해오다가 결국 리바이어선과의 전투에서
풍선 바람 빠지듯 맥이 탁 풀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루나의 허무한 죽음에서는 실시간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더군요.
"야이 xx 지금 뭐하자는거야.."
그때부터 간신히 부여잡던 맨탈이 나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는 재미고 뭐고 그저 클리어를 목적으로
목석처럼 앞으로만 나갔습니다.
아무 의미없는 열차 내부 탐험에 코웃음쳤고 악몽같았던 13 챕터에서는 정말 2초에 한번씩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어서 빨리 엔딩을 보고 이 긴 악몽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내가 이러려고 파판을 샀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그렇게 하루 빨리 게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도망치듯 서둘러 엔딩까지 진행했고
엔딩이 진행될때도 그저 덤덤하기만 했습니다.
전 그때까지 여전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엔딩을 보고 난 후 무언가 기분이 찝찝하더군요..
화장실에서 나올때 제대로 뒷처리 못하고 나온 기분이랄까..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출,퇴근길에 시간나는데로 틈틈히 15편 관련글들을 찾아 보기 시작했습니다.
킹스글레이브와 브라더후드도 다시 시청하며 뭔가 놓친 부분은 없었는지 찾아보기 시작했고
15편 관련글이 올라온 블로그 등을 일일히 검색하며 그곳에서 게임상에서 좀처럼 알 수 없었던 설정들과
관련 내용들에 대한 해석들을 모조리 챙겨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게임속에서 부족했던 부분들을 이런 식으로 하나둘씩 채워나가기 시작했고
그러자 무언가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는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우연찮게 다시 보게된 엔딩 장면은 정말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스탠 바이 미가 울려퍼지며 그동안 찍어왔던 게임 속 사진들이 나열될때 무언가 가슴 한쪽이 아련해지더군요.
분명 한번 본 장면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줬습니다.
그런 기분은 마지막 캠프 장면에서 울먹이며 내뱉는 녹티스의 한마디에서 절정으로 치달았습니다.
"나.. 각오하고 왔지만 너희들 얼굴을 보니까 너무 두려워"
언제나 강해지지 않으면 자신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희생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아야 했고
이로 인해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감정을 숨기다보니 항상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녹티스의 본 모습은
너무나도 불친절했던 스토리텔링에 가로막혀 유저들에겐 그저 불평 많고 생각없는 철부지처럼 보이기만 했을겁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왕으로서 자신을 희생해서 왕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인간으로서의 감정 사이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고뇌했던 녹티스의 모습을 이 장면에서만큼은 정말 잘 표현해준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긴 스탭롤 후 레기스 국왕의 내레이션과 함께 파판 시리즈의 전통적인 메인 테마를 배경으로 루나와 녹티스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누가봐도 본 편의 내용과는 다른 다분히 작위적인 연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그 장면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정말 입고 싶었지만 입을 수 없었던 그 웨딩 드레스를 입고 있는 루나 프레나의 환한 미소와 함께 마지막까지도
자신과 동료들을 사지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고 결국 자신을 희생해서 이오스 대륙에 진정한 아침을 전해준
녹티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감정이 복받쳐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멋진 장면을 불친절한 스토리텔링에 막혀 뒤늦게 이제서야 제대로 느낄 수 밖에 없었다는 현실이
너무나도 아쉬웠습니다.
분명 스토리텔링 자체는 엉망이었지만 그로 인해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을뿐 이번 15편의 스토리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어째서 이런 멋진 내용들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습니다.
솔직히 이번 15편은 팬보이들이 그렇게 원했던 우주 명작 최다 고티 작품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안티들이 그렇게 입에 거품 물고 부르짖던 망작 게임 또한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굳이 점수를 매겨야 한다면 현재의 메타스코어가 가르키는 80점대 게임이 가장 적당하겠지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에게만큼은 사라졌던 파판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불러 일으킨 특별한 작품이었습니다.
분명 미완의 작품성을 보여줬고 부족함이 장점을 덮을 정도로 아쉬운 작품이었지만 그 아쉬움 속에서도
다음 작품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는 이번 15편이 너무나도 고마웠습니다.
두서없이 적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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