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저녁밥을 다 먹은 소녀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는지 파동이 눈에 띄게 안정적이 되었다. 동물이 먹이를 주면 마음을 연다는 이야기는 들어봤는데, 이 소녀도 그 정도 수준인 모양이다.
"다 먹으면 물어볼 거라 했지? 넌 도대체 뭐야. 왜 남의 거처에 들어온 거야."
하지만 소녀는 말이 없었다. 나는 괜스레 짜증이 나서 일어나 적당한 힘으로 소녀를 걷어찼다. 소녀는 손발이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채로 동굴 안을 뒹굴뒹굴 굴렀다.
"악! 뭐, 뭐 하는 짓이야!"
소녀의 외침이 동굴 안을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말 없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배가 고픈 탓일까. 왠지 모르게 열 받는다. 소녀의 파동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잘해주면 기고만장해지고, 때리면 무서워하고. 정말 단순하다.
"마, 말할게! 말한다고!"
소녀는 며칠 전 소녀를 포함하여 총 네 명의 동료들과 함께 마계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자마자 흉폭한 몬스터들에게 습격을 받고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흩어진 동료들을 찾기 위해 헤매다가 피곤과 공복이 몰려와 쉴 곳을 찾다가 발견한 곳이 이 동굴이었단다.
"다른 아이들을 찾아야 해! 다들 아직 어리고 순진한 애들이라 어디서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남의 거처에 잘못 들어와서 기절하고 묶인 다음에 바닥을 구르고 있는 녀석이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모로 상관하기 싫은 녀석이다.
"너! 내 친구들을 찾는 것 좀 도와줘!"
내 이름은 너가 아니다. 나는 소녀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 누웠다. 물고기 맛을 보지 못한 배가 꼬르륵 하고 울부짖으며 밥을 달라 보챈다. 내가 왜 이런 녀석에게 내 저녁을 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좀 미쳤었나 봐. 나는 배고픔을 잊기 위해 잠을 청하였다.
하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배고픔이야 익숙해져서 잊고 잘 수 있었다. 바닥이 딱딱한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야! 내 말 무시하지 마!"
... 하지만 시끄러운 건 익숙지 않다. 그리고, 내 이름은 야가 아니다. 나는 팔을 베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울퉁불퉁한 돌이 내 팔을 찔러댔다.
"야! 아저씨! 이것 좀 풀어달라니까!"
시끄럽다. 그리고 내 이름은 아저씨가 아니다. 소녀는 한참 동안 혼자 떠들다가 제 풀이 지쳐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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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그락카락의 숲 속. 이제 갓 10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년과 그 세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세월을 지낸 남성이 계곡 옆 바위 위에 앉아있었다. 소년과 남성의 손엔 기다란 낚싯줄이 잡혀있었는데 그 옆에 놓인 바구니에 물고기가 얼마 없는 것을 보아 낚시가 잘 되는 날은 아닌 모양이다.
"스승님."
소년이 길다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고개는 여전히 낚시대의 끝을 향하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이게 뭐가 재밌다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소년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직 어린 소년에게 낚시는 지루한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에 틀림 없었다. 스승이라 불린 자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어허. 튀어나온 입을 보아하니 네가 얼굴로 붕어를 낚았구나."
"놀리지 마십시오. 어차피 보이지도 않으면서."
스승의 두 눈은 두꺼운 안대로 꽁꽁 싸매어있었다. 장님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눈이 보이는 듯 정확히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냐. 확실히 보인다."
"... 거짓말."
소년은 거칠게 낚싯대를 집어 던졌다. 풍덩 소리를 내며 계곡물을 쳐낸 낚싯대는 계곡을 따라 둥둥 흘러갔다. 스승은 눈길로 낚싯대를 쫓았다.
"사물은 눈으로 보는 것 이지만 눈으로만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
"눈을 감은 채로는 사물을 볼 수 없지 않느냐. 네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눈을 감고 사물을 보려는 것과 같다. 마음을 열면 많은 것이 보이고 느껴질 것이야."
소년은 말 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모습에 스승은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어린 아이에겐 어려운 말일지도 모른다.
"눈으로만 보는 낚시는 재미없는 것일 뿐이지. 눈조차 보이지 않는 우리들에겐 더더욱 지루한 일이라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달라. 계곡 속에 물고기들의 움직임, 헤엄치며 흐트러뜨리는 물의 파동이 모두 보이니까. 이만큼 재밌는 일도 없지. 열심히만 한다면 너도 곧 알게 될 게다."
"... 네."
소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은 만족스러운 듯 허허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보다 네 낚시대가 떠내려가는데 잡지 않을 생각 이느냐. 나는 분명히 내가 잡은 물고기는 놔주겠다고 하였느니라."
"네? 아!"
소년은 황급히 계곡으로 뛰어들었다. 이대로라면 스승과 둘이서 하루 동안 쫄쫄 굶을 게 눈앞에 선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년에게 계곡물을 따라 흘러내리는 낚싯대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스승은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볼 뿐이었다.
"허허. ....아. 너무 멀리는 가지 말거라!"
스승이 소년을 향해 말하였지만 멀리 떨어져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소년은 점점 더 계곡 아래쪽으로 향하였다. 어느새 멀어진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소년은 멀리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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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 세실?"
나는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낸 주인의 목덜미를 잡아 눌렀다. 아직 작은 몸집의 주인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이미 제압당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짙게 살기를 뿜어내었다.
"그 이름, 어디서 들었지? 말 해."
"컥, 커헉...!"
나는 제압한 목덜미에 힘을 조금 빼었다. 그러자 숨을 토해내는 듯한 거친 소리와 함께 소녀의 격동이 느껴졌다. 또 다시 소녀의 파동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하지만 나는 말을 할 정도의 힘만 뺏을 뿐 소녀를 풀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 안대... 안대 옆에..."
"안대?"
나는 내 눈을 가린 안대를 만져보았다. 이 안대는 어릴 적 나를 구해준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다. 아마 이 안대 어딘가에 내 이름이 적혀있는 모양이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나는 소녀의 목덜미에서 손을 뗐다.
"컥... 콜록, 콜록!"
갑작스럽게 산소와 만난 소녀의 폐가 갈망하듯이 산소를 원하고, 그에 반동으로 소녀는 고통에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약간의 죄의식을 느꼈지만 별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무방비하게 남의 거처에 온 것부터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먹을 것도 주고 하룻밤 재워줬으면 감사하다 못해 절을 해야 할 상황이다.
나는 소녀에게 다가가 소녀를 묶었던 줄을 칼로 끊었다. 소녀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이쪽을 노려보는 듯 했다. 나는 파동으로 누구만큼 볼 수 없기 때문에 표정이나 얼굴은 자세히 알아보지 못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가."
나는 소녀의 등을 발로 살짝 밀쳤다. 그리고 모닥불의 잔재를 동굴 구석에 쓸어 넣고 동굴을 나왔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거기에 계속 남아있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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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은 간단히 나무 열매로 때웠다. 하지만 도저히 열매로는 채울 수 없는 배고픔이 느껴졌다.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매우 신경이 많이 가고 귀찮은 작업이지만, 어제 저녁을 굶은 탓에 배고픔을 원동력 삼아 적극적으로 사냥했다. 결국 난 점심시간쯤에 사슴 한 마리를 등에 이고 거처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것과 다시 마주쳤다.
"..."
"어? 뭐야, 왜 이제와! 배고파 돌아가시는 줄 알았잖아!"
어제 오늘 사이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나 생각해봤는데 애들은 일단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갔을 거라 생각해! 그니까 날 마을로 안내해 줘!"
"... 나가."
나는 동굴 안쪽에 사슴을 내려놓고 소녀의 등을 밀쳤다.
"뭐, 뭐야! 마을로 가는 것만 알려줘!"
마을에 가고 싶어도 갈 수도 없고, 혹여나 갈 수 있다고 한들 내가 왜 굳이 이 이상한 소녀의 안내역을 맡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네가 알아서 가."
소녀는 억지로 동굴 안 쪽으로 들어가려 힘썼지만 이 연약한 소녀가 내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짜증난다.
나는 소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어린아이 비행기 태워주는 것마냥 들어올렸다. 소녀는 거세게 발버둥치며 저항했다. 도중에 발길질에 몇 번 맞았다. 짜증난다. 나는 손에 든 이 소녀를 바닥에 던져버릴지 동굴 밖 강에 던져버릴지 진심으로 고민하였다.
"악! 이거 놔! 사실, 사실 난 말이지..."
소녀는 잠시 발버둥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에 맞춰 나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짜증나고 귀찮긴 하지만, 이런 짜증나는 상황 속에서도 호기심이라는 게 일긴 일었다.
소녀는 이윽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길치란 말이야!"
"... 나가."
결정했다. 동굴 밖으로 나가서 강물에 던져야겠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대화의 여지가 없는 사항이다. 나는 발길질에 차이든 뭘 하든 상관하지 않고 동굴 밖으로 향하였다.
"익! 사람이 기껏 부끄러운 부분까지 보여줬는데!"
"부끄러운 부분 안 봤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러지 말고! 나 좀 도와줘, 세실!"
"..."
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아침엔 잘 느끼지 못했지만, 적대감이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세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려보는 게 얼마만인지. 나는 소녀의 얼굴이 있는 곳에 고개를 정확히 맞추었다.
소녀의 파동은 지극히 안정적이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그런 짓을 했는데 왜 이 소녀는 자꾸 내게 이렇게 붙는 거야. 순간 귀찮고 짜증난 감정 외에도 다른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호기심이 밀려왔다. 지금 이 소녀는 무슨 표정을 하고 나를 보고 있을까. 나를 구해준 누군가 만큼 내 마음의 눈이 떠지지 않은 것이 무척이나 크게 다가왔다.
사랑? 은 아니지. 그것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무언가. 정확히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호감과 호감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 사이에 툭 하고 껴있는 듯한 기분.
"... 무슨 일이 터지면 바로 버릴 거니까."
나는 소녀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왠지 강물에 던져버리지 않은 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와주는 거야? 아싸! 아 맞다. 내 이름은 하루야. 잘 부탁해!"
하루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괜스레 그 손을 하이파이브하듯 찰싹 하고 가볍게 쳐냈다.
"... 나가서 장작이나 구해와. 밥 먹을 거니까."
"알았어. 장작 말이지? 나 그런 거 잘해!"
소녀는 동굴 밖으로 활발하게 뛰어나갔다. 왠지 그 뒤통수를 한 대 후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왜 저런 애를 도와준다고 한 건지...
별다른 변덕이 분 건 아니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알아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 그런 거야. 이 이상 이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는 없다. 나는 사슴을 손질하기 위해 작은 칼을 꺼내 들며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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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려니까 글이 잘 안 써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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