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옆에는 델마가 비슷한 눈을 한 채 팔짱을 끼고 걸어오고 있었다.
패리스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아간조, 알베르트, 반과 미카를 차례대로 노려보았다. 미카는 패리스가 알베르트를 쳐다볼 때 그가 그녀의 눈을 피하는 것을 보았다.
패리스가 반의 앞에 섰다.
“내놔.”
미카는 패리스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반이 그의 팔을 잡아 눌렀다. 그 모습을 본 패리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반이 대답했다.
“이 애는 바깥에 다녀왔어. 게다가 출신도 불분명하고. 시궁창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제국에서 조사할 필요가 있잖아?”
“내놔.”
패리스는 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반이 혀를 차며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순간, 미카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미카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헉!”
챙
정신을 차려 보니 미카는 이미 공중을 날아가고 있었고, 반은 소검으로 패리스의 손에 들린 희한한 무기를 막고 있었다.
아간조가 미카를 받았다. 패리스의 눈이 그를 향했다.
“미카를 델마에게……. 큭!”
반의 소검이 그녀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안 돼지, 안 돼. 감히 내게 무기를 꺼내든 이상, 날 이기지 못하면 저 아이는 못 데려가는 거야.”
반이 재차 소검을 휘둘렀다.
미카는 당황하여 델마를 찾았다. 델마는 알베르트의 부상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녀와 알베르트 두 사람 다 패리스를 걱정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으악!”
델마가 알베르트의 다리를 꾹꾹 누르자 알베르트가 비명을 질렀다. 델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벌이야, 임마. 감히 미카한테 술을 먹여?”
“내가 안 먹였어!”
미카는 급히 델마를 불렀다.
“누나, 패리스 누님은…….”
델마가 무심히 대답했다.
“응? 아아, 패리스는 걱정 안 해도 돼.”
“무슨 뜻인가?”
너무도 태평한 그녀의 대답에 아간조마저도 의문이 드는 모양이었다.
“클로는 검을 상대하기 좋은 무기도 아닌데.”
“패리스는 이기기로 마음먹은 싸움은 안 져.”
델마는 여유가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베르트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지신 적 없다니까.”
알베르트의 말에 아간조는 흥미가 동했는지 반과 패리스를 주시했다.
여유로운 두 사람의 말과는 달리 패리스는 몰아치는 반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미카의 눈에도 누가 우위인지가 보일 지경이었다. 실력 차이는 너무도 명백했다. 아간조는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패리스의 손엔 어느새 바늘이 달린 병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날리는 동시에 다른 쪽 손으로 은밀히 그것을 휘둘렀지만 반은 여유롭게 그것을 피해냈다.
“나에게 암기 같은 건 안 통해!”
반이 소검의 손잡이로 병의 바늘을 부러뜨렸다. 패리스는 병을 던져 버리곤 발로 땅을 세게 밟았다.
콰앙
바닥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정녕 사람의 발이 낸 힘인지 의심스러웠다. 패리스는 돌조각을 하나 집어 들고 반을 향해 휘둘렀다.
반이 돌을 피하고 소검의 옆면으로 패리스의 손목을 내리쳤다. 패리스의 손에서 돌이 떨어지자 반은 그녀의 허리를 향해 소검을 휘둘렀다.
패리스는 짐승의 손톱을 닮은 무기를 교차시켜 검을 막았다. 반의 눈이 실쭉해졌다.
“제대로 해볼까.”
반의 팔이 순간 사라졌다.
눈으로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휘둘러진 검은 이미 패리스의 어깨를 베고 있었다.
“윽……!”
패리스가 당황해하며 어깨를 손으로 부여잡고는 뒤로 물러났다. 반이 비웃음을 지었다.
“길거리 싸움꾼이 역시 거기서 거기지. ……응?”
반의 눈이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향했다. 검에서 보랏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패리스의 어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델마가 당황해하며 아간조와 알베르트를 뒤로 잡아당겼다.
“일 났다. 피해!”
연기는 벌써 자욱하게 길을 덮고 있었다. 패리스가 말했다.
“방금 그 병, 내가 던지지 못하게 했어야 했어.”
반은 바늘을 부러뜨린 병을 떠올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무슨 병이지……?’
“뻥이야, 멍청아.”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자 이미 성냥에 불을 붙인 패리스가 그를 비웃고 있었다. 반의 얼굴이 구겨졌다.
보랏빛 연기 한 자락이 불에 닿았다.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들린 후에 보랏빛 연기가 걷히기 시작했다.
연기 속에는 새까맣게 그슬린 패리스와 반이 있었다. 반은 무릎을 꿇은 채로 연신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우웩, 우욱……. 켁!”
그런 그에게 패리스가 알약 하나를 던졌다.
“해독제다. 안 먹으면 죽어.”
반이 재빨리 알약을 집어 삼켰다.
“승패가 난 것 같군.”
아간조가 미카를 델마에게 넘겼다. 반이 충혈된 눈으로 아간조를 쏘아보았다.
“아직 안 끝났어요. 길거리 싸움꾼 따위 맹룡단공참으로 한번에…….”
“적당히 해둬라. 내가 참견할 생각이 들기 전에.”
그 말에 반은 입을 다물었다.
패리스가 어깨를 잡은 손을 떼었다. 보랏빛 연기가 피어오르자 그녀는 재빨리 다시 상처를 막았다.
“빨리 가서 지혈해야겠는걸.”
“그게 뭐야?”
미카가 물었다.
“혈관을 흐르는 맹독. 내 친구가 시술해준 독술이야. 그보다 너…….”
패리스가 미카의 볼을 꼬집었다.
“밤에 누가 맘대로 나가래? 안 봐도 뻔하다, 이 자식들아. 또 숲에 갔다 온 거지?”
“아으으으…….”
델마가 패리스의 손을 떼어냈다.
“미카는 내가 꼬집을 거야. 넌 알베르트나 두들겨.”
패리스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의 상처를 막느라 한쪽 팔밖에 못 쓰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알베르트의 멱살을 잡았다.
“임마, 머리 굵어지니까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지?”
“……끙.”
알베르트가 축 늘어졌다. 패리스는 무심하게도 그의 멱살을 잡은 채로 이리저리 흔들었다.
“뭐야. 죽었나?”
“아뇨, ……지쳐서.”
패리스는 알베르트의 팔에 난 멍들을 보았다.
“이거 아주 떡이 됐는데. 우선 치료하고 때려야겠다.”
어쨌든 때리긴 할 모양이었다.
“밖은 나갔지만 숲은 안 갔어!”
“거짓말 하지 마!”
알베르트와 패리스가 싸우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온몸에 붕대를 친친 감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패리스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밤에 몰래 나가서 아간조하고 피떡이 되도록 대련을 했다고? 말이나 되냐, 그게! 미카, 솔직히 말해! 어젯밤에 숲에 갔지?”
델마가 떠주는 맛대가리 없는 멀건 죽을 침대에 앉아 받아먹던 미카가 고개를 저었다. 패리스의 집에 돌아온 어제 아침부터 지금까지 꼬박 네 끼를 죽으로 때운 탓에 심기가 매우 불편해져 있었다. 다치지도 않았는데 대체 왜 환자 취급을 하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안 갔어.”
패리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너까지 계속 거짓말 할래!”
“누나, 누님이 자꾸 거짓말이래…….”
미카가 델마에게 안겨들었다. 델마가 패리스에게 소리쳤다.
“패리스! 미카가 아니라잖아!”
“아니긴 뭘 아니야! 미카, 너 지금 이놈 감싸는 거야? 너희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냐?”
미카는 속으로 찔리는 게 있어서 패리스의 눈을 피하다가 알베르트와 눈을 마주쳤다. 알베르트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미카는 그의 목에 걸린 카시야스의 이빨을 보았다.
그는 알베르트가 어제 헤어지며 속삭인 귓속말을 떠올렸다.
‘날 도와주면, 내 목걸이에 걸린 이빨로 카시야스를 불러서 네가 있던 곳이 마계인지 확인해 줄게.’
몰래 맺은 밀약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대에 찬 눈으로 알베르트를 쳐다보았다.
“이놈 뭔가 기분이 좋나 본데……?”
패리스가 미카의 볼을 잡았다. 미카는 콧방귀를 뀌며 시치미를 뗐다.
“흥. 기분 하나도 안 좋거든.”
“모르는 모양인데 넌 기분이 얼굴에 다 보여.”
“맞아. 미카는 착하고 솔직해서 다 드러나.”
델마가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패리스는 미카와 눈높이를 맞추고 지긋이 노려보았다.
“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안 좋다니까!”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라드에 온 이후로 기분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짐승 고기보다 맛없는 죽을 억지로 먹이니 좋던 기분도 날아갈 판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가 품은 감정은 기대였다.
“몰라, 알베르트하고 밖에 나가 놀 거야.”
“안 돼, 너희들 밖에 같이 나가는 거 금지야.”
패리스가 눈을 부라렸다.
“둘이 같이 있는 거 눈에 띄기만 해 봐. 미카 넌 침대에 묶어놓고, 알베르트 넌 숲에 묶어서 던져 놓을 줄 알아.”
미카가 소리쳤다.
“누님은 나만 못살게 굴어!”
“내가 돌보는 애가 너밖에 없어.”
“알베르트가 사도한테 내가 살던 곳이 마계인지 확인시켜 주겠다고 했단 말야!”
알베르트가 당황해했다.
“야, 그걸 말해 버리면…….”
“뭐라고?”
패리스의 어조가 갑자기 매서워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
미카는 패리스가 갑자기 사나워지자 움찔했다. 그녀는 정말로 화가 난 듯했다.
“사도를 부르겠다고? 알베르트, 너 제정신이냐? 대전이로 다들 힘들고 불안해하는 이 시기에 그런 위험한 짓을 하겠다고?”
알베르트가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카시야스는 닥치는 대로 죽이고 보는 사도가 아냐. 그리고 진짜 카시야스를 부르는 게 아니라…… 이걸로 소환할 수 있는 건 해봤자 분신뿐이야. 누님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
“닥쳐! 만에 하나라도 본체가 튀어나오면 어떻게 할 건데? 그리고 분신이라면 이길 수 있냐? 떡이 되고 다리가 분질러져도 아직도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델마가 미카의 귀를 감쌌다.
“사도는 믿을 존재가 못 돼. 그것도 대전이라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 지금 상황에선. 만약 사도가 우리를 공격하면 어떻게 할 건데? 사도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어. 제발 네가 수습하지도 못할 일은 만들지도 마라.”
알베르트는 주먹을 꽉 쥔 채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담긴 것은 분노나 슬픔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걱정을 담은 눈으로 패리스의 뒤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패리스는 아차 싶었다.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굵직한 눈물을 흘리며 델마의 손을 뿌리치는 미카가 있었다.
“제발…….”
흐느끼는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제발 확인만 하게 해줘…….”
소매로 계속 훔치고 있었지만, 닦고 또 닦아도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앞으로 말 잘 들을게. 말대꾸도 안 할게. 비꼬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꼭 확인하고 싶어…….”
패리스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미카. 사도는 차원이 다른 문제야. 널 정말로 돕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 미안해. 사도는 안 돼.”
미카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패리스를 보았다. 패리스는 속이 쓰라렸다.
미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델마와 패리스의 눈이 마주쳤다. 델마는 이불 위로 미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패리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베르트가 침대로 걸어와 몸을 기울여 이불을 걷고 미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와줘서 고마웠어, 미카.”
그러고는 뒤돌아서 방을 나섰다.
패리스와 델마는 한참 동안 미카를 쳐다보다가, 등을 토닥이고는 함께 방을 나섰다.
그녀들이 문을 닫자마자 델마가 패리스에게 외치는 잔소리가 들렸다. 패리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미카는 눈가에 남은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었다. 그리고 손 안의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미카는 알베르트가 몰래 쥐여 준 카시야스의 이빨을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이 힘차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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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선 이미 미카와 솔도로스가 싸우고 있는데..
글쓰는 속도가 빨라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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