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
● “작가님, 이메일 보셨죠? 저희 ‘살아가는 것의 슬픔’
꼭지 있잖아요. 이사가 이번 주제에요. 작가님이 평소에 쓰
시던 글이랑도 진짜 잘 맞을 것 같고.” 나는 짜증이 옅게
스치는 작가의 표정이나 “아, 네.” 공기 반 말 반의 비웃음
이 감춰지지 않은 추임새를 듣고 이건 아닌데, 단추를 잘
못 끼웠네, 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한번 나오기 시작한 말
은 낙수처럼 끊이지 않고 태연히 밀려 나온다. “제가 오기
전에 사전 찾아봤는데, 이사한 첫해에 열리는 박은 남과
노나 쓰지 않느다면서요? 옛날 속담들 참 재밌어요, 그죠?
저는 첨 들어보는 속담인데 작가님은 들어 보셨어요?”
○ 나는 내가 그와 같은 사전을 썼으며 (아마도 그도 네
이버 국어사전에 검색을 했을 것이므로,) 내가 강박적으로
‘이사’를 검색해 보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와 똑같은 속담
을 보았고, 똑같이 옛날 속담 참 재밌다 생각했으며, ‘이사’
의 상위어에 ‘이동’, 그리고 비슷한 말에 ‘퇴거’, ‘집들이’, ‘전
거’, ‘이주’, ‘냑향’, ‘망명’, ‘이거’가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
말들을 써 놓고 각각의 이동 방향이 ‘밖’인지 ‘안’인지 화살
표를 그려 보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한 말들이 출판사
직원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인사치레인데도 짜증이 치
밀어 올랐다. 중요하지 않은 비밀을 굳이 헤집히기라도 한
양 치욕스러웠다. 말주변 없는 나를 배려해 조금이라도 더
견딜 만한 미팅을 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한 것일 텐데. 거
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짜증이 가시기는커녕 죄책감까지
더해져 마음이 더 언짢아진다.
● “어, 점심은 드셨어요?” 하고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면
서 슬쩍 올려다본다. 한번 올라온 짜증은 쉽게 가실 것 같
지 않아 보였다. 옵션을 잠깐 저울질해 본다. 계간지 이번
호에 실릴 그의 글에 대한 미팅이기만 했다면 이대로 그냥
빨리 마무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호 관련
언질을 주어야 했고, 무엇보다 작년 말 신인상을 받은 사
람이므로 올해 상반기 안에 새 시집이 나올 것이다. 내 업
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오늘 코멘트가 달린 원고
를 전해 주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괜히 기분이 어긋난 채
로 미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업무와 내 업무가 아닌
것의 구분은 이런 식이다. 내 업무가 아닌 것을 나에게 맡
기고, 수틀리면 책임은 내가, 그러나 내 업무가 아니므로
일이 잘 풀려도 나에게는 어떤 크레딧도 주어지지 않는다.
왜 원룸 월세, 관리세, 전기세, 병원에 매달 들어가는 돈,
이런 것들이 이럴 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에 넘실
대는지 모를 일이다. 마치 미팅을 망치면 그런 삶의 세를
치르는 일에 차질이라도 생길 것처럼. 마치 이것이 망칠 수
있는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망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내
가 해야 할 일은 이번 호의 한 꼭지의 주제가 ‘이사’니 그에
관한 원고지 10~15매 정도의 짧은 에세이를 써 달라, 다
음 호에는 신진 작가 특집이 있으므로 시 두 편을 미리 부
탁드리며, 주제는 따로 없으나 마케팅의 일환으로 현재 편
집 작업 중인 시집의 표제작「나는 노인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지만」을 실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신지, 그러니까 다
른 시도 나이 들어 가는 것이나 바다에 관련된 것이 좋겠
다, 편집부 올림, 그런 것들이다. 오차가 나면 안 될 일도,
애초에 오차가 있을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 간단한 전달이
돌덩이처럼 무겁다. 작가는 나랑 비슷한, 오히려 나보
다도 더 을일 뿐인데. 갑을이야 상대적인 것임을 알면서도,
한번 나는 을일까, 생각이 드니까 모든 행동이 실에 꿰인
것처럼 부담스럽다. 작가님, 점심은 드셨어요 하기에는 시
간이 너무 애매하다. 오후 4시. 아니, 벌써 물어봤던가? “작
가님, 무슨 일 있으세요?”
○ 나는 일곱 살 때 엄마와 뉴질랜드로 가게 되었다. 이
사 가게 된 것이 아니고, 가게 되었다. 가게 되었으므로, 이
사를 해야 했을 뿐이다. 가는 것과 이사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이사는 가게 된 일의 결과, 실행 계획, 찌꺼기일 뿐
이다. 설레기도 하고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가는 것은 아
무래도 좋았다. 아니, 떠나는 것은 항상 좋았다. 어디로 가
는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사하는 것은 고통
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피와 살로 되었음을 대대적으로 리
마인드해 주는 것. 나는 이사가 정말 싫었다. 이삿짐을 꾸
리면서 나오는 것들에 구역질이 났다. 평소에 쓸 때에는 얌
전히 제자리를 차지하던 것들이 이사할 때만 되면 두 배로
무겁고, 두 배로 구질구질하고, 두 배로 쓸모없이 느껴졌다.
전 애인의 물건을 정리해 버릴 때에는 슬픔, 증오, 기쁨, 시
원함, 섭섭함 따위의 감정에서 오는 일말의 쾌감이라도 있
지, 자신의 물건을 정리한다는 것은 혐오스러운 일이다. 그
걸 미리 알았다면 일곱 살 때 나 자신에게 조금 관대했을
텐데. 씻어도 미끌거리는 비누통, 변기 청소용 긴 솔, 욕실
청소용 짧은 솔, 새것은 두고 닳은 것만 써서 너덜너덜 만
신창이로 더러운 매직스펀지, 수없이 삶아 부드럽지 않은
수건과 속옷, 등이 갈라진 책들, 그을리고 녹은 자국이 있
는 국자, 모아 놓은 비닐, 모서리가 흐물흐물한 쇼핑백, 여
러 번 타서 거뭇거뭇한 냄비들, 짝이 맞지 않는 수저, 스트
레이너 한쪽이 부서진 수저통, 언젠가 쓸까 하여 찬장 구
석구석 끼워 놓은 찐득한 플라스틱 통들, 비대칭으로 마모
되고 전힌 곳마다 때가 낀 신발들, 먼지가 앉은 가구, 구슬,
레고, 팽이, 앨범이든 박스든 삐져나올 정도로 많은 편지
와 사진, 오랫동안 함께 누워 있었던 죽은 벌레들, 모든 것
이 기스가 나 있고, 짐을 쌀 때면 기스는 수술대에 오른 것
처럼 더 깊게 눈에 띄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술을 마시
면서 짐을 싸게 되었다. 나는 무슨 일 있냐는 이 사람의 말
에, 구구절절 송구함과 처연함을 피력하고 싶은 욕망에 사
로잡힌다. 나에게 이사는 ‘이사’가 아니라 짐을 싸고 푸는
거라고, 나의 삶은 이사에서 이동이 제거된, 짐을 싸고 풀
고 싸고 다시 푸는 것의 반복이었다고.
● 네. 네. 맞아요. 그럼요. 그렇게 할까요. 그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런가요. 음. 네. 그러니까요. 네. 아니요. 이건 그
렇게 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네, 아무래도 그렇죠.
그러면 저희야 편하죠. 네. 네. 네. 미팅은 생각했던 것보다
는 훨씬 부드럽게, 기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작가는 무슨 일
이 있냐는 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눈웃음을 치며 아뇨, 무슨 일은요. 지하철에 사
람이 너무 많아서 잠깐 멍 때렸네요, 죄송해요, 했다. 미팅
은 그렇게 끝이 났다. 작가는 먼저 일어났고, 나는 저는 좀
정리하고 갈게요, 했다. 작가나 나나 여기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했다. 아니, 뭔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항상 그런 것인지 오늘따라 그런 것인
지, 주섬주섬이라고 말하기엔 급하고 단숨에라고 말하기엔
뒤적뒤적했다. 가방 안을, 굳이, 지금, 조금이라도 정리를 해
야만 하는 사람처럼.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일
어나 조금이나마 머뭇거린 시간을 후회한다는 듯, 내 뒤의
어딘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조심히 가세요.”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간다. 그가 60~70편이면 충분할 시집
에 250편의 시를 보낸다든가, 작품의 편차가 너무 심하다
든가, 하는 것은 이미 직원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혀를 차
는 편집장 옆에서 그도 그 250편의 시, 1000장에 달하는
원고를 타르륵 넘겨 보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괴물을 의인
화한 것 같았다. 사람들이 없는 체하고 사는, 굳이 들춰 보
지 않는, 있어도 굳이 쳐다보지 않는, 그런 괴물 같은 것들.
나는 가방의 지퍼를 닫으며 약간의 안쓰러움을 느꼈다.
○ 저녁 약속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는다. 나는 걷기로
한다. 저녁은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먹었다. 친구는 이런 저
런 말들을 했다. 너 맘대로 써. 너 원래 그랬잖아. 전후좌우
없이, 내일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의 스타일에 어떤 열
등감과 동시에 확실한 우월감을 느꼈다. 평소와 다른 날은
아니었다. 원고를 청탁받고, 친구와 저녁을 먹고, 서로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몸을 사리면서도 마구잡이로 얘기를
하는 것. 별것 아닌 대화의 우연에 자신을 끼워 맞추면서
머릿속에서 굴려 보고 불안해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즐
거워하고.
● 나는 차로 돌아와 숨을 한번 몰아쉬었다. 바깥바람
은 시원한데 오후의 긴 태양에 달궈진 차의 시트가 오히
려 참을 수 없이 뜨거웠다. 글이 뭐길래 사람을 저렇게 신
경 곤두세우도록 하는지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나는 시동
을 걸고 에어컨을 켜고 B에게 전화를 걸었다. 4시 50분 도
착이라고 했던가? 이미 내리고도 삼십 분은 되었을 것 같
은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연착되었나? 비행기 도착 정보를
찾아볼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만둔다. B는 자신이 태어난
집에 부모님이 아직도 살고 계시고, 자신의 방이 그대로 있
다고 했다. 어렸을 때의 방이 거기 있다니. 그렇다고 해서
B가 아직 거기 살고 있는 것도, 그가 이사해 본 경험이 없
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B는 이사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상
관있는 일은 아니지만. 나는 B가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한
다.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있다니. 내 집은 내가 가
장 오래 살았던 곳인가? 내가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할머
니 집이ᄋᅠᆻ던가? 아, 아니, 내가 살았던 곳 중에 가장 오래
존재했던 집이 할머니 집이다. 재건축하긴 했지만 할아버지
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마 40년 정도, 어쩌면 60년은 되
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이제 공장이 있다. 대학을 졸업
하고 나는 가족들로부터 좀 떨어진 곳으로, 혼자 살 수 있
는 곳으로, 둘이 살기 위한 곳으로, 다시 혼자 살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해 왔다. 우선순위에 따라 잃을 수밖에 없
는 것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내 우선순의에 확신
이 있었다. 조금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불가항
력적이고 불합리만 믿음.
○ 거주를 목적으로 부동산을 소유하는 일이란 파트너
를 가지는 일과 비슷해서 일단 소유하고 나면 유혹이나 욕
심이 줄어든다. 자극에 덜 반응하고, 자극을 덜 찾게 된다.
욕심이 줄어든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길
들여 온 만큼 그것들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폭발할 때가
있다. 몸에 없었다면 이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몸이
없었다면 어떤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짐을 싸고, 이사업체를
알아보고, 이삿날을 잡고, 집 청소를 하고, 오클랜드 교외
의 텅 빈 집에서 이삿짐이 오기를 기다리고, 짐을 풀고, 짐
속에 아빠의 물건이 있을까 조마조마해하고. 그럴 일이 없
었을 것이다. 이사한 비선형 식의 적분과 비슷하다. A에서
B로 갔다가 A로 다시 돌아온다면 위치는 그대로지만 일은
직선거리 두 배 이상을 했을 것이다. 궤적만이 의미를 가진
다. 나는 내가 한곳에서 그다음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 이
유 (혹은 한 파트너에서 다음 파트너로 넘어가게 된 이유)
를 적어 보았다. 리스트를 보고 생각해 보니 이유가 다 달
라도 결국은 떠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어디로 가는지보
다는 어디에서 벗어나는지가 중요했다. 도착지는 토핑에 불
과했던 것이다. 나는 잠깐 이것이 정상적인 사고방식인지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고기 냄
새를 풍기며 지하철을 탄다. 나는 사실 이미 쓰고 싶은 글
이 있었다. 머릿속에 대충 형태도 잡혀 있다. 그것은 몸으
로부터의 이사다. 그러나 자꾸 부풀어 오르는 생각의 실체
는 그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실행하는 것이다. 아
니, 실행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야 하는 것일까? 아니, 실
행할 것을 글로 옮기는 것뿐이다. 실행하지만 않으면 그만
이다. 그러나 물론 실행한다는 믿음을 가진 상태여야 했다.
물론 나는 그렇게 리터럴한 인간이 아니다. 나는 작가일 뿐
이므로 호기로운 마음은 그저 마음일 뿐, 바글거리는 머
리를 끌어안고 책상에 앉아서 ‘몸으로부터의 이사’에 대한
‘글’을 쓰게 되겠지. 그러나 오늘따라 짙은 패배감이, 이번
에야말로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불순하고 간지러운 생각이
된다. 그것은 나를 감고 있던 억울하고 못생긴 마음의 끝
이 될 것이다.
● B가 일하는 이사업체는 국제화물을 주로 취급했는데
이번에 맡은 큰 이사는 대만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화
가로 추정되는 의뢰인의 스튜디오 짐을 싸는 데만 해도 아
트 핸들러 두 명과 B가 일하는 이사업체 인부 세 명, 화가
의 어시스턴트 한 명, 총 여섯 명이서 꼬박 8일이 걸렸다.
각자의 분야와 기준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조율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를테면 어시스턴트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작품의 분류다. 작게는 박스부터 박스가 고정되는 작은 크
레이트, 그리고 그 작은 크레이트가 들어가는 더 큰 크레
이트까지 각각의 컨테이너에 어떤 작품이 있는지 섬네일과
이름, 카테고리, 제작 연도를 인쇄해 붙이는 것이 그의 일이
었다. B와 회사의 입장에서는 (고객의 클레임을 피하고 이
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작은 크레이트를 큰 크레이트에 테
트리스처럼 잘 끼워 맞추는 것이 중요한데, 분류자 입장에
서는 당연히 분류된 대로 적재되는 것이 낫다. 일단 끼워
맞춰진 이후에 다시 꺼내게 되면 일을 두 번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자꾸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다. 고객
은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적은 돈으로) 일이 해결되기를
바라고 그것은 노동비를 지출하는 회사도 마찬가지다. 시간
과 수당, 부피당 가격과 부피당 가치 식의 지배 아래에 모두
가 무력하다. 최대한 빠르게, 최대한 적은 부피로, 최소한의
가격으로, 최적의 분류로. 당연하게도 이것은 생각보다 어
려운 일인데 작은 크레이트가 큰 크레이트에 들어가는 과정
에서 유동적인 변화가 많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지
막에 빠지기도 하고, 하나가 더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런 크
레이트들은 상황에 따라 언제 다시 열릴지 알 수 없기 때
문에 이런 식으로 유실되거나 ‘유실될 줄’ 알았던 작품들
이 종종 생기곤 한다, 가끔 최종_최종_최종,hwp와 진짜최
종_최종.hwp, 김정현_오늘이 다 가기전에_최종본.hwp 중에
서 뭐가 더 최종인지 다시 한번 읽어 보는 수밖에 없는 것
과 비슷하다. 분명히 그때는 나중에도 알아볼 수 있게 파
일명을 붙인 것 같은데, 몇 개월은커녕 몇 주만 지나도 헷
갈렸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일은 비슷하다고 나는 생각했
다. 하지만 B와 나는 정반대의 사람이다. B는 이런 식이다.
이사를 하면 모든 짐을 한쪽에 밀어 놓는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것만 꺼내서 당장 필요한 일을 한다. 만약 당장 필
요한 것이 아니라면 박스들은 다음 이사까지 그 자리에 그
대로 있을 것이다. 나는 자정에 호텔에 들어가 잠만 자고
체크아웃해야 하더라도 들어가자마자 여행용 가방에 있는
옷들을 다 옷걸이에 걸어 놓고, 치약과 칫솔은 화장실에,
책은 침대 옆 낮은 탁자 위에, 컴퓨터는 책상에 (충전기도
끼우고) 속옷은 서랍 안에 (한번 닦고 나서) 넣어 놓는 사
람이다. 뭐, 적어도 B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 그러던 중 앱 소에 펼쳐 놓은 소설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었다. “불타면 이렇게 되는구나. 색이 없어져.”* 빨
간 모자를 모티프로 쓴 스릴러소설에서 산불이 옮겨붙어
타 버린 집을 보며 주인공 중 하나가 하는 말이었다. 색이
없어진다는 것이 주는 만족감. 명도와 질감으로만 된 세상.
그것은 조금 덜 혼란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이거야. 색을 얿
* 김지연 소설,『빨간 모자』(고즈넉이엔티, 2019), 60쪽.
애는 것. 이것이 내가 찾던, 몸으로부터 이사할 수 있는 방
법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소멸이자 새로운 탄생이 될
것이다. 한번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모든 것이 아다리가 맞
았다. 나는 몸을 태우고, 색을 없애고, 완전히 소멸할 것이
다. 나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 몸 밖으로의 완전한 이사를
뜻한다고 확신했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궁극적인 이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몸을 태운다는 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
제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에 태운다는 건 말
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색깔이 없어질 때까지 블리치
되는 것은? 그것은 책상이 물결로 보일 때까지 술에 절여
지는 것 같은 비행이나 비정상에 연고를 두고 있는 일이다.
뭐, 적어도 B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2
◎ 저녁 먹었어?
○아니 아직 너는 뭐 먹고 싶어?
◎ 내가 맥캘란 가져왔어 그거 마시자 나 돈 하나도 없
으니까 5만 원만 보내 줘 택시 타고 갈 거야
○ 그래 나 좀 나갔다 올게 혹시 도착하면 먼저 들어가
있어
문을 열었을 때에 B의 피부가 효모의 호흡을 따라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세밀하게, 그러나 확실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후욱. 부글. 미지근하지만 분명하게 뜨거운 미생
물의 숨. 그들이 숨을 거두면 코를 찌르는 달콤한 시체의
냄새. 지방이 익는 아득한 감각. 설탕이 타는 저릿한 연기.
B는 뭐라고 뽀글뽀글 말을 했지만 여느 때처럼 나는 B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굳은 버터가 녹아 흘러내린 틈으로
켜켜 바스라지는 플레이크, 차갑고 부드러운 무스, 눈에
산미가 도는 젤리, 적당한 농도의 단단한 크림, 혈관 속의
아이싱, 뼈를 이루는 캐러멜. 그는 이제 그것들을 섞어 말
랑하게 굳힌 것. 그의 입술은 글레이징한 체리 같고, 그의
눈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 처음엔 누구라도 불러야 하나
싶었다. 그러기엔 너무 애매한 시간이다. 누군가 오더라도
괜한 의심만 사게 될 것이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가 열며
그의 얼굴을 베어 먹는다. 1000개의 나뭇잎이라고 했던가.
입에서 그의 볼이 아찔하게 부서진다. 지방의 부피와 망각
적인 맛이 혀를 찌른다. 차가운 초콜릿 무스와 산딸기 잼.
복숭아 크림과 백향과 젤리. 화이트 초콜릿 가나쉬와 오렌
지 커드. 나는 손과 발을 잊고, 주소를 잊고, 가을과 잠을
잊고, 혀두더지가 되어 거대한 디저트를 파고든다. 혀만 남
아 먹는다. 찢고 갈고 짓이기고 째고 깨고 핥고 녹이고 부
수고 가르고 개고 자르고 칠하고 밀고 섞고 치대고 적시고
쪼개고 휘젓고 돌리고 으깬다. 온전히 밖으로 나오는 것도
온전히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없다. 안팎으로 줄줄 흘러내
리기 때문이다. 보드라운 결을 찢고 침과 섞어 다시 반죽
을 만든다. 머랭이 석회 가루처럼 바스라지고 침이 석회를
갠다. 더 묽고 덜 묽은 것들이 어느새 한 몸이 되어, 어느
새 액이 되어 목구멍을 넘어간다. 침이 목구멍을 넘어간다.
이빨과 입술 사이로 한때 설탕, 계란, 밀가루, 버터였던 것
들이 밀려 나온다. 이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져 나갔다가 젖
과 꿀과 침과 엿이 흥건한 덩어리들이 바다에 빠졌다가 수
평선을 넘는다. 가락, 가락, 가락, 숨을 헐떡인다.
분해되는 그가 나를 압박이라도 하는지 끈적끈적한 눈
뒤가 뜨겁게 차오른다. 환하게 빛나는 불이 꺼진 듯 김을
내뿜으며 바스락바스락 변해 가던 순간이 끝나고 그는 왜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나를 구토 나게 하는지 모를 일이
다. 홀리듯 빛나는 설탕물이 흐르는 그의 짓이겨진 몸이
시멘트처럼 나를 짓눌렀다. 별 하나의 압력을 받는 하나의
빵처럼, 겉에서도 나를 짓누르고 안에서도 나를 바깥으로
압박해 와 마치 풍선 안의 풍선 같은 꼴이었다. 온몸이 부
풀어 오르는 동시에 짜그라드는, 눈과 코와 발이 구분되지
않는 시간이, 시간과 나의 내장들이 뒤섞인 긴 긴 밤이 시
작되었다.
젖은 무거운 머리카락. 나는 자는 동안 먹고 먹는 동안
잤다. 자는 동안 구워졌을 것이며 구워지는 동안 잤을 것
이다. 스테이플러로 덧대어 찍어 놓은 천을 뚫고 들어오는
어두운 빛.
여느 때와 같이,라는 말은 여느 때가 아닐 때에만 생각
나는 법이다. 여느 때가 아니므로 얇은 종이 한 장의 어긋
난 기분이 관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다. 나는 푹신푹신한
바닥을 밟고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연다. 푹신푹신한 것은
바닥이 아니라 내 발이다. 오른발을 들자 가득 들어찬 일
정한 크기의 세밀한 공기구멍이 스펀지처럼 제자리로 돌아
간다.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하자 먼지 같은 케이크 가루
가 ㅁㅁㅁㅁ 떨어진다. 나는 바람에도 바스라진다.
3
● 잠을 설쳤다. 토요일인 것이 다행이다. 한 발짝도 움
직이고 싶지 않다. 휴대폰을 열어 B에게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다. 다시 건다. 역시 받지 않는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아마도 통화 목록에서 B 바로 밑에 있는 이름이었
으므로, 작가에게 전화를 한다.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하
지. “여보세요?”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최재원, 민음의 시 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