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에서 새벽까지
“그래서...결국 왜 이 녀석이 여기 있는 건데.”
“아, 아까도 설명 드렸다시피 조금 무(武)와 기사검술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다가 흥이 올라서 자연스레 손속을 겨루는 걸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흥을 타다보니 방이 조금 심하게 엉망이 된 지라 이렇게 오늘 하루만......”
“오늘 하루만 우리 방에서 재워주자 그 말이냐......”
어울리지 않게 허둥대며 설명하는 세로스를 보고 티레사는 아연한 얼굴로 세로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니 왜 한 밤중에 그것도 방에서 그런 건데......”
티레사의 당연한 지적에 세로스는 고개를 거듭 조아릴 뿐이었다.
긁적 긁적
물론 나는 그 옆에서 태연하게 펜트하우스를 둘러보면서 코끝이나 긁적거리고 있었다.
“장난 아니네...바넬아파트가 아닌 것 같아...”
말 그대로 티레사들이 지내고 있는 방은 장난이 아니었다, 인테리어부터 시작해서 가구와 세세한 마감하나 까지 고급스러움의 극치였다.
“너......진짜 부잣집 애였구나...”
“넌 또 뭔 소리를 하는거야......”
의미 불명의 문답을 주고받은 뒤 티레사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나를 한 번 힐끔 보고 자신의 옷차림새를 슬쩍 확인한 뒤 한숨을 한 번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나, 뭐, 거실정도라면 빌려줄 수 있어.”
“오! 고마워 티레사”
티레사에게 숙박을 허락 받은 뒤에 슬쩍 세로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티레사는 에이던에 온 진짜 목적을 모르는 거냐?”
“그래, 아가씨는 그저 집이 빛 때문에 몰락해서 이 곳에서 일획천금을 손에 넣고 가문을 재건하기 위해 온 것으로 알고 계신다, 뭐 근본적으로는 던전탐험 그 자체에 흥미진진하신 것 같지만...”
좀 더 자세하게 물어보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아직 그녀를 돕는다고 정한 것도 아닌데 세세하게 묻는 것은 실례되는 일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가문의 재건이니 일획천금이니 하는 핑계가 거슬리기는 하지만...뭐, 억만장자가 몰락해서 백만장자가 되었다...정도의 인식이겠거니 했다.
그렇게 밀담을 나누는 동안 티레사는 장에서 예비용 이불을 꺼내서 거실로 들고 왔다.
작은 몸에 어울리지 않게 두툼한 볼륨의 깃털이불을 들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귀엽게 보였다.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작게 웃어보이고는 이불을 받아들었다.
한 바탕 뒹구느라 지저분해진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마친 뒤 티레사가 준비해준 이불을 챙기고 소파에 눕는다.
고맙게도 소파에는 까는 이불과 베개가 준비되어 있어서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풀썩!
그렇게 드러누운 소파는 어째 원래 내 침대보다 푹신한대다 배게는 푹신하다 못해 머리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부드러움을 자랑했다.
“흐아아아아아아~!”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렇게 내가 어느새 포삭한 이불에 턱 끝까지 잡아먹혔을 때 즈음.
철컥
거실로 세로스가 들어왔다.
샤워가 막 끝나 머리카락이 아직 촉촉하게 젖어있고 피부는 약간 붉게 달아오른 그 모습은 뭐라 할 수 없는 서정적인 요염함을 풍기고 있었다.
“......”
거실에 누워서 이불에 잡아먹혀 가는 모습을 보는 세로스의 눈이 뭔가 따가웠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 나를 무시하고 지나쳐 방으로 가는 세로스를 눈으로 쫒다가 한 마디를 건넸다.
“좋은 꿈 꿔라.”
“......그래 너도.”
철컥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감과 동시에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웃었다!?”
저 냉혈안이!?
피식~
“그래도 보기는 좋네.”
정말로 그랬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분명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더 슬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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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추상적이고 어렴풋한 과거의 기억을 꿈속에서 보고 있다.
물속에 있는 것 같은 부유감 속에서 10년의 기억들이 형태를 이루고 떠오른다.
슬펐던 일 아팠던 일 괴로웠던 일 후회되었던 일 역겨웠던 일 증오했던 일 미워했던 일 질투했던 일 자책 했던 일 상처받았던 일, 잃어버렸던 일
잊고 싶고 떠올리는 게 끔찍한 과거의 일들 하나하나가 끈덕지고 역겨운 손이 되어서 전신에 달라붙어 온다.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엉겨 붙어 오는 가운데 보물같이 아름다운 추억 몇 개를 가슴에 소중하게 품고 그 온기를 등불 삼아 견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품에 안은 소중한 것들이 나에게 엉겨 붙은 이 더러운 손들에 어떤 종막을 맞이하는지, 어떤 끝에 도달하게 되는지, 그것을 끌어안고 지키는 와중에도 아플 정도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후회한다,
지키지 못한 자기 자신에게, 나약한 자기 자신에게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없이 나 자신에게 그저 화가 난다.
그러니까 이 손들의 정체는 결국 나의 자책과 후회인 것이다.
그렇기에 떨쳐낼 수 없고 도망칠 수도 없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도 나에게서는 도망갈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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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흥 흐으흥~”
작은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상냥하고 가냘픈, 하지만 또렷하게 들려오는 그런 노랫소리.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조명삼은 자그맣고 아름다운 흑발의 소녀는 소파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서 따뜻한 선율의 노래를 이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듣고 소녀도 나에게로 눈을 돌렸다.
“일어났어?”
“그래......지금이 몇 시지?”
“음~이제 새벽 3시 즘일걸?”
“그러냐”
악몽을 꾸다 자던 도중 깼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끓어올랐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티레사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아무래도 안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서 신경쓰였거든......”
“보고 있었으면 좀 깨워주지 그랬어?”
“음~그치만......”
“그치만?”
“몰라, 그냥 깨우면 안 될 것 같았어, 응, 그냥 그래 보였어.”
“싱겁기는......”
그랬게 말했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내가 깬 이유가 그녀의 인기척 때문이라는 사실은 촌스럽게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일어났으면 일단 이거라도 마셔”
그렇게 말하면서 티레사가 가리킨 것은 테이블위에 놓여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레몬티였다.
“난 밀크티판대 말이야~”
“주는 대로 처먹어 바보야”
“예입~분부대로”
그렇게 장난스런 회화가 끝나고 나는 따뜻한 레몬티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상큼한 레몬 향과 따뜻한 온기가 텅 빈 위속에 스며드는 것이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티레사는, 조용히 일어나 커다란 창문의 앞에 섰다.
그 창문의 너머에 펼쳐진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이 작은 환생자 소녀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는 그녀의 옆에 섰다.
“밤거리의 모습이란 건 ‘지구’나 ‘여기’나 비슷하내”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해 보이자 티레사는 작게 웃어 보였다.
“네가 밤거리를 내려다볼 일이얼마 없어서 그런 걸 거야, 난 정말 많이 내려다봐서 잘 알아”
“그래?”
“응, 난 말이야...지구에서는 뭐, 좀 몸이 안 좋았거든, 병명은 잘 기억 안 나는대 불치병 이었어”
“그러냐......”
“만족스럽게 뛰는 거 조차 불가능하고 언제나 약을 달고 다니고...정말 시시한 인생이었지. 그래서 그런 시시한 인생을 보상받으려고 항상 창밖으로 세상을 내려다봤어, 낮이나 밤이나 한결같이 말이야”
어두운 내용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소녀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즐거운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난 지금 정말 좋아, 봐! 이렇게 건강하고...뭐 좀 나이에 비해 성장이 느리긴 하지만 그래도 튼튼한 몸이잖아? 거기에 이렇게 멋진 이세계 전생 특전까지~”
그렇게 말하고 뻗은 티레사의 손가에 잔잔한 빛으로 이루어진 토끼모양 정령들이 잠시 노닐다가 떠나갔다.
“거기에......”
소녀는 잠깐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조금 부끄러운 건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멋진 이 세계 전이 동료까지 생겼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잠시 티레사는 말을 골랐다.
“응! 이 멋진 이 세계에 축복을~......같은 느낌이야”
“......그래, 즐겁다면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다 문든 생각난 것에 살짝 폭소가 터졌다.
“응? 왜 그러는 거냐?”
“아니, 그냥 크큭, 전생에는 병약 아저씨였던 녀석이 지금은 이렇게 창가로 비치는 달빛을 배경삼아 우수에 잠겨있다고 생각하니 좀 웃겨서~”
내 말을 들은 티레사의 얼굴이 이상한 형태로 일그러졌다.
“아저씨라니...너 무슨 착각......”
“오~ 저기 봐라 저기 술집 거리 쪽에서 싸움났다~”
“응? 어디 말하는 거냐?”
“저~기 말이야 저기”
내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티레사도 열심히 눈으로 쫒았지만 너무 먼 탓인지 보이지 않는지 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안 보여~너무 멀어 너 진짜 보이기는 하는 거야?”
“아, 확실히 너 정령을 다루는 힘은 있지만 몸은 일반인이나 다름없지......”
자신이 배려하지 못 했던 부분이 떠올라서 약간 미안해졌기에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을 그녀에게도 보여주기로 했다.
“응 뭐냐 이건”
나는 엄지와 검지를 붙여 오케이 사인을 만들고 그 원 부분을 티레사의 눈가에 같다대었다.
“어, 어어어어! 이거 뭐야!? 보,보여 나한테도 보여!”
불평하는 것도 잠시 곧 티레사는 깜짝 놀라선지 좋아선지 팔짝 팔짝 뛰기 시작했다.
내가 사용한 건 별 대단할 것 없는 잡기였다,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고 거기에 세제로 거품 막을 만들 듯이 기를 이용해 렌즈를 만들어 망원경 같은 역할을 하게 했을 뿐이다,
물론 그런 자세한 일의 내막에는 신경 쓰지 않고 티레사는 나의 손을 망원경 다루듯이 이리저리 휙 휙 돌리며 창밖의 거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하하! 넌 진짜 별의 별 이상한 기술을 쓸 줄 아는구나?”
“그야......”
그래, 그도 그럴것이...
“이세계 생활 10년차니까......”
씁쓸한 뒷맛을 삼키면서 나는 티레사에게 웃어보였다.
“나가볼까?”
“뭐?”
“나가보자! 응?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아니, 나야 나간다 해도 괜찮지만 너 알고는 있는 거냐? 넌 17살짜리 여자애라구?”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여전히 내손을 잡고 망원경으로 쓰고 있는 티레사의 시야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저기, 저기 보이냐? 멀쩡한 어른 놈들이 야외 석에서 술 마시다 뭔 시답지 않은 이유로 서로 칼 빼들고 추하게 싸우는 꼬라지?”
나는 티레사가 잡고 있는 손의 반대쪽 손으로 티레사의 볼을 꼬집었다.
“여기는 지구가 아니라구, 밤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하다 이 말씀이야!”
물론 이 소녀에게는 정령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능력이 있다. 아침의 던전에서의 싸움을 봤을 때 정력들이 스스로 위기를 감지해 그녀를 지켜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만약이란 것이 이다.
한 밤의 길가를 걷다 어깨가 부딪혀서 싸움이 붙은 녀석이 알고 보니 굴지의 강자라거나 피에 미친 싸이코 살인마라거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들도 일어나기는 일어난다는 거다, 그것이 바로 이세계 클래스다.
“......그치만,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밤거리를 거닐어 보고 싶었어.”
차라리 때를 쓴다면 모를까 이렇게 솔직하게 풀죽어버리니까 괜히 더 마음이 안 좋다.
끙, 이거 들키면 세로스가 다시 날 죽이려고 덤벼들 것 같은데......
고민을 이어가려던 찰나 그녀에 눈가에 닿아있는 손가에 축축한 무언가가 느껴지자 다급히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그래 가자 가! 대신 내 말 잘 들어라!”
“와이~! 쉽네”
“너 임마 진짜......”
순식간에 돌변한 그녀의 소악마적인 태도에 한 숨을 푹 내쉬면서도 어쩐지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티레사를 다시 방으로 들여보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잠시 뒤 자신도 옷을 갈아입은 티레사와 함께 우리는 펜트하우스에서 1층으로 직통하는 승강기에 탔다.
엔틱한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1층으로 내려온 우리들은 어둡지만 달빛이 비추고 있는 아름다운 거리로 한 걸음 내디뎠다.
오랜만에 삽화 추가했습니다~, 생각보다 글이 잘 써져서 가끔이렇게 부정기 적으로도 올려보려합니다, 그래도 원래 올리던 토요일에도 항상 올릴생각입니다~
네이버 웹소설 첼린지리그에서도 연재중입니다, 만약 시간되신다면 한 번쯤 들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