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새미로를 향하여
2634년 4월 25일
답이 없다. 김씨가 약통을 천천히 들어보았다. 달그락, 달그락. 귀를 파먹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손가락으로 약통을 열었다. 조심스레 실눈을 뜨고는 약통을 보자 흰 바닥이 훤히 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약통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 탐욕스러운 배를 내밀었다. 얼른 약을 더 달라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약을 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떨어지다니.
김씨가 약을 꺼내고는 주머니를 뒤졌다. 바지에 있는 주머니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이리저리 휘저었다. 생각해보면 무어라도 하나 있지 않을까? 아니 인간적으로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팅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쳐다보았다. 아아. 동전. 빵 한 조각도 살 수 없는 동전이었다. 김씨가 허리를 굽혀가며 동전을 주웠다. 시큰거리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동전을 보았다. 잔뜩 긁힌 동전의 표면으로 김씨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김씨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에 핏줄이 올라오고 동전이 손바닥 안으로 파 묻혔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오빠 무슨 일 있어?”
거실 문턱에서 여동생이 고개를 배꼼 내밀었다. 김씨가 눈이 마주치고는 황급히 주머니에 동전을 집어넣고 고개를 돌렸다. 여동생의 큰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김씨는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아.’
딱 한마디. 더도 말고 이 한 마디였으면 됐다. 하지만 김씨는 그 한마디를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컵에 물을 따르고는 약과 함께 건넸다. 여동생이 물을 받고 입에 머금었다. 알 수 없는 쓴맛에 미간이 좁아졌다. 약을 넣어 물을 삼키고는 싱크대로 가 입을 헹구었다. 김씨가 슬며시 손을 내밀며 입가에 힘을 주었다.
“이제 그만 자자. 너무 늦었다.”
김씨는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의 여동생이 생각만큼 어린애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동생이 김씨의 얼굴을 보았다.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붉게 충혈 되고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왔다. 눈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전에 혼이라도 나간 듯이 멍해 보이는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여동생이 천천히 김씨의 손을 붙잡았다. 무어라 얘기를 하려다가도 입을 다물고 침실로 향했다.
김씨가 여동생을 눕히고는 이불을 끌어올렸다. 침대 끝에 앉아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여동생은 금방 잠이 들었다. 어제 밤처럼 잠을 못 자면 동화책이라도 읽어줄까 싶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다. 숨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곤히 자고 있었다. 언뜻 보면 죽은 사람처럼 작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순간 김씨의 간담이 서늘했다. 죽은 사람? 김씨가 얼른 여동생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왼손은 가슴 위에 얹어 놓고 오른손은 인중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숨을 멈추고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후우. 왼손이 살짝 움직이고 오른손을 타고 희미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희미한 달빛이 김씨와 여동생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어쩌면 달빛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오늘밤 여동생은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원체 집에서 나가지 않는 탓에 원래부터 피부가 하얗기는 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알비노처럼 색을 잃어버린 듯 했다. 여동생이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김씨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이제 남은 가족이라고는 여동생이 전부였다. 부모는 일찍이 노동현장에서 죽었고 이렇다 할 친지도 없었다. 전에 고모였던가. 삼촌이었던가. 누군가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김씨가 철이 들기도 전에 버려졌다.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다시는 오지 않았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욕을 퍼붓고 저주를 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애초에 세상이 요지경인데 무어를 바랄 수 있겠나? 오히려 이상한 곳에 팔지 않았다는 점이 감사했다.
여동생의 손을 움켜쥐었다. 인형 같이 작은 손, 이 손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다 해왔다. 강도 높은 노동도, 오염 지역으로 가는 일도, 구걸도, 심지어 약탈이나 도둑질도 했었다. 필요하다면 김씨는 더 한 것도 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악착 같이 살아왔지만 그 결과가 이거였다. 약 하나도 제대로 사주지 못하는 오빠라니. 김씨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이 바깥을 품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이 세상을 비춰주나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짙게 깔린 어둠은 달빛을 피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놈들은 교묘한 녀석들이었다. 조금이라도 방심을 한다면 그 안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멍하니 바라보는 김씨에게 더 이상 답은 없다며 계속 속삭이고 있었다. 김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이렇게 살아가면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게 있는 걸까? 고개를 저었다.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결코 현실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달빛이 황폐화 된 세상을 비춰졌다.
핵전쟁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예전의 찬란했던 문명들은 방사능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물론 돈 많은 놈들이야 여전히 잘 사는 세상이다. 하지만 김씨와 같은 사람들은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흔히 김씨 같은 부류를 하루살이라고 불렀다. 언제 죽어도,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건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김씨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는다.
방사능은 세상만 황폐화 시킨 것이 아니었다. 물, 식량, 토양 등등 대부분을 오염시켜나갔다. 놈들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환경을 오염시킨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마침내 사람을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두 명의 변화였다.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누군가는 구토를 연달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병들은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하나 둘 씩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김씨의 여동생도 마찬가지다. 하얗게 질려버린 피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약 사야 하는데.’
김씨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빵 하나도 사지 못하는데 약이라니. 김씨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사실 약도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여동생이 매일 밤마다 먹는 것은 진통제이다. 단순히 고통만 막아주는 셈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구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먹는다 한들 나아질 수 없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나왔다. 거실 구석에 있는 서랍장을 열고는 그 안으로 손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분명 여기 있을 텐데.’
손가락 끝을 움직이자 딱딱한 상자가 느껴졌다. 김씨가 양손을 집어넣어 서랍 위로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겉에는 먼지가 수북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게 얼마만일까? 먼지를 털어내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권총 한 자루, 칼집이 있었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도 권총은 빛나고 있었다. 겉에 먼지가 조금 묻어있기는 했으나 별 문제 없어 보였다. 김씨가 권총을 꺼내어 양 손에 쥐었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권총의 뒤편을 잡아당겨 장전을 했다.
철컥.
순간 김씨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권총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눈을 가늠쇠에 맞춰보고 방아쇠에 검지를 올렸다. 김씨가 눈을 감고 상상했다. 이 손가락을 당기며 앞에 있는 사람은 죽겠지. 검지를 천천히 움직였다. 틱하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김씨가 눈을 뜨고 총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칼집을 꺼내 들었다. 군용으로 만들어진 칼은 아직도 날이 죽지 않았다. 시퍼렇게 서 있는 날을 보니 소름이 끼쳤다. 살짝이라도 스치면 피가 나올 것 같았다. 한 손으로 칼을 쥐고는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다행히 그리 무겁지 않고 손에 익었다. 김씨가 허벅지와 뒷허리에 칼집과 총집을 차보고는 거울로 다가갔다. 한 바퀴 크게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그렇다하더라도 총은 티가 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거야? 응? 여동생 생각도 해야지.”
이씨의 말이 맞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김씨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환점이 필요했다. 기다리기만 해서는 끝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김씨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행동과 결과였다.
‘그래. 어쩔 수 없어.’
김씨가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있던 달빛이 구름에 가려져버렸다. 어두운 그림자가 김씨의 얼굴을 타고 올라왔다.
2366년 4월 26일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기자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팔과 다리를 가볍게 돌리고는 가방을 열어 녹음기를 꺼냈다. 스위치를 누르고 앞쪽에 버튼을 누르자 초록빛이 새어나왔다.
“아아.”
짧게 소리를 내고는 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다시 버튼을 누르자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런 문제없었다.
녹음기를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세트장에 온 것 같았다. 언젠가 영화인가 드라마에서 봤던 모습, 딱 그 모습대로 이었다. 책장에는 다양한 책들이 가득 있었는데 하나 같이 헤져서는 겉으로 봐도 수십 번은 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책장 너머 벽에는 온새미로의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전체적인 모습부터 세세한 부분까지 구획별로 나눠져서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 벽에 각종 상장이 걸려있었다. 물론 기자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로 가득하였다. 생전 처음 듣는 단어들이 넘쳐났고 그나마 아는 것이라고는 흰 종이위에 검은 잉크로 글씨가 써져있다는 것 정도였다.
기자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곳으로 오기를 잘했다. 처음 창간 특집으로 ‘미래와 우리’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는 암담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간 베일에 쌓여있던 온새미로의 비밀이라니! 이제 어떤 다른 기사와 비교를 한들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럼 시작할까요?”
“네. 시작하죠.”
기자가 자리에 앉아 슬며시 박사를 쳐다보았다. 인터뷰는 처음인지 조금 어색해 보였다. 살짝 초조해 보이기도 했고 눈동자가 조금 떨리는 것 같기도 했었다.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같이 온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인터뷰에 앞서 우선 가볍게 농담이나 건네려했다. 오랫동안 인터뷰를 해오면서 생긴 기자 나름대로의 노하우였다. 처음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라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대게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기에 초반에 확실하게 풀어줘야 한다. 그렇기에 기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우선 인터뷰에 앞서서 축하드립니다. 오십년이나 이어져 온 온새미로의 시공이 어제부로 끝났네요. 그동안 베일에 싸여져 있어서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던데 외계인을 만난 소감은 어떠신가요?”
박사가 온새미로 전문가라면 기자는 인터뷰 전문가였다. 그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이어가려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밝고 재미있게 말이다. 그렇게 온새미로에 대한 취재를 끝내고 기사를 만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사는 달랐다. 기자의 미소와는 다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사에게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박사의 목적은 그 이후에 있었다.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만드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박사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죄송하지만 온새미로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리 축하할 일도 아니고요.”
순간 기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기자의 예상에는 없던 상황이었다. 지금쯤 무슨 외계인이나면서 웃고 떠들었으면 됐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박사는 왜 이러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자가 박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박사는 기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박사의 눈빛은 카메라를 향해 지긋이 고정되어있었다.
‘뭐지? 긴장이라도 했나?’
박사는 결코 긴장한 것이 아니었다. 기자는 알 수 있었다. 흔히 긴장하고 초조한 눈빛과는 달랐다. 박사의 눈동자에서는 어떠한 부끄러움도 어색함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굳건했다. 굳은 눈동자 안에는 깊은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온새미로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과학의 진보니, 축복이 아니에요. 이건 짊이자 각인이죠. 우리가 짊어져야 할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이 짊어지고 나가야 할 저주입니다.”
기자가 이쯤에서 한번 말을 끊을까 고민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냥 우스갯소리 좀 나누고 하하 호호하며 인터뷰를 했으면 끝날 일이었다. 기자의 머릿속에는 이런 장면 따윈 없었다. 하지만 박사의 기세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기자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봐왔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유쾌한 사람도 있었고 우울한 사람도 있었다. 또 험악한 사람들도 있었고 위험한 사람도 있었다. 인터뷰를 하던 중에 욕을 먹었던 적도 있었고 소리치는 고함소리에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은 적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박사는 매우 점잖은 사람이었다.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말을 빨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곤조곤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분명 이보다 더 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박사는 엄연히 그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왜 일까? 이런 얘기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었는데 말릴 수 없었다. 박사의 말들이 무겁게 공간을 장악했다.
“저, 저주요? 상당히 의외네요. 온새미로에 관한 애정이 깊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건 맞습니다. 저는 제 일생을 온새미로를 위해 바쳤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입니다. 그렇다고 이곳이 지니는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죠.”
“그럼 온새미로는 대체 무엇입니까?”
기자가 침을 꼴깍 삼켰다. 과연 온새미로라는 것은 무어이기에 이토록 박사가 얘기하는 것일까? 기자가 수첩을 꺼내 펜을 들었다. 그리고는 박사의 입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온새미로는 핵폐기물 저장소입니다.”
그 순간 기자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오직 카메라 셔터 소리만 정적을 헤치고 다녔다. 기자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러자 쥐고 있던 펜이 땅으로 떨어지며 톡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자가 박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깊고 어두웠다.
2634년 4월 26일
황무지. 가시. 김씨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기분 나쁜 곳이었다. 풀 한포기 조차 없는 황무지에 이상한 가시들이 솟아나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시 기둥이었다. 사람 키보다도 크고 성인 남성 2명보다도 몸집이 거대했다. 가시들은 일정한 배열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언가를 나타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정신 이상자가 도화지에 검은 선을 미친 듯이 그어놓듯이 가시 또한 땅바닥에 이리저리 꽂혀있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저리 꺼지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김씨가 가시의 표면에 손을 올려보았다. 거칠한 것이 마치 사포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넘치던 의욕이 뚝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늘 멀리서만 봤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 끔찍했다. 멀리서 봤을 때는 큰 이쑤시개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묘비도 아닌 것이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든 걸까? 왜 만든 걸까?
“아저씨. 이거 사람이 만든 거지?”
고개를 돌려 이씨를 보았다. 이씨는 여전히 지도를 보고 있었다. 저번에 왔던 것을 찾으면 되는 건데 아직도 하지 못한 모양이다.
“응? 아 그렇지. 사람이 만들었다지 아마. 기분 나쁘지만 말이야.”
온새미로.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웬만한 정신 나간 것들도 이곳은 피해갔다. 가시들이 땅을 장악한 탓에 이곳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누군가는 이곳을 무덤이라 얘기하고 또 누군가는 종교적인 장소라 얘기했다. 하지만 그 실상에 대해 밝혀진 것은 없었다. 늘 그랬듯이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온새미로에 관한 소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공통점 하나 있었다. 바로 ‘저주.’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어가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풍문에 의하면 이곳에 왔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코피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왜 그런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이 흉물스러운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물론 그건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어제 까지만 해도 그랬었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온새미로를 가냐고 생각했는데 저주보다, 소문보다 무서운 것은 당장 비어가는 주머니였다.
이틀 전. 한참 돈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는데 이씨가 갑자기 찾아왔다. 노동을 하는 시간도 아니었고 일거리를 가지고 온 것도 아니었다. 문을 열자 이씨는 지도를 들고 있었다.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는 문이 열리자마자 소리쳤다.
“야. 너 온새미로 알지? 나랑 같이 가자.”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처음에는 이씨가 노망이 났구나 싶었다.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었지만 세상이 요지경이니 그래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 순간 이씨가 문을 막아섰다. 양손으로 지도를 펼치고는 김씨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여기 보이지? 여기 동그라미 쳐 있는 곳. 내가 저번에 멀리서 봤는데 여기 구멍이 있더라고.”
“구멍? 무슨 소리야? 저기는 절벽 아니었어?”
“그랬지. 근데 저번에 지진이 한번 났었잖아. 그 때문에 절벽이 무너졌나봐. 그래서 신기하기에 쌍안경으로 살펴보았지. 근데 재미있는 게 있더라.”
“뭔데?”
김씨의 손에서 힘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이씨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는 김시에게 그림 몇 장을 건네주었다. 김씨가 그림을 받고는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림들은 하나 같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사진이라고 하면은 과장이지만 그만큼 현실감 있게 그려져 있었다.
“이건 뭐야?”
그림 속 구멍은 신세계였다. 분명 김씨가 아는 바와는 달랐다. 절벽이 무너졌다면 그 안에 돌멩이나 바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구멍은 달랐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무언가가 있었다. 어떤 구조물 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었고 그 아래로 기둥 같은 것이 보였다. 김씨가 고개를 들어 이씨를 쳐다보았다. 커다랗게 변한 눈에 이씨가 미소를 지었다. 김씨는 이런 것들을 본적이 없었다. 아니 들어본 적조차도 없었다.
“그치? 이상하지? 멀리서 봤는데 뭔가 있더라.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봤지. 이게 대체 뭘까 하고.”
“응. 그래서 대체 뭔데?”
“보물이야.”
“보물?”
이씨의 말에 김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씨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김씨는 점점 이씨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그래 보물창고. 그 왜 피라미드 같은 거 있잖아. 이것도 그런 거지. 어느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안에 보물을 숨긴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절벽 안에 꽁꽁 싸매놓은 거지. 안 그러겠어?”
김씨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예전에 과학기술이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이런 구멍을 만드는 건 큰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보물들은 숨겨져 있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보물이라는 생각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 굳이 이런 장소에 보물을 숨긴 걸까? 아무리 보물이 중요하더라도 나중에 찾을 수는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마치 봉인이라도 하 듯이 이런 곳에 가둬놔야 할 필요가 있나?
“그래서 그 보물이라는 걸 같이 찾으러 가자고?”
“그래. 혼자가면 무리일 것 같고 그나마 믿을 사람이 너뿐이라 말하는 거야.”
“하지만 여긴 그 온새미로잖아? 그렇게 막 가도 되는 거야?”
이씨가 손을 내밀어 김씨의 어깨를 잡았다. 살짝 힘을 주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김씨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 보물만 있으면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살거야? 응? 여동생 생각도 해야지.”
“아! 저기야 저기. 저기 봐봐.”
이씨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구멍이 보였다. 맙소사. 정말로 구멍이 있었다. 그렇게 큰 구멍은 아니었다.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크기였다. 갈라진 절벽 틈으로 김씨가 다가갔다. 조심스레 절벽의 잔해를 밟고 올라갔다. 부스럭 부스럭, 밟히는 잔해들이 뭔가 이상했다. 돌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김씨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절벽의 단면을 쳐다보았다. 이럴 수가. 김씨가 손을 뻗었다. 무너진 절벽의 파편을 손에 쥐었다. 이건 설마?
“이거 콘크리트잖아.”
“어? 정말 그러네. 이 제보니 바위가 아니었네.”
그 순간 김씨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빠졌다. 이상하다. 명백히 이상하다. 누가 왜 이런걸 만든 걸까? 이씨의 말대로 보물창고라 생각하기에는 뭔가 조각이 맞지 않았다. 이 콘크리트 조각. 분명 누군가 이 입구를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막아놓고는 뻔뻔하게 절벽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수고를 한 걸까? 정말로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 일까? 아니. 이건 마치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서 인 것 같다.
순간 구멍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구멍 안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김씨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칼로 베인 듯이 뺨의 피부가 소리를 질렀다. 단순한 바람이건만 이상하리만큼 소름 끼쳤다. 등골을 타고 흘러내려가는 바람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버리고 식은땀이 흘러내렷다. 뭐지?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김씨가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불길함이 김씨의 다리를 붙잡고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척추에 매달려 뇌를 향해 계속 달려갔다.
‘오빠 무슨 일 있어?’
물러가던 김씨의 발이 멈췄다. 문득 집에 있을 여동생이 떠올랐다. 지금도 집에서 하염없이 오빠를 기다리는 여동생 말이다. 하루하루 하얗게 변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김씨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리고는 구멍을 향해 한걸음 옮겨나갔다.
“와. 이런 곳이 아직도 있다니.”
“그러게. 믿기지 않는걸?”
김씨가 들어오자 뒤따라 이씨도 들어왔다. 구멍 안은 어둡기에 이씨가 횃불을 꺼내 김씨에게 건넸다. 불을 붙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멍 안의 구조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구멍 안에 커다란 홀 같은 것이 있었고 그 너머에 통로가 있었다.
가운데 홀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기계였다. 김씨와 이씨는 동시에 기계를 향해 걸어갔다. 둘 다 처음이었다. 이 정도로 거대한 기계는 생전에 본적도 없었다. 자동차보다도 기계는 크기가 컸다. 기계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아직도 작동을 한다는 점이었다. 희미하게 나오는 붉은 빛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아저씨. 이게 컴퓨터라는 건가?”
“글쎄다. 그런 것 같은데. 이거 작동도 하나? 한번 만져봐야겠다.”
이씨가 당당하게 말한 것 치고는 머리를 쥐어 잡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큰소리를 떵떵 치기는 했으나 본적도 없는 기계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사실 핵전쟁 이후로 기계가 가장 많이 쇠퇴했을 것이다. 전기를 생산할 시설이 없어졌으니 인류는 자연스레 원시시대로 돌아갔다. 그나마 남아있는 기계라고는 농기구나 손으로 움직일 수 있는 도구들이었다. 하다못해 전구 대신에 횃불을 사용하였고 밤이 되면 꼼짝 없이 잠을 자야 했다.
이씨가 기계를 만지는 동안 김씨는 홀을 지나 통로 쪽으로 걸어갔다. 통로가 서서히 보이더니 그 앞에 무언가 길을 가로 막고 있었다. 김씨가 조심스레 다가가 횃불을 비춰보았다. 검은 기둥이 있었다. 김씨가 검은 기둥에 다가갔다. 검은 기둥은 가시와 닮았다. 표면이 거칠었고 그 색이 어두웠다. 하지만 가시와는 엄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그 크기와 배열이었다. 가시가 무식하게 컸다면 검은 기둥은 사람 키만 했다. 그리고 아무렇게 꽂혀있는 가시와는 다르게 검은 기둥은 바닥에 정사각형의 배열을 이루며 서 있었다. 그 가운데에 있으면 검은 기둥에 둘러싸였다.
김씨가 손을 뻗었다. 움푹 패어져 있는 부분들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새겨 넣은 건가? 김씨가 횃불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검은 기둥의 표면에는 뭔가 새겨져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것과는 상관없는 이상한 상처들이 많았다.
상처. 김씨의 미간이 좁아졌다. 기둥에 생긴 상처는 새겨진 것과는 엄연히 달랐다. 새겨진 것은 검은 기둥을 파내 섬세하게 작업한 것이라면 상처들은 겉을 긁은 느낌이었다. 김씨가 횃불을 아래로 내려 바닥을 살펴보았다. 분명 있어야 했다. 만일 지진들로 인해 돌멩이가 떨어져서 긁힌 것이라면 돌멩이나 하다못해 돌 부스러기라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아도 작은 흔적 하나 없었다. 김씨가 표면에 난 상처들을 다시 보았다. 저 상처는 분명 날카로운 무언가로 긁은 상처이다. 예를 들면 칼이라든지……
김씨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누가 이런 곳에 왔을까? 김씨나 이씨도 우연히 발견한 곳이건만. 지진이 아니었다면 이런 곳이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진 모양이다.
“오! 됐다. 됐어!”
김씨가 코웃음 치는 도중 천장에서 불빛이 흘러 넘쳤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김씨가 눈을 가렸다. 눈을 가리고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검은 기둥의 표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아저씨 이리로 와봐.”
김씨가 이씨를 불러놓고는 기둥을 가리켰다. 기둥의 움푹 패어져 있는 곳을 손가락을 짚어보았다. 글자. 이건 분명 글자가 틀림없었다. 일부 훼손된 것들이 있었지만 엄연히 글자들이었다. 그것도 하나의 글자가 아니었다. 딱 보기만 해도 수십 가지는 되어보았다. 놀라운 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글자뿐만 아니라 그림도 있었다. 다른 면에는 해골 문양, 뛰쳐나가는 사람, 그리고 원을 둘러싼 부채 등등 다양한 그림이 있었다. 김씨가 원을 둘러싼 부채의 그림에 손을 뻗어보았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으나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
“응? 이거 글자 아니야? 너 이거 읽을 수 있냐?”
“조금. 아저씨는?”
“내가 알겠냐? 에이 이런 거에 신경 말고 일단 들어가자. 어차피 별 내용 없을 거야.”
김씨와는 다르게 이씨는 기둥에 관심 따위 없었다. 이씨는 오직 통로에만 관심을 쏟아 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통로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 말이다. 이씨가 먼저 앞장서서 통로 쪽으로 걸어갔다. 홀로 남은 김씨가 마지못해 검은 기둥을 쳐다보았다. ‘조심.’ ‘주의.’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안 갈 거야? 시간 없다고.”
멀어져가는 이씨가 소리쳤다. 그제야 김씨는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이씨를 따라가면서도 살짝 뒤를 돌아서 검은 기둥을 보았다. 순간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나? 김씨가 고개를 젓고는 검은 기둥을 쳐다보았다. 기둥은 그대로였다.
2366년 4월 26일
“핵폐기물이라고요?”
과학에 무지한 기자라도 핵폐기물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몇 백년 전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 사건에 대해 우려를 보였고 그 우려는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에는 풀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제 2의 체르노빌이라는 사건 덕분에 푸른 언덕은 한순간에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만일 사신이 있다면 그곳에 집을 짓고 미소를 지으며 살고 있을 것이다.
“네. 핵폐기물입니다. 먼 옛날 핀란드에서는 핵폐기물 저장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층을 고르고 그 아래 터널을 파서 폐기물을 보관하겠다는 개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핵폐기물이 많아도 이렇게 많아지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떄문이죠. 또 신재생 에너지가 개발되고 있기에 원자력은 퇴물이 될 거라 생각했었죠. 하지만 늘 그렇듯 현실은 사람의 예측을 뛰어 넘는 법이죠. 그래서 핀란드의 시설을 본뜨다 온새미로를 만들게 된 겁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기자의 물음에 박사가 타자를 두드렸다. 책상의 모니터를 보더니 마우스 클릭을 몇 번하고 화면을 돌려 보여주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그래프였다. 그래프의 화살표는 어느 순간부터 급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멀스멀 기어 올라가던 놈은 갑작스레 천장을 뚫어버릴 기세로 승천하고 있었다.
“이게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자연스레 이렇게 됐다.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거죠. 굳이 사건을 따지자면 지나친 전자기기의 보급화와 인도, 중국 등등 나라의 발전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에너지 수요량이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자님께서도 아시죠? 백 년 전 전국 단위로 정전이 발생했던 일이요.”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정전사태. 그 사건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땅에 얼마 있지 않으리.
“물론 알고 있죠. 사건이 워낙 사건이니까요. 그때 난리도 아니었다고 하잖아요. 한 시간이지만 병원, 공항 등등 하나도 빼지 않고 한 번에 정전이 일어나서 사상자랑 사고가 많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그처럼 어느 순간부터 에너지 수요를 버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재생 에너지가 개발되고는 있었지만 그 진척보다 수요량의 증가가 훨씬 더 빨랐죠. 어느새 공급을 따라잡을 수준이었죠.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무어를 하겠습니까? 절약? 설마요. 지금도 이렇게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데요. 답은 한가지로 정해져 있죠.”
“하나요? 설마!”
“맞습니다. 바로 원자력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당장 발등에 불은 떨어져 에너지는 필요하고 그만큼 뽑아내는 게 원자력이니까요. 사람이 그래요. 앞에서는 절약이니 뭐니 하다가도 정작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거든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일부 과학자들은 원자력을 영원히 불타는 불꽃이라고 해요. 그 당시에는 주변을 밝히지만 결국 그 불에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만다고 하죠.”
기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설마 온새미로가 핵폐기물 저장소였다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기껏 해봐야 새로운 연구 시설 단지인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하지만 그 실상은 달랐다. 기자가 생각했던 것만큼 가볍고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 실체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무거웠다.
2634년 4월 26일
“우리 한 시간은 더 걷지 않았냐?”
“아마? 그보다 더 된 것 같은데.”
김씨와 이씨는 통로를 지나 내려갔다. 끝없이 내려갔다. 얼마나 내려갔으면 이씨는 이상한 상상까지 하게 되었다. 이대로 내려가면 지구의 반대편으로 나가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거기는 이곳과는 다른 낙원이 있지 않을까? 우스갯소리 같은 생각들이 김씨의 머리를 차지했다.
김씨가 상상 속에서 허덕이는 동안에도 길은 끝이 없었다. 코너를 돌아갈 때면 으레 내려가는 길이 나왔다. 뫼비우스의 띠였다. 코너를 돌고 다시 코너가 나오고 또 다시 코너를 돌았다. 길은 내려가는 길이 전부였다. 중간 중간에 바위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있기는 했으나 다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내려가고 또 내려갈 뿐이었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것은 조명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전등이 사라져서 갈수록 복도는 어둠에 물들었다.
“근데 이건 대체 무슨 악취미야?”
문득 이씨가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며 욕하기 시작했다. 김씨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다 그림을 걸어놓은 놈은 변태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그림들만 골라서 걸어놓을까?
벽에 걸린 그림들은 소름 끼칠 정도로 같은 위치에 있었다. 내려가다 저기쯤 그림이 있겠지 하면 늘 그림이 있었다. 참으로 다양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기형아 그림도 있었고 도망치는 사람의 그림도 있었다. 개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한 사내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해골 같은 사내가 양 볼을 쥐어 잡으며 소리 지르는 그림이었는데 절규하는 걸 표현한 것 같았다.
“있잖아. 여기 그림들 뭔가 있는 거 아닐까? 이상하잖아. 누가 이런 그림들을 통로에 걸어놓겠어. 뭔가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예를 들면 여기는 위험한 곳이라던가.”
그림을 보는 도중 김씨의 머릿속에 ‘주의.’‘조심.’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그림들은 하나 같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전시용으로도 관상용으로도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면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일이 이런 그림들을 걸어놓는 수고를 했을까?
김씨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씨는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짙게 내쉬고는 계속 길을 걸어갔다.
“이런 거 다 의미 없어. 그래. 딱 너처럼 생각하게 하려는 거지. 애초에 생각해봐. 이런데 왜 이런 그림이 있겠어? 경고? 말도 안 되는 소리마. 누가 넉살 좋게 그러겠어. 이건 그냥 허세에 불과해. 내 보물에 손대지 말라는 거지.”
“그런가…… 그렇지만.”
김씨가 고개를 숙이자 이씨가 김씨에게 다가왔다. 저벅저벅 큰소리로 걸어오고는 김씨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양손에 힘을 잔뜩 주자 김씨의 미간이 좁아졌다.
“야. 정신 차려. 쓸데없는 생각 마. 뭐가 있으면 어쩔 건데? 여기까지 와서 멈출 거야? 너도 잘 알잖아. 우리에게 선택지 따윈 없어. 그냥 이대로 갈 수 밖에 없단 말이야.”
이씨가 손을 놓고 통로를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이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돌아갈 수 없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법이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봐야 한다. 그 끝에 무어가 있든 돌아갈 수는 없다. 김씨가 이씨를 따라갔다. 더욱 더 깊고 어두운 지하를 향해 내려갔다.
2366년 4월 26일
"십만 년이라고요?”
기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십만 년? 십만 년이라니! 그 세월이 얼마나 긴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인간의 역사는 그 옛날 돌멩이를 갈던 시절부터 하더라도 아직 일만 년조차 되지 않았다. 그 많은 발전이 있고 전쟁과 시련들이 지나간 세월조차 십만 년에 비하면 세발의 피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십만년은 얼마나 길고 긴 세월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로 십만 년이나 지나야 핵폐기물이 안전해진다는 말씀이신가요?”
“지금으로서는 최소 십만 년입니다. 혹시 모르죠. 미래에 핵폐기물을 정화하는 기술이 있을 지도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최소 그 정도는 기다려야합니다.”
박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분명 박사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십만 년이라는 시간을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을.
“그렇다면 온새미로가 십만 년이나 버틸 수 있는 건가요?”
기자가 아는 바로는 전 세계를 찾아보아도 십만 년이나 버틸 만한 것이 없었다. 그나마 생각나는 거라고는 피라미드나 고인돌 같은 유적지들이었다. 하지만 그거도 기껏 해봐야 몇 천 년 전 얘기다.
기자의 질문에 박사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을 모아 하나 둘씩 움직였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고민을 하는 것일까? 박사는 손가락 끝만 애매하게 움직였다.
“음. 일단 가능은 합니다. 저희가 가진 최고의 기술들을 사용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재해가 온다하더라도 상관없을 겁니다. 온새미로를 품고 있는 지층은 이미 몇 억년을 버틴 곳이니까요. 하지만.”
박사는 좀처럼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게 인터뷰를 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람. 항상 사람이 문제에요.”
“사람이요?”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이라고? 뜬금없는 대답에 기자가 머리를 굴려보았다. 과연 온새미로랑 사람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지만 기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당연히 온새미로에 관한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그것의 구조라던가 자체적인 내구성에 관한 얘기들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라니? 온새미로가 버티는 것과 사람이 무슨 상관이리.
“네. 바로 사람이 문제라고 할 수 있죠. 저희도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온새미로가 십만 년이라는 세월을 버틸 수 있을까? 그래서 최대한 안전한 지층을 찾고 최고의 기술과 자재로 온새미로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답은 나오지 않았죠.”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박사의 말은 마치 안개와 같았다. 앞이 보이는 듯하나 결코 명확히 보이지는 않았다. 스무고개를 하는 듯이 알 듯 말 듯 한 느낌에 머리가 가려워졌다. 기자가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동안 박사는 여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피라미드 아시죠? 피라미드가 만들어졌을 당시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려 했을까요? 아니죠. 당시 사람들은 감히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죠.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되었죠? 그 안의 보물들은 파헤쳐지고 근엄하기 짝이 없던 왕의 시신은 박물관에서 광대 마냥 전시되고 있죠.”
그제야 기자가 무릎을 탁하고 때렸다. 어렴풋이 느껴지던 것들이 명확해진 것이다. 과연. 고대 이집트인이라면 감히 피라미드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그 의미를 알고 있기에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 의미를 잊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 둘 씩 기억 속에서 사라지다 마침내 누군가에 의해 피라미드는 그 신성함을 침범 당했을 것이다.
“그런 거죠. 백 년? 이 백년쯤은 안전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이후로는? 알 수 없죠. 세월이 지나가며 정보가 사라졌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인류가 퇴보하여 온새미로에 관한 걸 죄다 까먹었을 수도 있겠죠.”
“퇴보? 퇴보라면 미래가 지금보다 뒤처질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럼 셈이죠. 지난 역사 동안 우리는 두 번의 큰 전쟁을 겪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많은 것들이 사라졌죠. 하물며 그때 당시 기술력으로도 그만한 피해를 봤는데 지금은 어떻겠습니까? 기자님도 잘 아실 겁니다. 지금 세계는 굉장히 아슬아슬합니다. 우리는 어느 시대 사람들보다도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죠. 아침에 핸드폰 소리에 일어나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순간까지도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셈이죠. 이미 일상생활 속에서 에너지는 배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은 원자력으로 당장은 버틸 수 있죠.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요? 혹시 에너지가 부족해진 나라에서는 약탈을 일삼지 않을까요? 아니면 누군가 에너지를 독점하여 부당한 이익을 차지하지는 않을까요? 더 나아가 에너지를 차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는 않을까요?”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세간에는 흉흉한 얘기가 떠돌고 있었다. 머지않아 석유가 고갈되고 그로 인해 중동국가들을 중심으로 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었다.
“그럼 그에 따른 대처는 해놓으셨나요?”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다가갔다. 눈으로 한 번씩 쓰윽 훑어보더니 파일 더미 하나를 꺼내보았다. 촤르륵 넘어가는 파일 속에는 다양한 문서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사진과 그림 다발이 보였다.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파일을 기자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내용물들을 하나 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다양한 사진과 그림들이 보였는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불쾌하다. 실로 불쾌한 것들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검은 기둥이었다. 마치 커다란 이쑤시개처럼 생긴 기둥은 네 개가 사방을 둘러매며 땅에 꽂혀 있었다. 기둥의 높이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딱 사람 키만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커다랗게 보였다.
“이게 바로 그 대처입니다.”
“이게요? 실례되는 얘기지만 뭔가 기분 나쁘네요.”
땅을 뚫고 나온 검은 가시는 하늘을 뚫을 것 같았고 각종 해골 그림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했다. 뿐만 아니라 붉은 경고 글씨와 노란 방사능 마크는 섬뜩섬뜩했다. 심지어 그 사진들 중에는 뭉크의 절규도 있었다. 낯선 그림들 사이에서 홀로 양볼을 쥐고 비명을 지리는 사내가 보였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기자로서는 아무리 봐도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아니 무슨 의미가 있다한들 무슨 소용인지. 만일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이라면 딱 적격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기분 나빠야 정상이죠. 애초에 그렇게 하려고 만들었으니까요. 이 가시를 보시겠어요? 이 가시는 이곳이 불길하다는 의미를 포함하죠. 다 그런 거예요. 이곳은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것이죠. 여기 뭉크의 절규도 마찬가지죠. 위험하니 얼른 돌아가라는 의미죠.”
그렇군. 확실히 그렇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것들이 가득한 곳이라면 누군들 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피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에 걸맞은 흉흉한 소문들이 불어날 것이다. 그럼 또 그 소문들은 또 다른 사람들의 발길을 끊어버릴 것이다. 그런 쪽으로는 확실하게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자의 머릿속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을까?
“전 잘 모르겠네요. 확실히 효과가 있겠지만 그냥 경고 문구 같은 걸 넣으면 안 되는 건가요? 안내 팻말을 세우는 건 또 어때요?”
“그건 안 됩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이렇게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할지도 모릅니다. 또 더 나아가 언어 자체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각종 언어와 언어를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그림과 상징을 사용한 겁니다. 이걸 봐주세요.”
박사가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아까 본 기둥 사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둥의 표면을 자세히 촬영한 사진이었다. 다양한 언어들이 쓰여 있었다. 기자가 아는 언어만 하더라도 벌써 5개가 넘어갔다. 불어, 일본어, 영어, 한글, 아랍어, 라틴어 등등 그 이상은 알지도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언어가 있었다니.
“일단 저희는 과거 그리고 현재 있던 언어들을 모두 새겨 놨어요. 주 내용은 그런 거죠. 이곳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곳이 아니다. 나가라. 이곳은 위험한 곳이다. 그리고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그림도 새겨 넣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이해해줄까요?”
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은 짙고 무거웠다. 바닥을 짓누르며 기자에게 다가왔다. 기자의 발목 근처가 무거워졌다. 한숨은 기자의 다리를 타고 온 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발을 살짝 움직여 떨어뜨려 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없었다.
2634년 4월 26일
벽. 커다란 벽이 보였다. 마침내 통로는 끝이 났고 저 멀리 벽이 나타났다. 멀리서 보는데도 벽은 상당히 높아보였다. 건물 2층 높이는 되어 보였다. 이씨가 벽을 향해 뛰려는데 김씨가 이씨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튀어나온 바위 뒤로 슬며시 밀어 넣고는 몸을 숨겼다.
“뭐야? 왜 그래?”
“기다려봐. 저기 이상한 놈들이 있어.”
“응? 뭐가 있다는 거야?”
김씨가 고개를 내밀고 눈에 힘을 주었다. 벽 아래에 두 명의 남자가 보였다. 하나는 벽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벽에 붙어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어두운 탓에 남자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팔뚝에 새겨져 있는 문신이 선명하게 보였다. 해골 문신. 미식가 놈들이었다.
“미식가 놈들이야. 아저씨도 알잖아. 그 유명한 놈들.”
“미식가? 그 인육 먹는 미친놈들 말이야?”
“쉿! 소리 좀 낮춰.”
황급히 김씨가 이씨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울린 소리는 공기를 타고 남자들에게 전해졌다. 서성거리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김씨와 이씨는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였다.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냐?”
“소리? 헛소리 말고 이거나 도와줘.”
“아냐. 분명히 사람 말소리 같았어. 애초에 갑자기 불이 들어온 것도 그렇고 우리 말고 누가 있는 거야.”
“아서라. 아까 한명 갔잖아. 그 놈이 잘 처리했겠지. 것보다 나 좀 도와달라니까. 이거 은근히 설치하기 귀찮단 말이야.”
“아니. 그 놈이 그렇게 똑똑할 리가 없어. 내가 확인 해볼게.”
“하. 거 좀 도와달라니까.”
바위 너머로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젠장. 하필이면 미식가 놈들이라니. 김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씨와 눈이 마주쳤다. 미식가 놈들에 관한 소문은 김씨 뿐만이 아니라 이씨도 익히 알고 있었다.
미식가 놈들 앞에서는 돈도, 권력도 무용지물이었다. 놈들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았다. 물론 그건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정도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아무리 원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건만 놈들에게는 없었다. 어린아이, 여자, 노인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놈들은 순수한 악마와 같았다.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라면 걸릴 거라고?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 걸 그랬어.”
이씨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김씨가 지긋이 남자를 한번 쳐다보았다. 홀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다른 방법은 없겠지. 몸을 낮추고 자세를 잡았다.
“뭐하는 거야? 저놈이랑 싸우려고? 미친 거 아냐?”
“그럼? 이대로 당하자고? 아까부터 계속 가자고 했던 사람이 누군데? 오히려 잘됐어. 놈들이 여기 있다는 얘기는 뭔가 있다는 거니까. 일단 아저씨는 물러나 있어.”
김씨가 이씨를 살포시 밀어냈다. 지금의 이씨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은 사치였다. 고개를 내밀고 놈을 쳐다보았다. 역시. 어설프다. 놈은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틈이 많았다. 그 틈만 노리고 들어간다면 쉽게 처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숨에 파고들어 폐를 찔러버린다면 소리도 못 지르고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갔다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김씨가 얘기했지만 대답은 오지 않았다. 또 무슨 일인가 고개를 돌린 순간 웬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이씨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멈추고 칼부터 내려놓으시지.”
망할. 언제부터였을까?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니.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었다. 홀에서부터 뒤를 밟은 건가? 이씨가 남자의 팔꿈치에 매달려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남자의 팔뚝 해골 문신이 비웃고 있었다. 김씨가 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역시 이놈들 죽이는 게 좋겠지?”
“그래 그래. 어디 가서 떠벌리면 곤란하니까.”
“그러자. 죽이자.”
남자들이 김씨의 앞에서 웃으며 떠들었다. 김씨가 고개를 돌려 이씨를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땅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무런 의지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하긴. 김씨도 놈들이 풀어 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김씨는 포기하지 않을 뿐이었다. 역시 이 방법 밖에 없겠지? 김씨는 최후의 수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움직이지마.”
다행인 것은 놈들이 몸수색을 따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씨가 허리에 찬 총을 꺼내 양 손에 쥐었다. 그러자 하나 같이 박장대소하며 웃기 시작했다. 얼마나 심하게 웃어대는지 웃음소리가 통로를 가득 메웠다. 뿐만 아니라 그 중 하나는 배를 움켜쥐며 웃었다. 김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세를 잡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꼬마야. 총알은 있니?”
“그럴 리가 없잖아. 총알이 사라진 게 언제인데.”
“그래그래. 총알 따윈 이제 어디에도 없다고.”
이씨가 침을 꿀꺽 삼켰다. 천천히 김씨의 총을 바라보았다. 혹시 위협이라도 할 생각인건가? 그렇다면 아무런 소용없을 것이다. 총도 기계와 같았다. 이미 오래 전에 그 의미를 상실해버렸다. 적어도 이씨가 어렸을 때는 총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꽤나 있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총알은 소비되고 만들 능력은 없으니 자연스레 총은 사라졌다. 어쩌다 한 번씩 보는 일은 있었지만 극히 드문 일이었다.
김씨는 놈들의 조롱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안전장치를 해제하였다.
“뭐하려고? 허세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고.”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김씨는 가장 앞에 있는, 이씨의 목에 칼을 들이댔던 남자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지금 가면 살려는 줄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
남자가 크게 웃고는 김씨에게 다가왔다. 총구에 가슴을 붙이고는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총알도 없으면서. 꼬마야. 그렇게 힘들게 살지 말고 얼른 편히 가렴. 뭘 그렇게 고생하니?”
“난 분명히 말했어.”
김씨의 검지가 움직였다.
탕.
짧은 총성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남자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산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알만 굴리며 서로를 살펴보고 있었다.
철푸덕.
가슴에 구멍이 난 남자가 쓰러졌다. 김씨가 다른 남자들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총, 총알이 있다고?”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이씨도 처음이었다. 총에서 총알이 나간 것도, 총에 죽은 사람을 보는 것도 말이다. 이씨는 늘 그렇게 생각했었다. 총이 있다면 모든 상황을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그건 이씨의 착각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보았다. 등 뒤로 훤히 나있는 구멍에서 피가 흘러넘쳤다. 꿀렁거리며 꿈틀거리는 모습에 토가 쏠려왔다.
“어때? 이제 좀 사태의 심각성을 알겠어?”
남자들이 천천히 뒤로 내빼기 시작했다. 서로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멀어져갔다.
“그래. 그냥 갈게. 가면 되는 거지?”
“아깐 미안했고 이제 갈게.”
남자들이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헐레벌떡 숨을 넘기며 죽어라 달려갔다. 김씨가 지긋이 남자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총구를 돌려 검지에 힘을 주었다.
탕, 탕.
두 번의 총성은 남자들을 멈추게 만들었다. 하나는 머리에 구멍이 나버렸고 나머지 하나는 운이 좋아 다리에 구멍이 났다.
“젠장! 망할 놈!”
쓰러진 남자가 소리쳤다.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땅을 기어가고 있었다. 김씨가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벌레를 보는 눈빛. 시체 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구멍이 난 다리를 지그시 밟고 칼을 목에 들이댔다.
“돌아다니면서 떠벌릴 텐데 살려둘 수 없겠네.”
그리고는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남자는 소리를 지르다가 쓰러졌다. 김씨가 칼을 바닥에 던지고 이씨에게 다가갔다.
2633년 4월 26일
기자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에이 너무 걱정이 많으신 거 아닌가요? 이렇게 굳이 숨긴 곳을 파헤칠 정도라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잘 모르고 왔다하더라도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까요?”
하지만 기자의 바람과는 다르게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물론 그것도 하나의 가능성이죠. 하지만 우리는 가능성에 안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완벽을 추구해야 합니다. 안일한 가능성에 안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른 것입니다. 캐내는 기술만 발달하고 해석하는 기술은 부족할 할 수도 있죠. 물론 방사능 측정기 하나만 있어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죠. 하지만 그게 없다면 단순한 보물 창고로 보일 수도 있죠.”
보물창고. 기자는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미래의 인류. 어쩌면 그들은 우연 혹은 필연에 의해서 온새미로를 발견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곳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우선 커다란 동굴 속 기계들을 보며 이곳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곳을 만든 걸까? 왜 어째서 이곳을 숨긴 걸까?
그러다 문득 그들은 보물을 떠올릴 것이다. 무덤 속에 가득한 보물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보물들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할까? 당연히 파헤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하긴 설마 누가 지옥 같은 것들을 정성껏 숨겼다고 생각하겠는가.
2634년 4월 26일
김씨가 벽을 주먹으로 툭툭 쳐보았다. 묵직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것이 꽤나 두꺼운 모양이다. 아마도 입구에 있던 절벽과 같은 구조로 어쩌면 절벽보다도 더 단단한 것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누군가 일부러 이곳을 막았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길도 없고 이곳이 끝이었다. 왜 막았을까? 김씨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결론에 도달했다. 마침내 뭔가가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이 벽 어떻게 하지? 뭔가 있는 거 같기는 한데.”
문제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땅한 도구가 없을뿐더러 도구가 있다 한들 둘이서 해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이씨가 대답하지 않았다. 이씨는 아까 남자들이 설치하던 것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김씨가 다가가서 같이 보았다. 이상한 막대 같은 것이 다섯개 정도 떨어져 있었다. 막대의 끝에는 실 같은 것이 달려있었는데 바닥에 쭉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거 사용하자.”
“이게 뭔데?”
“몰라? 다이너마이트잖아. 간단히 말하면 폭탄 같은 거야. 아마 다섯 개는 너무 많고 두개 정도면 될 거 같은데?”
“그러면 이 벽을 뚫을 수 있는 거야?”
“아마? 나도 확실한 건 아닌데 어쩔 수 없잖아. 일단 여기 실 같은 거 보이지? 저걸 심지라고 하는데 여기다가 불을 붙이면 폭발할거야. 그러니까 불붙이고 아까 숨어있던 바위로 가면 될 거야.”
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횃불을 이용해 심지에 불을 붙이고 얼른 바위 뒤로 숨었다. 다행히 폭발까지 시간이 많아서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바위 뒤에 숨어서는 이씨가 알려준 대로 몸을 웅크렸다. 머리를 무릎 사이로 집어넣고 양손으로 귀와 뒤통수를 감쌌다. 불꽃은 심지를 타고 흘러 들어갔다. 이씨와 김씨가 바위로 가는 동안에도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끝에 도달했을 무렵 쾅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무너졌다.
폭발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동굴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벽 너머 일부분이 날아갔다. 조심스레 벽을 지나 건너편으로 들어갔다. 김씨가 무너진 잔해들을 보고 있었는데 옆쪽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붉은 빛이 보였다. 빛을 향해 손을 뻗고 잔해들을 치우자 둥근 문 같은 것이 나왔다.
“오. 이게 보물 상자인가?”
김씨와 이씨는 어떻게든 문을 열어보려 안간힘을 써보았다. 둘이 힘을 합치기도 했고 미친 듯이 두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견고함 때문에 오히려 힘만 빠졌다. 김씨가 어떻게든 열어보려고 온갖 난리를 치는 동안 이씨는 턱을 괴고 뚜껑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아까 챙겼던 다이너마이트를 하나 둘 꺼냈다.
“야. 그냥 이걸로 열자.”
“응? 그랬다가 안에 내용물까지 다 날아가면 어쩌려고?”
“아냐. 괜찮을 거야. 그리고 저기 봐봐. 저기 길로 가면 더 많이 있을 거야. 설마 이거 하나만 있겠냐? 그리고 우리도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부터 해야지.”
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는 죽도 밥도 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김씨가 다이너마이트를 받고 뚜껑 아래 내려다 놓았다. 길게 연결된 심지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 아냐. 불붙일게.”
치익……
불꽃은 심지를 타고 천천히 구리 뚜껑을 향해 흘러 들어갔다. 김씨가 다시 한번 뚜껑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 석연찮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김씨가 유심히 뚜껑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 안에 들어있는 것을 챙기면 끝이었다. 무어가 들어 있는 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감싸놓고 숨긴 것이라면 얼마나 가치 있는 물건이란 말인가. 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이상 고생할 필요가 없다.
2366년 4월 26일
“만일 그들이 침범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기자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박사가 손끝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온새미로가 무너진 최악의 상황. 그건 단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누군가 들어와 폐기물들을 지상으로 가져가면 끝이죠. 그 이상도 이하도 없어요.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이곳에 넣어질 폐기물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단순히 몇 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대륙이 날아갈 수도 있는 양입니다. 그런 폐기물을 옮기고 폭발이라도 한다면 온통 방사능으로 물들 겁니다. 그러면 이 일대는 물론이고 이 대륙은 끝이 났다고 보면 됩니다.”
“정녕 그들을 오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막을 방법은 없는 건가요?”
“우리는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해온 것들이 다 옳다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가시들이 호기심을 자극해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또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죠.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죠. 일단 폐기물의 운반이 완료되면 저장소 통로의 통로가 일차적으로 막힐 것입니다. 그 후 입구를 다시 한 번 막아버리겠죠. 그 다음에는 이에 관한 정보를 후세에 넘기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나요?”
“글쎄요. 그들이 오지 않기를 기도해야하죠.”
박사가 양손을 굳게 쥐었다.
기자가 녹음기를 끄고 박사를 쳐다보았다. 인터뷰 탓인지 아니면 온새미로에 관한 걱정 탓인지 지쳐보였다. 지친 것은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어깨가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특집 기사로만 생각했었다. ‘온새미로 의 비밀!’라면서 기사나 쓰고 끝낼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왔고 인터뷰를 요청했었다. 하지만 그 실상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기자가 감당하기에는 양 어깨가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후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십니까?”
기자의 질문에 박사가 눈을 감았다. 무어라 말할 지 고민하는 듯 했다. 박사는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어쩌면 너무 많아서 줄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기자가 자리를 정리할 즈음에 박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만일 당신이 이곳 온새미로에 왔다면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이곳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곳이 아닙니다. 보물이 가득한 곳도 신비한 비밀이 있는 곳도 아닙니다. 이곳은 굉장히 위험한 곳입니다. 얼른 돌아가 다시 입구를 막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온새미로의 끝에 도착했다면 미안합니다. 당신들에게 이런 짐을 짊어지게 하고 막지 못한 우리의 잘못입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기자가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차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에는 좀처럼 힘이 나지 않았다. 동료가 점심으로 무어를 먹겠느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 박사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달려가는 차 안에서 기자는 조용히 눈을 감아보았다. 온새미로는 축복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저주이고 우리의 후손에게 채워진 족쇄였다. 목에 채워진 사슬이고 숨통을 틀어막는 칼날이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온새미로를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곳에서 숨기는 것이었다. 과연 우리는 온새미로를 사람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 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을 생각해보아도 답은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