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발언에,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식탁을 둘러싼 두 사람 주위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마주보고 앉아 있던 안드로이드 여자는 머릿속이 어지러워 세상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만 같은 현기증을 느껴야만 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쉬어버린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하구요."
"사람은 돈만 있으면 필요한 건 대부분 구할 수 있소. 당신도 곧 배우게 될 테고. 액수는 빠듯하겠지만, 나가기 힘들면 인터넷으로라도 주문을..."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녀가 의자를 거칠게 밀어제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끌려나간 의자로 인해 밭고랑처럼 긴 자욱이 방바닥에 새겨졌다. 청년은 그녀가 이렇게까지 격정적인 행동을 보여주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는지, 놀란 눈을 하고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사람을 죽였소. 나와 똑같이 살아 숨쉬고, 울고 웃는, 그런 사람을 말야.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거란 말이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어쩔 수 없었다고 그 일이 합리화 될 수는 없소.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을 쏘지 않았다면 제가 죽었을 거에요.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그녀의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져갔다. 청년의 우직함과 순수함은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나오게 도와주었건만, 이제는 청년 스스로를 불구덩이에 던져넣고 있다. 그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말려야 하는데. 못 가게 해야만 하는데. 그러나 그녀의 애타는 마음과는 상관없이, 청년은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관철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 말대로일지도 모르오. 내가 그 자를 쏘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렇게 죽고, 나 역시 뒤늦게 나타나 총알에 벌집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
"타인의 목숨을 죽일지 살릴지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권리란 없소. 누구에게도. 생명의 가치는 모두 동일하니까.."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바닥 한 쪽에 대충 던져놨던 자신의 외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현관으로 걸어가 막 신발을 신으려는데, 그녀가 쏜살같이 달려와 양 팔을 벌리고 서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청년의 눈을 매섭게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보낼 수 없어요. 죄목을 감안하면 사형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20년 이하의 징역을..."
"누군가의 수십 년 인생을 빼앗고 그 정도라면 오히려 너무 가볍구려."
그녀는 이제 정중한 설득은 먹히지 않는다 생각한 건지, 청년에게 두려움을 심어줄 요량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기로 마음먹은 듯 했다. 최대한 부정적인 것들로. 그러나 그런 그녀의 위협마저 청년은 그저 흘려넘기는 투였다.
"교도소 안에서도 따돌림당하고, 괴롭힘을 당할 거에요. 안드로이드인 저를 살리려 그랬다고 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 할 거라구요."
"그런 게 두려웠으면 당신을 구하러 가지도 않았겠지. 이제 그만 비켜주시오."
청년은 최대한 태연을 가장하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자신이라고 왜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신은 어떻게든 책임을 치러야 한다. 그것이 그가 알고 있는 세상이었고, 인간다움이었다. 이제 와서 그것을 버리고 외면하기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청년의 상념은, 이어지는 그녀의 울먹거림으로 인해 순식간에 끊어졌다.
"남아 있는 저는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아까 그런 사람들과 다시 한 번 마주치면요. 앉아서 가만히 죽으라는 건가요. 세상 사람들의 외면을 마주하면서?"
그녀의 들린 팔이 힘없이 내려갔고, 이윽고 커다란 두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청년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슴 한 구석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회사에서 찾아올지도 몰라요. 지금은 제 스스로 회사와의 통신을 막아놨기에 위치 추적은 못 하겠지만, 사람을 보내 수소문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저는 얌전히 끌려가서 기억을 소거당하고 다시 예전처럼 일하게 될 지도 모르죠. 언제 또 마주칠지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요. 제가 그러기를 바라세요?"
"...."
"이렇게 저 혼자 놔두고 떠나실 거면 왜 저를 구하신 거에요. 왜 저를 여기로 데려오신 거냐구요. 왜 저를..."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계속 중얼거렸다. 끝에 가서는 울음과 말이 섞여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청년이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다,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살짝 껴안았고, 그러자 그녀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꼭 해 줘야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청년은 자신의 말재간이 이렇게나 부족했는가 싶어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으나, 결국에는 간신히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아마 이 죄는 죽을 때까지 갚을 수도 없겠지. 그래도 최소한.. 떳떳하고자 노력은 하고 싶소. 나를 위해서나, 당신을 위해서나."
"저를.. 위해서라구요?"
청년의 말이 의외였는지, 그녀가 놀라 반문했다. 그리고 말을 꺼낸 순간, 청년은 혼란스럽게 널려진 책들을 한 권 한 권 차곡차곡 책장에 꽂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이 확연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곤경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당신을 지켜주리라 마음먹었지. 그건 내가 당신보다 우월한 인간이라서, 혹은 동정심이 생겨서 그랬던 게 아니오. 다만 당신 역시 나와 같은 한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소. 그게 무엇인지, 또 생명체의 기준이 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당신이 그저 사람을 모방한 단순한 기계는 아니라고 생각하오. 내 눈에 보인 당신은 아름다웠소. 그건 단순한 겉모습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 숨쉬는 생생한 여인들한테서나 느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었소."
느닷없는 청년의 말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움에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날아갈 듯 기뻤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뜨거워지는 볼과, 요동치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들어 그녀는 청년의 눈을 살짝 피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이 살아 있는 그 무언가라면, 내가 한 일이 최소한 완전히 잘못되지는 않았었다는 걸 믿고 싶소. 그래야만 우리 둘 다 그 일을 떨쳐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그러니 만약 나중에.."
말을 하다 말고 청년이 끝을 흐리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그런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고뇌하는 듯, 부끄러워 하는 듯 온갖 감정이 뒤섞인 듯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죗값을 치른 뒤에도 당신이 나를 계속 기다려준다면.. 곁으로 돌아오겠소, 반드시."
"...!"
청년의 어설픈 고백 아닌 고백에, 그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이내 아픈 손등도 잊어버린 채 있는 힘껏 두 손으로 청년을 껴안았다.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이번에는 그 이유가 달랐다. 방금 전의 눈물이 안타까움에서 나왔던 거라면, 지금의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기다릴 거에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슨 수를 쓰더라도 기다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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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소설 둘 다 동시에 하려니 꽤나 힘들더라구요. 하루에 한 편은 정해진 건 아니고, 그냥 자기 전에 머릿속에 생각나는대로 잽싸게 쓰려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 소설을 써 본 적도 없어서 빠른 건지 어떤 건지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 호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17.03.19 02:5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