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정한 몸에 주름 가득한 얼굴을 한 노인도 한 때는 청년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 와서는 회한 섞인 기억으로밖에 남지 않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 때처럼 역동적이고 강렬한, 살아 있다는 실감이 온 몸 가득 느껴지던 때도 다시 없었다. 그 때를 떠올리던 노인의 머리 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은 조금씩 모양을 이루어, 잠시나마 노인을 청년기로 되돌려놓았다.
그가 청년이던 무렵, 세상은 이미 한 차례의 격변을 겪은 뒤였다.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첨단 기계들의 범람. 사람이 할 일을 점차적으로 기계가 대신하게 되었고 사람의 신체, 장기, 혈액까지 인공물로 대체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다만 그런 기술이 있다 뿐이지, 기계에나 들어갈 전선이나 쇳덩어리 뭉치를 몸에 집어넣을 수는 없다고 느낀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몇몇 별난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치부되는 게 보통이었다. 최소한 시작은 그랬다.
"오늘도 또 취업률이 떨어졌더군. 뉴스 봤어?"
"새삼스럽게 뭘. 어제 오늘 일이야, 그게? 막말로 자네도 돈 안 주고 하루종일 부려먹을 기계하고, 월급에 보험에 인권이니 뭐니 눈치 봐가면서 써야 하는 사람 둘 중 어느 걸 고르겠나. 이렇게 되리란 건 다들 알고 있었어."
그의 친구가 한숨을 내쉬며 꺼낸 말에 노인, 아니 지금은 청년인 그가 냉소적으로 말을 뱉었다. 말을 하고 난 뒤였지만 막상 친구의 기분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가물거리는 눈으로 간신히 소주잔을 찾아 입에 갖다댔지만, 술은 평소보다도 더 쓰게 느껴졌다.
"몇 년 내로 조만간 기본소득제가 도입된다던데.."
"어쩔 수 없겠지. 앞으로는 누구 하나 일 안 해도 기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테니까.. 돈을 벌고 싶어도 벌 수가 없지 않나."
"그야 그렇지. 그래도 이건 뭔가 아니다 싶어. 젠장!"
그 말과 함께 그의 친구는 소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이건 또 뭔가. 평소에도 친구가 술만 마시면 뜬구름 잡는 넋두리를 내뱉는, 감성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행동은 뭐냔 말이다. 청년은 근 몇 달만에 만났기에, 되도록이면 좋은 얘기만 하며 술을 기울이려고 했던 자신의 노력을 앗아가는 친구에게 화가 치밀었다.
"좋은 술자리에서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이 봐, 세상을 거스르려는 거야? 결국 문명이 발전하면, 인간이 득을 보는 거야. 잘 알면서 왜 그래."
"이보게,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란 말일세."
앙다문 이빨 사이로 내뱉는 친구의 말에, 청년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조심스럽게 살펴본 친구의 얼굴은, 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붉었다. 무엇에 그리 분노한단 말인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이 나이 먹고도 제대로 하는 일도 없이 잡일만 전전하는 나같은 사람한테는 꿈만 같은 일이란 말이야. 나라에서 굶어죽지 않게,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 준다는 데 뭐가 불만이야."
"사람이 밥만 먹고 산다는 건가. 하는 일도 없이 그저 밥만 축내면, 집에서 기르는 개와 다를 게 무어냔 거야. 사람은 일을 하고, 무언가를 꿈꾸고 이뤄가며 살아야 하는 거지.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이 인간이 주는 사료나 먹고 재롱이나 피우면서도, 먹을 걸 주는 인간들이 있으니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과 무엇이 달라?"
"우리는 동물원의 동물이 아닐세. 누가 가둬두지도 않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라고."
"자네는 부정해도 조만간 그렇게 될 거야."
친구의 말이 그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도 입으로는 아니라고, 세상은 더 좋아졌고 앞으로도 좋아질 거라고 얘기했지만, 세상 여기저기 인간이 독식하고 있던 자리들이 빈 자리로 바뀌고, 이윽고 그 자리를 기계들이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어느덧 내일 모레면 서른 중반이었다. 남들은 가정을 꾸려 살아갈 나이건만, 어렸을 적 부모를 여의고 먹고 살자고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이제는 지나가버린 청춘. 눈 앞에 앉아 소주잔을 홀짝거리며 넋두리를 늘어놓는 친구마저도, 이미 결혼해서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가 있었다.
"직장도 좋은 데에 다니면서 왜 그래. 쓸데없는 걱정 말라고, 그런 고철덩어리들이 인간을 대신할 수 있나."
그는 한숨을 내쉬며, 비어버린 친구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친구도 조금은 가라앉은 모습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나 왠일인지 친구는 손에 든 술잔을 들고, 어린애가 시커먼 우물 바닥을 바라보는 것처럼 잔 속의 술만 쳐다보고만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친구가 또 갑작스레 기함과 함께 아까와 같은 불만을 토해낼까 불안해졌다.
기나긴 침묵이 이어지고, 이윽고 친구가 소주잔을 단번에 들이키고는 힘들게 힘들게 마음속에 묵혀놨던 듯한 말을 토해냈다.
"조만간 해고될 것 같아."
"뭐?"
빈 속에 술만 삼켜 쓰려진 속을 달래볼까, 먹다 남은 김치전으로 향하던 청년의 젓가락이 멈추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네처럼 일 잘하고 성실한 사람이 왜?"
"나만 그런 게 아냐. 우리 부서, 아니.. 중역들을 제외하고는 다 길바닥으로 쫒겨날지도 몰라."
"미친 놈들. 그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몇인데 대체 그게.."
"회사 측에서 최신 인공지능 시스템을 도입하고, 우리가 일하던 자리에는 안드로이드인지 뭔지 하는 것들을 앉힐 거라더군."
"...."
친구의 말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 회사가 대체 어떤 회사인가.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이다. 농담조로, 나라가 망해도 그 기업은 살아남을 거라는 둥, 그 기업에 취직하면 3대가 놀고 먹는 건 정해진 팔자라는 식의 얘기로 회자될 정도의 대기업이란 말이다. 게다가 친구는 그 대기업의 말단에서 시작해서, 차장 자리에까지 올라간 소위 말하는 '엘리트'였다.
"자네 집사람은.. 알고 있어?"
"아직 말 안 했어. 어떻게 말하겠나."
"젠장."
욕지거리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이것이던가. 그의 친구가 왜 그렇게나 두서없는 넋두리를 늘어놓았었는지 이해가 됐다. 짜증이 밀려왔다. 나야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능력 없어 이렇게 산다지만 이 친구는 뭔 죄인가. 누군가가 뼈 빠지게 일해서 기업에 충성한 대가가 고작 이렇게 돌아온다는 사실이,어렸을 적 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의 불행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느껴졌다. 주위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들의 소음 속에서도, 빛바랜 증명사진 속의 주인공이 된 듯 청년은 미동도 않고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여기에요, 여기."
비틀거리는 몸으로 친구를 부축한 채, 그는 대로변에 서서 대리 운전 기사를 불렀다. 바깥으로 나오자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겨서 어둑어둑하여 친구가 주차한 차를 찾는 데에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만취하여 옷 안주머니의 자동차 열쇠조차 찾지 못하는 친구를 승용차 뒷좌석에 올려놓는 일 또한 꽤나 지지부진했다. 간신히 친구를 차에 태우고 주소를 말하였으나, 대리 운전 기사의 인상은 매우 불만스러운 듯 하였다. 길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나, 횡설수설하는 친구를 붙들고 차에 싣는 동안 다른 곳을 갔더라면 한 탕은 더 뛰었을 거라는 식이었다. 청년은 내심 불만스러웠지만,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 웃돈까지 얹어주고 살살 비위를 맞춰주었다. 청년의 말재간이 통한 것인지, 대리 운전 기사의 입꼬리가 윗쪽으로 크게 올라갔다.
어느새인가 친구의 차는 금새 출발하여 먼 불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불빛이 점점 작아져, 막 꺼지려고 하는 담뱃꽁초의 불빛처럼 아른거릴 때 쯤 청년은 참아왔던 한숨을 크게 내쉬고 중얼거렸다.
"무슨 놈의 대리 운전 비용이 이렇게 비싸.. 하루 일당 다 날아갔네."
이제 또 일감을 찾을 시간이다. 친구처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고용되어 있지 않은 이상, 그 기본소득제인지 뭔지가 시행되서 먹고 살 만한 돈이 거저 주어지기 전까지 그는 오로지 품을 팔아 하루하루를 먹고 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청년은 친구의 비극을 뇌리 한 켠에 접어두고, 찬 바람을 맞으며 자신이 머물고 있는 원룸으로 향했다. 걸어걸어 가다보면 간신히 오른 이 취기가 깨지는 않을까 하는 초조함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