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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소의 법칙
유한려
그리고 그 날로부터 다시 삼 년이 지난 오늘,
나는 고등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있다.
눈부시게 빛나는 여주인공 반여령은 여전히 내 옆집에 거주하고 계시며,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갈 예정이다.
이것이 내가 지금 처한 현실이다.
-1화
소설을 고를 땐 언제나 그 글의 분위기가 중요하다.
대체로 무겁고, 진지하며, 고뇌하는 이야기들을 좋아하지만
작년 무렵부턴 그런 이야기들은 여전히 재미있고, 즐거우나 그 이야기를 함께하던 순간만큼은 힘들고 괴로웠다.
그래서 최근에는 보다 밝고 명랑한 이야기. 혹은 일상을 다룬 이야기를 찾는 편이었다.
잔잔하게 그들의 세계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나도 그 이야기의 일원이 된 것처럼 즐거웠기 때문이다.
<인소의 법칙>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맑고 명랑한 이상적인 일상을 그린 이야기. 어쩌면 일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인소라는 장르의 전형적인 주인공들과 친구1의 포지션에서 시작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일상이다.
그들은 분명 세상에서 제일가는 친구이고, 그들은 서로를 위해 끔찍하게 아껴주며, 함꼐 놀고, 먹고-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공유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가장 이상적인 일상이다.
너무 이상적이어서 한국의 고등학생은 결코 갖지 못할 일상.
'이렇게나 넓은 세상에서 둘도 없을만큼 소중한 누군가를 만났다는 건,
우연이 아니라 그 만큼 많은 인연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소중한 인연의 가능성은 살아있는 한 세상 어디에든, 언제나.'
-그레나드/Ttale[니플헤임]
그래서 나는 단이가 부러웠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그런 친구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 축복인데.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지만, 그들처럼 허구한 날 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시험 끝난 날 정도.
나는 이런 내 친구들과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데, 단이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 소설은 단이의 이야기이다. 특별함에 묻혀있는 평범한 아이의 이야기.
단이의 가장 소중한 친구 여령이가 함께하고, 너무 소중해서 슬픈 네 명의 소년이 나오는.
어느날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너와 학교만 인소와 뒤바뀌어버린 그런 이야기.
아직은 어리고, 서투르고, 희망차고, 철없을 수 있는, 그 나이, 그 때의 이야기.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서투르지만 이 지면에 적어볼까 한다.
-
작년에 언젠가 기록으로 남겨둬야지 하면서,
어쩌면 너무 자라버리면 지금 이 시절 나의 감상을 잊어버릴까봐
겨우겨우 적어 놓았던 작가님의 <라시타> 리뷰를 적으면서 마음 한 속으로 불편해졌다.
내가 최고로 꼽던 소설이고 꼽는 소설이지만, 분명 인소의 법칙도 이렇게 기록하고 싶은데.
언젠가 기록할 날이 오겠지하고 살다보니 이 순간까지 오게되어 버렸다.
못푸른 숙제처럼 마음에 짐이 되었던 이 리뷰로 홀가분해졌으면 좋겠다.
-
흔히 인터넷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의 친구는 기본적으로 두 명에서 세 명이다.
이 소설, 아니, 이 거지같은 현실에서는 세 명이다.
그 세 명의 경우에는 각자 개성이 넘치는 성격을 갖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도 그렇다.
모든 일에 무관심한 싸늘한 미남 타입과,
마냥 미소를 날리는 친절한 훈남 타입과,
애교가 철철 흘러넘치는 귀여운 타입이 있다.
-2화
인소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빵빵 터질 것이다.
그래, 인소를 잘 읽지 않던 나도 이런 것은 알아.
남주 친구들. 그들은 각자의 포지션을 맡고, 그 포지션에 맡게 성격이 부여되는데 언제나 냉미남과 훈남과 귀요미는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개성을 살려서 남자주인공과 함께 학교를 휘잡는, 거의 아이돌급의 거물들이다.
인법에서는 그렇게까지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친구들의 대사나 단이가 경기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그런 것 같다.
아, 덤으로 여령이까지 있으니 남심, 여심 모두 골고루 공략할 수 있는 전략적인 그룹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작가님이 이런 캐릭터를 그저 인소에 나오니까- 하는 식으로 만들어두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줘서 고마웠고, 그래서 소설이 더욱 즐거워졌다.
아마, 그가 내게 인터넷을 켜지 말라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그가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의 유명인이라는 것을 알고나면,
그에게 더욱 거리를 둘까봐서.
무의식적으로라도, 내가 그렇게 행동할까봐서였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미모, 부, 능력, 그 모든 것이
다섯 사람에게만 집중된 소설 속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이것이 현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가끔 엄청난 거리감을 느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7화
나는 단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나는 단이처럼 결코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은 틀림없이 낮아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멀어지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로 유명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부담스럽고 대단스러워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곁에 남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마 이런 점에서 단이는 인법이라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나는 단이가 부러웠다.
단이에게 주어진 환경이 부러운 것이 아니다.
단이의 저 올곧음이 부러웠다. 저런 생각을 하는 친구라면.
오히려 인기가 있어져서 본인이 부담스러워서 피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녀가 진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때, 얼마나 든든할까.
나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단이가 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결코 그렇지 못했으니 앞으로의 나는 어떨까.
다섯명의 주요인물과 함께할 수 있는 단이가 부럽기보다는,
단이를 친구로 갖을 수 있던 저 다섯이 나는 부럽다. 나는 저럴 수 있는 단이가 부럽다.
내 거리감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유천영이었다.
평소에는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없는 그인데도, 내가 그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것에는 지독하게 예민했다.
내가 유천영과 싸운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반여령은 내가 그녀에게 거리를 두는 것을 이해해준다.
그러나 유천영은 내가 거리를 두는 것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7화
.
.
.
"내가 널 어떻게 믿겠어."
"……."
"그렇게 웃으면서, 네가 날 친구라고 생각한다고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어 놓고서…….
또 속으로는 전학 갈 궁리나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8화
그러는 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천영. 일명 쿨워터남. 남주 친구.
반대로 생각해보자. 내가 유천영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그처럼 화를 낼까?
내 주변의 친구에 대입해 생각해 보았지만, 나는 아마 결코 화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유천영처럼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화를 내지 못할 것이다. 속으로만 삭이고 고민하고 슬퍼하겠지.
그전에, 사실 저렇게 행동했을 때, 내가 화낼만한 사람이 한 명 밖에 없다.
원래 인간관계에 대해서 무덤덤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단이가 유천영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은 이때부터 이미 깨닫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방식으로 친해졌던 것 같다.
-7화
그렇다.
다섯 명의 친구들 중에서 내가 보이게도 가장 이상적인 방식으로 친해졌던 것은 유천영인 것 같았다.
가끔은 심하게 싸우지만, 그 밑바탕에는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
[그런데도 넌 이상할 정도로 평범에 집착하지. 전부터 궁금했는데,
좋아, 이참에 물어보자. 대체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해?
너희들 곁에 있으면, 너희들이 한 편의 완벽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철머 보일 때가 있다고.
그리고 나도 그 연극 속의 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안 보인느 실이 내 입술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이고, 숨 쉬는 것까지 통제하는 것 같다고.
-9화
왜 단이는 그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걸까?
소설 속의 이야기이다.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다.
그런 이유로 단이는 굉장히 이들을 어려워했고 힘들어했다.
나는 이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인간은 분명 적응의 동물이다. 나라면 금방 적응할 수 있었을거야- 라고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웃음만 나온다.
비록 이때까지만 해도 단이의 상황을 제대로 모르던 것이기도 했지만, 나는 속단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아예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되는 것이 이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든다.
너와 학교만 뒤바뀌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내 삶에 너희와 이 학교가 생겨났다.
어떻게 보면 굉장이 즐겁고, 낭만적인 이야기이겠지만 반대로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모호해져버린다.
그래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본인의 세계를 '소설'로 치부해버리고 말게된다.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3월 2일이 가까워지면 나는 자주 불면증에 시달리고는 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세상이 바뀌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저히 잠을 이를 수 없었다.
.
.
.
침대에 걸터앉아 나는 통화 목록을 찬찬히 훑었다.
문자메시지 함도, 훑었다.
은지호, 반여령, 우주인……. 나는 엄지로 화면 액정을 슬슬 쓸어내렸다.
그리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있어, 전부 그대로야. 그런데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9화
이때부터 나는 더 이상 단이의 감정에 의문을 갖지 마리고 결심했던 것 같다.
나는 단이의 상황에 처해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끔찍하다.
나는 너희들을 모두 기억하는데, 너희들만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누구도 너희를 기억하지 못한다.
너희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나뿐이다. 너희와의 추억이 내 머릿속을 제외하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상상만 해도 그건 끔찍하다.
간혹 소설들 중에 여자주인공이 죽으면서 남겨질 사람들이 안타까워,
신이든 초월자든 누군가에게 부탁해 자신의 존재를 지워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그런 것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내가 상대를 잊는 것은 슬프겠지만, 어차피 잊는다. 그건 괜찮다.
하지만 내가 당사자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린다면.
그들에게 나의 흔적이 모조리 다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나는 일이다.
아파할 그들이 미안하고 안타깝지만, 나의 부재를 깨달고 슬퍼할 그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잊혀지는 것은 싫다.
나만 그들을 기억하는 것도 싫다. 그래서 나는 단이를 이해하고 동정한다.
그의 단호한 말투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나는 후 하고 숨을 들이쉬고는 말을 이었다.
"안 바쁘면, 나…… 아무 얘기나 해주면 안 돼?"
[아무 얘기나?]
"진짜 아무 얘기나."
-9화
그날도 단이는 아침 일찍부터 은형이에게 전화를 건다.
권은형, 다정다감한 아이.
그는 늘 그러하듯 다정하게 단이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는 담담하게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을 서술했다.
그 서술은 담담하고 체념어렸으며, 물기가 가득했다고 생각한다.
꼭 비가 오고 눅눅한 가을날, 집에 들어와 물에 젖은 머리를 말리던 기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난…… 소설이…… 진짜, 싫어.”
“소설?”
우느라 내 말은 드문드문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인 채 소매로 눈물을 문질러 닦아 냈다.
왜 소설이 싫냐 하면, 아픈 사람의 상처를 계속 찌르기 때문이다.
찌르고, 찌르고 또 찔러서 결국 상처에서 피고름이 새어 나올 때까지,
그렇게 해서 아픈 사람이 상처를 견디다 못해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게 될 때까지 그렇게 계속.
사실 모든 인터넷 소설의 인물들에게, 사랑이란 불행이 남긴 상처로부터 강요된 것일지도 모른다.
-
이것은 얼마 지나지 않을 미래의 이야기.
나는 이 대목에서 많이 울컥했다. 글 쓰는 것을 즐기는 입장에서 나는 악인이었다.
나는 나의 소설 속 주이공들에게 수많은 상처를 안겨주고서 이러면 멋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웃었고, 즐겼다.
그래 그렇다. 아픈 사람의 상처를 계속 찌른다.
계속 찔러서 결국 그 존재가 자신을 치유해줄 누군가를 찾아나설 수 있게.
누군가에게 끝내 기대야하게. 나는 그렇게 폭력을 휘둘러왔다.
누구보다도 소설은 단순히 소설이 아닌 이미 하나의 세상이라 생각하는 주제에 나는 그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받은 그 아이가 사랑스러운 것은 여전하다. 이 모순 됨이 우수웠다.
사실 단이도 그렇지 않은가.
소중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상황에 던져놓고, 언젠가 이 일이 또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 던져놓고.
그래서 단이도 그렇게 상처를 받다가 결국 은형이에게 털어놓는 것이겠지.
처음으로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늘여놓는 단이.
네가 그럴 수 있기까지 얼마나 아팠고, 혼자서 괴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으며, 홀로 울음을 터뜨렸을까.
"나는, 3월 2일이 아닌 날에도… 꿈을 꾸는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평범한 아침이야.
그런데, 교복을 봤더니 교복이 바뀌어 있어. 벽에 걸린 시계도, 평범한 것으로 바뀌어 있고.
부모님은 그대로고. 집도, 그대로인데. 달라진 건 그 두 개 뿐이야.
아침을 먹고, 가방을 챙기고 문을 나서는데……."
나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반여령이 없어."
[…….]
"반여령이, 너희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9화
그리고 단이는 모든 것을 그 다섯에게 털어놓는데 성공한다.
나머지 다섯은 단이를 이해하고 걱정해준다. 그리고 그들은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그들은 그랬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처음 이들을 마주했을 떄, 난 동갑이었는데 어느새 난 대입을 앞두고 있다.
마지막 겨울방학이라 생각하면 지금도 먹먹하게 슬퍼온다.
동시에 내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마지막 방학이 다가왔더라면,
그래서 이들의 학창시절이 끝나간다면 그땐 정말로 펑펑 울어버릴 것 같다.
이 리뷰를 쓰는 지금 이 순간도 가슴이 벅차오르며, 가슴 아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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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은 당신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길 바라며.
"너무 좋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한 차례 불어든 바람에 반짝이며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