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시작된지 1년
전쟁의 승패는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군사력으로 승리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은 사라졌고
전진도 후퇴도 없는 고착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장기전을 예상하지 못한 군인들도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건국한지 일년도 되지 않아 한국전에 참전한 중국
중국은 대만 점령 계획도 미룬채 모든 전력을 한국전에 쏟았다.
그러나 춘계공세 대 참패로 재기불능의 인적 손실을 입자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이 무역제재를 가하자
중국은 조금씩 휴전을 생각하게 됐다.
북한은 대규모 반격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전쟁이 더 장기화 되기 전에
총공격을 개시해 적을 제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전쟁 종결을 원한다면
그것을 마다할 권한이 북한에게는 없었다.
소련은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자
미소 전면전으로의 확대를 우려했다.
단기간에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길어지자 스탈린은
위신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전쟁에서
수많은 미군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은 양측이 38선 부근에서 다시 만난
지금이 협상할 수 있는 적기라고 생각했다.
51년 5월 미국이 움직였다.
국무부는 찰스 마샬을 홍콩으로 보내 중국 핵심부의 측근을 만나게 했다.
소련과의 접촉도 시도했다.
미국이 물밑으로 협상을 제안한지
한 달 만에 공산측으로부터 반응이 왔다.
소련이 제3자 입장으로 휴전회담을 제안했다.
이틀 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말리크의 제안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51년 6월
남한 정부는 휴전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원하는 것은 북진통일이었다.
국회에서 휴전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곳곳에서 휴전 반대시위가 열렸다.
그러나 남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의 지시를 받은
유엔군은 소련의 회담 제안을 수락했다.
덴마크는 NATO(나토) 회원국으로 공산측은 자유진영 소속 병원선에서
회담이 개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실질적인 회담 교섭권을 마오쩌둥에게 위임한 상태였으나
배후에서의 영향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리지웨이의 제안이 있던 바로 그 날
스탈린은 베이징으로 전보를 보냈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원산의 덴마크 병원선 대신
개성지구를 회담 장소로 주장하라고 지시했다.
소련이 회담 장소로 선택한 개성은 당시 전선 사이에 있어
어느 쪽에도 속하지는 않았지만 공산측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개성에서 회담이 열린다면 공산측에
심리적인 이점을 제공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빠른 협상을 위해
유엔측은 공산측의 개성 제안을 받아 들였다.
회담 장소는 개성 선죽교 부근 99칸 한옥집, 내봉장
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의 막이 올랐다.
유엔측 수석대표는 미 해군 중장 조이였다.
조이는 공산주의를 증오하는 인물로
2차 대전을 실전 지휘한 베테랑 군인이었다.
그 밖에 공군 소장 크레이지
육군 소장 하디스
해군 소장 버크
그리고 한국대표로는 백선엽 소장이 참석했다.
"최초에 우리측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우리는 통일이 없는 휴전은 할 수가 없다.' 그래가지고 반대를 했죠.
하지만 유엔측에 협력하는 의미에서 우리도 여기에 참석을 하게 되었어요."
공산측 수석대표는 북한군 참모장 남일이었다.
중국군 육군 소장 쎄팡과 육군 상장 떵화
북한군 육군 소장 장평산과 이상조가 대표로 참석했다.
"정면 담판이 시작됐을 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을 했냐면...
한 이삼일이면 다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이제 전쟁을 끝낼 것 같으면 이전대로 회복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갔습니다."
남한은 전쟁 당사국이었지만 회담 초부터 배제되는 일이 발생했다.
회담 대표가 일방적으로 지명 통보됐고, 전세계 언론이 관심을 가진 회담이었지만
처음엔 남한 기자의 자리는 없었다.
"넌센스죠, 일종의. 한국 정부는 휴전회담을 반대하니까
한국 기자를 참석시킬 수 없다 이거예요... 아무개가 기자 숙소에 와서 한 말입니다,
'전세계 각국에 기자들이 다 모였는데 한국 기자까지 넣을라니까 스페이스가 없다.'는 거예요.
한정된 숫자를 넣을라니까... 생각해 보세요. 그게 한국 기자가 감당할 얘기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