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측은 개성에서의 회담을 대내외적인 정치 선전에 이용하려고 했다.
회담 당일 공산측은 개성 부근을 먼저 점령하고
회담장으로 들어가려는 유엔측 집행인을 1시간 동안 저지했다.
백기를 단 것은 휴전회담 대표라는 표식으로
양측이 사전에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공산측은 유엔측의 항복 협상이라고 선전했다.
(북한방송)
"그렇게 어마 무례하던 미제가 흰 기를 들고 담판장으로 우리를 찾아 왔습니다."
"이른바 강대국의 체면도 돌볼 처지가 못 된 모양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승리였습니다."
공산측은 승리의 표상을 끌어 모으는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깃발 크기에서 의자 높이 등 사소한 것까지 신경전의 대상이었다.
본 회담이 시작됐다.
발언은 수석대표만이 할 수 있었다.
참관 형식으로 참석한 남한 대표에게는 발언권이 없었다.
북한의 남일은 수석대표로 발언권이 있었지만
실제 공산측의 협상을 주도하는 것은 중국 대표였다.
협상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회담에서 무엇을 논의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부터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다.
유엔측이 비무장지대와 전쟁포로 문제 등 9개 항의 토의 안건을 제시하자
공산측은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할 것과 미국군 즉각 철수를 회담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다.
첫 회담은 입씨름 끝에 아무런 소득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그 후 10번의 회의가 더 열리고 나서야 공산측은 자신들의 주장을 양보했고
양측은 5개 항의 의제 선정에 합의할 수 있었다.
금세 끝날 줄 알았던 협상은
보름 동안 겨우 토의 안건 만을 정했을 뿐이었다.
협상이 시작되면서 유엔군 측은
현 전선을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협상의 진전을 위해
공격이 아닌 방어에만 집중하라는 것이었다.
병사들에게 오랜만에 휴식이 찾아왔다.
병사들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게 됐다.
의제 타결로 첫 고비를 넘긴 회담은
군사분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넘어갔다.
유엔측은 해군과 공군의 우세를 내세워 현 전선의 북쪽
해주와 장전에 이르는 곳에 군사분계선을 긋자고 주장했다.
공산측은 이에 반발하며 38도선을 들고 나왔다.
"제해권과 제공권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 동서에 우리가 섬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게 되는 소리가 아니죠. (웃음) 그래서 우리가 뭐라 했냐면...
전쟁은 38선에서 시작했으니까 옛날 38선으로 돌아가자."
안건 하나 하나가 넘기 힘든 고비였다.
휴전회담은 총성없는 또다른 전쟁이었다.
협상이 난항에 빠지면 소강상태였던
전선에서는 어김없이 대포 소리가 들려왔다.
전쟁을 끝내려고 시작한 휴전회담
회담이 시작된 이상 전투는 멈춰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회담 전 공산측은 전투 중지를 제안했지만
유엔군 측은 그 사이 공산측이 군사력을 증강할 것을 우려해 이를 거절했다.
그 결과 협상 중에도 전투는 계속됐다.
7월 30일
450대의 폭격기가 평양을 공습했다.
이 폭격으로 평양에서만 6천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유엔군의 공중폭격은 협상에서
주도권을 갖기 위한 일종의 압력이었다.
군사분계선 문제로 협상이 더디게 진행되던 8월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기관총과 박격포로 완전무장한 중국군이 회담장소를 행진하며
유엔 대표단을 위협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합의사항 위반이었다.
양측은 회담장 반경 800m 이내에 어떤 군인도 들이지 않겠다고 합의 했었다.
공산측은 부주의한 사고였다고 변명했지만
이 날 회담은 7분 30초라는 휴전회담 중 최단시간을 기록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8월 22일
공산측은 유엔군 역시 합의사항을 위반했다고 반발했다.
미군기가 개성 중립지역을 폭격했다는 것이었다.
현장을 둘러본 유엔측이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폭격 사실을 인정하지 않자
이튿날 공산측은 무기한 회담 중단을 선언했다.
협상이 장기화되자 서방 세계는
3차 대전으로의 확산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혹시 모를 핵전쟁에 대비한
공습대피훈련이 행해지기도 했다.
51년 9월 캐나다 오타와에서는
나토 12개 회원국들이 모여 상호안보협력을 다졌다.
서유럽 재무장과 그리스, 터키의 나토 가입이
이 자리에서 논의됐다.
한국전쟁이 나자 미국은 2차 대전의 패전국 일본의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미국은 연합국의 동의를 얻어 일본을 독립, 재무장시켜
소련, 중국의 위협과 맞서는 자유진영의 방파제로 삼고자 했다.
미 군정 하에 있던 일본에게
샌프란시스코 회의는 부활의 기회나 다름 없었다.
소련의 심경은 날카로워졌다.
소련 못지 않게 감정이 상한
일본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은 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중국과 대만은 어느 쪽을 대표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미영 간에 의견 불일치로 양쪽 모두 초대받지 못했다.
한국도 초대받지 못한 국가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48개 국가의 동의로 전범국 일본은 부활했고
아시아판 대소 봉쇄 정책은 첫 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