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별을 품은 아이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고려가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피침략국의 입장이었던 데다가, 주력군이 붕괴되고, 방어선이 몇 차례고 돌파당했으며, 종국적으로 수도 개경까지 함락당한데다가 당시 임금이었던 현종은 파천하여 나주까지 도피했을 정도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이 전쟁에서 고려의 수 많은 지휘관들 역시 전사했다. 대표적인 전사자로 행영도통사 강조, 서북면도순검사 양규를 들 수 있으며 그 외에도 대회덕(大懷德), 신영한(申寧漢), 채온겸(蔡溫謙), 승이인(乘里仁), 김숙흥(金叔興), 최원(崔元)등의 지휘관들도 목숨을 잃었다.1
이 중에서도 대장군 채온겸은 당시 전사한 고려의 최고급 무관들 중 한 명이다. 그는 통주 대전에서 고려의 본군이 붕괴된 뒤 거란이 자신들에게 항복한 고려의 행영도통판관 노전(盧戩), 그리고 합문사 마수(馬壽)를 통해 항복을 종용하자 중랑장 최질(崔質), 홍숙(洪淑), 방어사 이원구(李元龜), 방어부사 최탁(崔卓), 판관 시거운(柴巨雲)과 함께 노전과 마수를 체포하였으며, 통주의 군민들을 모아 거란군에 대한 항전 의지를 드러내며 통주를 사수했다.2
그런데 이 이후 전쟁 진행 기간 동안 채온겸의 기록은 사라진다. 그리고 전후의 기록을 통해서 비로소 채온겸이 어떻게 되었는지가 나온다.
[전몰한 대장군 채온겸과 신영한, 낭장 원태(元泰), 별장 최원, 습유 승리인(乘里仁), 태사승 유인택(柳仁澤)의 집에 쌀과 베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3
통주를 사수하던 고려군의 무관들 중 가장 고위직이었던 채온겸은 어느 시점에서인가 거란군과의 교전 끝에 전사했고,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그의 집에 쌀과 베를 하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채온겸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사했을까. 그에 대해서는 채온겸이 전사한 전투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만 채온겸의 마지막 행적과 고려, 거란군의 이후 상황을 통해서 그의 전투 및 전사 상황을 추정해 볼 수 밖에 없다.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가능성은 통주를 사수 하던 중 전사했을 가능성이다. 실제로 그의 마지막 행적이 통주성에서 끊기기도 했기에, 통주측에서 거란의 항복을 거부한 이후 그에 대해 거란군의 공격이 시도 되었다면 그에 저항하다 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통주에서 교전이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요사』 등지에서 모두 통주에 대한 공성과 관련한 정확한 언급은 없다. 다만 거란의 항복 요구를 거절한 뒤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성을 지켰으며 그로서 성안의 민심이 하나로 뭉쳤다.'(閉門固守, 衆心乃一)는 언급이 있는데4 이를 성 안의 민심이 무너지고 있던 상황에서(持檄至通州諭降, 城中皆懼) 민심을 수습하고 항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거란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방어해 냈다는 것인지는 해석여하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언급되는 통주에서 벌어진 대회전으로 고려군 주력을 붕괴시킨 뒤 거란군이 그대로 남하했다는 가정 역시 신빙성이 있지만, 통주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거란군의 곽주로의 진격 속도나5, 이후 흥화진의 서북면도순검사 양규가 곽주 탈환을 위해 통주에서 차출한 병력의 숫자가 통주의 방위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고작 해야 1천여명에 불과했던 점6 등을 생각해 보자면 통주에서 대규모의 공성전이 존재했고 그로서 고려군의 피해가 상당할 수 있다는 추정 역시 유효하다.7
통주성 공성에 대한 근거가 여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통주를 사수하는데에 주요한 역할을 한 중랑장 최질이 이후 빠른 속도로 승진을 거듭하여 고작 4년여만에 상장군이 된 것, 이에 대해 그의 전공이 언급되는 것을 고려해 보자면8 본 전투에서 소기의 전공을 세워 쾌속승진을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노전의 예 역시 근거로 볼 수 있다. 강조의 패전 이후 거란에 항복했다가, 이후 통주에 항복의 권유를 전하기 위해 거란에 의해 파견된 노전은 통주에서 고려군에게 붙잡힌 이후로 다시 고려로 귀순했다. 이 이후 노전의 전쟁 중 역할은 확실히 드러나지 않으나 전후에 전쟁 당시의 공훈으로 빠르게 승진하고, 그의 후손들 역시 전쟁공신의 후손으로 대우받은 것을 보자면 당시 통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자신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 크게 활약했다는 추정 역시 가능하다.9
이상의 근거를 생각해 보자면 통주에 주둔한 고려군이 거란군에 저항하며 성을 지키다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그 과정에서 대장군 채온겸 역시 전사했다고 보는 것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
한 편, 채온겸이 전사했을 만한 전투로 거론할 수 있는 또 다른 전투는 바로 노고달령(奴古達嶺) 전투이다. 『요사』의 기술상 특성 때문에 해당 지역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최소한 해당 전투가 서경 전역 이전에 존재했던 것을 고려해 보자면 서경 이북 지역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해딩 전투에서 당시 거란군의 도통으로서 군을 지휘하고 있던 소배압(蕭排押)은 고려군과 맞닥뜨려 그들을 격파했다.10 이는 상황을 고려해 보건대 완항령 전투에서 김훈과 신영한, 김계부, 이원등이 거란군의 패잔 고려군 추격섬멸을 기습을 통해 일시적으로 격퇴한 뒤에 있었던 일로 생각된다.11 완항령은 통주와 곽주 사이에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데12, 이는 이후 신영한과 이원의 행적을 고려해 볼 때 타당하다.13 교차검증을 해보자면, 곽주 방면으로 도주하던 고려군을 추격하던 거란군이 김훈과 신영한 등지에게 격퇴되자, 이에 대해 소배압이 직접 상황을 살피기 위해 전진했다가 고려군의 완항령 및 노고달령의 매복 고려군을 무너 뜨린 것으로 추정해 볼 만 하다.
물론 요사의 언급에서는 곽주와 영주의 항복 이후에 노고달령 전투가 언급된다. 하지만 해당 부분은 한 날짜에 모든 전투 및 함락이 몰아서 기술된 것이므로 노고달령 전투는 완항령 전투와 비슷한 시기, 비슷한 위치에서 일어났던 전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더 나아가 아예 완항령의 이칭이 노고달령이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자비령의 이칭이 절령이었듯이 말이다.14
노고달령 전투의 고려군 지휘관이 완항령 전투에 참여한 김훈, 신영한, 이원, 김계부등과 동일했을 수 있다. 그러한 가정의 경우 노고달령 전투에서 패전한 고려군이 곽주 방면으로 퇴각했고, 이후 병력이 이원화되어 일부는 성주 또는 서경 쪽으로 이동, 일부는 곽주에 주둔하며 해당 지역을 사수하고자 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하지만 거란군 추격대를 막는데에 통주성의 병력이 출성했고 그 지휘관이 채온겸이었다면 신영한 등의 곽주로의 철수 이후 채온겸이 해당 전투에서 패전 후 전사했을 가능성 역시도 존재한다. 물론 거란군 역시도 통주성의 병력이 출성치 못하도록 여러 조치를 강구했을 터이고, 통주에서 출성한 채온겸이 거란군을 우회하여 완항/노고달령에 주둔할 수 있을 지 역시도 넌센스이기에 상대적으로 가능성 자체는 적은 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통주 대전-서경 전역 사이에 존재했던 야전 중 채온겸이 전사했을 만한 야전을 찾자면 노고달령 전투가 가장 대표적으로 거론되므로, 해당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채온겸이 전사했을 만한 또 다른 전투는 2차 곽주 전투이다. 해당 전투는 양규가 흥화진에서 차출한 7백여명의 병력에 더해 통주에서 차출한 1천여명의 병력, 도합 1,700여명의 병력으로 곽주에 주둔중이던 거란군을 급습하여 섬멸, 곽주를 탈환한 전투이다. 해당 전투에 참전한 고려군 지휘관은 양규 이외에 언급되지 않는데15, 통주에서 병력을 차출하는 과정에서 당시 통주를 지키고 있었던 채온겸 역시도 통주 차출군의 지휘관으로서 양규의 휘하로 전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다가 곽주 전투에서 불의의 공격으로 전사했을 공산이 존재한다.
이외의 전투들, 특히 거란이 회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들에서 채온겸이 전사했을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상에서 전투들이 채온겸이 전사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전투들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채온겸의 행적 자체가 사료에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역시 추정이며, 실제로 채온겸이 전사한 전투에 대한 확증은 내릴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역시도 2차 고려거란전쟁의 공훈자 중 한 명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1.이 밖에도 전사한 고려군의 장령, 장관들은 많지만 본 글에서 이하는 생략한다.
2.『고려사절요』 권3, 현종 1년 11월, 又使盧戩及其閤門使馬壽持檄, 至通州, 諭降, 城中皆懼. 中郞將崔質洪淑投袂而起, 執戩及壽, 乃與防禦使李元龜副使崔卓大將軍蔡溫謙判官柴巨雲閉門固守, 衆心乃一.
3.『고려사』 권4, 세가 권제4 현종 2년 4월 13일.
4.위 사료와 동일. 『고려사』 열전 7권 양규 열전에도 동일 기술이 존재한다.
5.『고려사절요』 권3, 현종 1년 12월 6일.
6.『고려사』 권94 열전7, 양규 열전, 率兵七百餘人, 至通州, 收兵一千.
7.서인한, 『한국의 성곽 공방전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73쪽.
8.『고려사』 권94 열전7, 황보유의 열전, 上將軍崔質, 又以邊功, 累拜武職.
9.『고려사』 권 4 현종 5년 8월 26일, 현종 9년 2월 11일, 권5 현종 14년 9월 28일, 덕종 즉위년 9월 5일, 권75 지29, 선거3 전주등.
10.『요사』 권15 본기 권제15, 성종본기 6권. 통화 28년 11월 무자.
11.『고려사절요』 권3, 현종 1년 11월 24일.
12.안주섭, 『고려거란전쟁』, 경인문화사, 2003, 131쪽.
13. 신영한은 곽주로 철수후 그 곳에서 곽주를 사수하다 전사했으며 이원은 이후 서경 전투에 참여했다가 지채문의 패전 이후 개경으로 도주했다.
14.『세종실록』 권152, 지리지 황해도 황주목 서흥 도호부.
15.『고려사절요』 권3, 현종 1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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