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5년 음력 6월 여허측은 '부양구의 여동생'을 매개로 하여 옹기라트와 정략혼 관계를 구축코자 했다. 정략혼을 기반으로 한 여허와 옹기라트간의 동맹체결 가능성이 고개를 들자, 누르하치 휘하 제장들은 해당 상황을 건주에 대한 큰 모욕이자 위협으로 여겼다.
이 때 건주의 제장들은 정략혼 동맹이 이루어지기 전에 여허를 공격하여 두 세력의 연합 가능성을 차단하고 곧장 여허를 격파, 정복하자는 의견을 주장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이에 대해 여허의 노녀 문제를 이유로 삼아 여허를 공격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동시에 누르하치는 '여허의 노녀'로 인해 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많은 나라들이 몰락했다고 말했으며,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존재가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인데 이 의도에 따라 전쟁을 일으켰다가는 어찌되든간에 좋은 일은 없을 것이라는 논조로 전쟁이 불가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누르하치가 그러한 미신적 이유로 전쟁을 개전치 않았을 확률은 한 없이 0에 수렴한다고 보여진다. 누르하치는 이미 이전부터 '여허의 노녀'와 그녀와 자신간의 약혼 파기 문제를 전쟁에 대한 명분으로 많이 삼아왔는데, 그런 그가 지금서 그녀를 전쟁명분으로 삼아선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된다. 지금에 와서야 '여허의 노녀'의 존재의 악함(?)을 깨달은 것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서도, 현실적으로 분석하자면 누르하치가 내세운 전쟁불가 사유는 결국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고 여겨진다.
누르하치는 현실적인 인물이었고 그렇기에 현실의 사정을 간과하면서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다. 자신의 결정 하나에 자신의 나라의 국운이 걸린만큼, 그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전쟁을 결정해야 했다.
누르하치가 염두에 둔 '현실적 요소'들은 무엇이었을까. 크게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첫번째는 '여허의 노녀'가 시집을 갈 대상이 다른 여진계 세력같은 것이 아니라 '옹기라트'였다는 것이다.
여허는 여진 세력으로서 누르하치가 언젠가 반드시 정복해야 하는 당위성이 존재하는 세력이었다. 하지만 옹기라트는 여진 세력이 아니라 몽골계 세력이었다. 즉슨 오히려 당시 옹기라트는 건주로서는 연대를 모색해야 하는 세력이었다. 여진의 통일을 이루기도 전에 그들과 원한 관계가 생기는 것은 누르하치로서는 경계해 마땅한 상황이었다. 누르하치는 오히려 몽골과의 장기적인 연대를 통해 여허 병합 이후 그 이상의 상황을 대비해야 했는데 이러한 문제로 벌써부터 옹기라트와 대립각을 세울 수는 없었다.1
그렇기에 누르하치가 이전과는 다르게 '여허의 노녀를 남에게 준다는 이유로 출병할 수는 없다'고 한 것이다. 이번 사례에 한하여, 여허의 노녀가 타 세력에 시집을 가는 것을 명분으로 삼으면 '옹기라트에게 처를 준다'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는 셈이 된다. 그것은 옹기라트를 적으로 돌리기에 다분한 명분이었으므로 누르하치로서는 그러한 명분을 내세우며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다.
옹기라트와의 대립 가능성은 분명 여허를 공격하기 힘든 큰 문제였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사실 그 문제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큰 문제들 역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가 염두에 둔 '큰 문제'란 무엇인가. 이 때 누르하치가 가장 크게 염두에 둔 것은 바로 여허의 등 뒤에 도사리고 있던 명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여허가 옹기라트를 상대로 이러한 정략혼을 제안한 것 역시 명나라와의 공조체제를 믿고 벌인 일이었다. 명나라는 건주가 여허를 상대로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끔 하는 강력한 억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여허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당시 누르하치의 여허 병합을 바라지 않는 -즉슨 변경세력의 통합을 바라지 않는 명나라와의 전쟁을 각오해야 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이, 당시 여허에는 1천여명의 명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2, 누르하치가 여허를 공격하면 그들과의 충돌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들을 섬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문제는 그 1천여명의 명군이 섬멸된 뒤 허투 알라를 향해 진군해 올 명의 군대였다.
당시의 건주에는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한 역량 출중한 지휘관들과 우수한 병사들이 다수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의 대군을 상대로 한, 언제까지 계속될 지 모르는 충돌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철저한 군사, 외교, 물질적 준비 끝에 전쟁을 하더라도 상대가 힘든 것이 바로 명나라라는 제국이었다. 관외에 존재하는 명의 세력만을 충돌대상으로 한정 하더라도 그 부분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명에 맞설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명과 충돌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누르하치가 여허와의 전쟁을 꺼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명과의 군사적 충돌이 가지고 있는 위험부담과 더불어, 명과의 외교적 타협 가능성 역시도 누르하치로서 명과 충돌할 수 없는 이유중 하나였을 수 있다. 즉슨, 당시의 누르하치로서 는 아직까지 명과 외교적으로 협의를 할 수 있다고 보고 그 가능성을 무위로 돌릴 만한 충돌을 꺼려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이 시점의 누르하치가 명나라와의 외교적 협의를 통한 지지 확보와 그를 통한 여진 지배권 확립에 아직까지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이로부터 1년여 뒤, 즉슨 겅기연 한에 즉위한 뒤 신임 요동순무 이유한에게 부임 축하에 관한 사절을 보낸 것을 비롯하여 누르하치가 후금 건국 이후 초기에 취한 정책이나 행동을 생각해 보자면 최소한 아직까지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견해도 가능성이 있다. 확실한 것은, 외교적 행동을 통해 명으로부터 여진 통합에 대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건 혹은 이미 명나라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건간에 누르하치는 최소한 이 시점에서의 명과의 충돌은 바라지 않았다.
외교적 상황과 군대의 준비 상황뿐 아니라, 당시 건주의 내부 물자 상황이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 역시도 누르하치가 전쟁을 망설이는 원인중 하나였다. 요컨대 암반들과 버일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위시로 기세를 타고 개전, 상황과 행운이 맞물려 전쟁에서 승리를 해나가더라도 건주의 당시 물자적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그 승리의 적극적 이용이 힘들 뿐더러 역으로 체제 유지조차 힘들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여허라는 세력 하나만을 병합, 흡수하는 것은 각오를 단단히 먹으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허와의 전쟁이 자동적으로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명나라와의 전쟁은 승전을 이어나가더라도 결과적으로 많은 물자-특히 식량의 소모를 불러와 당시 건주의 식량 문제를 압박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우선 여허 공격에 대한 의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에 합당할 것 같다. 누르하치가 셋째 논거(물자 문제)를 표면적으로 내세운 것은 여허에 대한 공격 논의가 누르하치의 거부로 인해 완전히 무산된 이후였기 때문이다.
누르하치가 건주의 버일러들과 제장들의 여허에 대한 공격논의를 일축했음에도 불구하고 건주의 버일러들과 제장들은 계속해서 여허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였다. 누르하치는 그들이 계속해서 자신의 전쟁불가론을 거부하자 그들에게 역정을 내며 "내가 출병하겠다고 해도 (너희들이 그것을)반대해야 합당하다."3면서 무조건 전쟁만을 고집하는 그들을 힐난했다. 그는 자신의 버일러들과 제장들이 상황을 헤아려 전쟁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기를 바랬지만, 여허가 세력을 불리는 상황에서 그들로부터 건주가 모독을 당했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 상황을 생각치 않고 전쟁을 고집하는 것에 대해 강한 질타를 한 것이다. 결국 누르하치의 이러한 힐난으로 말미암아 여허에 대한 정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주장이 나오지 않았다.
1.여기서 그 이상의 상황이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관외에서의 패권 확보를 위한 주변 강대세력과의 경쟁은 기본적으로 포함해도 무방할 듯 하다.
2.만주실록 계축년 음력 12월
3.만문노당 을묘년 음력 6월, bi cooha geneki seme mitaci acam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