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명나라의 요동총병 장승윤은 1615년 음력 6월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이전 1608년 시기에 요동아문-건주간 협의에 의해 확정된 명-건주간 경계에 대해 대대적인 순시를 진행하였고, 명 조정이 판단하는 명의 요동경계 내부로 들어온 건주 세력에 대해 영역내에서의 퇴거와 파종곡식 포기를 요구했다. 이것은 당시 요동아문-건주간의 협의가 명 조정의 허용 혹은 묵인 하에 진행된 것이 아니라 요동아문의 순무 조즙과 이전의 요동총병 이성량의 독단으로 진행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명 중앙 조정으로서는 당시의 협약은 무효했고, 그렇기에 건주의 범하, 채하, 삼차아 점유는 명의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흔드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건주에게 퇴거를 명령한 것이다.
한편 누르하치는 누르하치대로 이러한 요구에 크게 분노했다. 그로서는 이미 거의 7~8년전에 합의된 사안이 명측의 번복으로 파기되고 파종한 곡식을 수확하지도 못하며 퇴거하게 생긴 것이다. 합의의 파기도 무척이나 불쾌한 요소가 될 수 있었지만 식량문제 역시도 누르하치의 발목을 잡는 요소였다. 당시 건주의 인구는 이전에 비해 상당히 많이 늘어난 상황이었으며, 그러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이듬해에 파종할 종자를 뺀 대부분의 수확곡식을 수확후 1년 안쪽으로 자체적으로 소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범하, 채하, 삼차아의 농지에 파종한 곡식들을 회수치도 못하고 쫓겨나게 된다면 건주로서는 식량의 문제가 급하게 되며, 이듬해의 식량 생산 역시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누르하치는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명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명과의 충돌은 아직 시기상조였다. 그는 아직 충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명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여허를 복속시킬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와전히 고분고분 물러나진 않았으며, 명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했다. 이에 대해 파견 관원 동국운은 누르하치의 태도가 심히 건방지다고 평했다.
이러한 일로 인해 누르하치의 영역은 일시적으로 수축했다. 누르하치가 상당한 노력을 들여 확보했던 농지는 다시 명나라에 의해 넘어갔고 해당 경계에는 새로운 석비가 세워졌다. 누르하치로서는 쓴 맛을 느낄만한 사건이었으나, 아직 그의 굴욕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1615년 같은 달, 여허의 버일러 부양구가 자신의 여동생을 몽골 칼카 5부의 구성세력, 옹기라트의 수장중 한 명인 바가다르한의 장남 망굴다이(manggvldai)1에게 시집을 보내어 정략혼 관계를 구축하려 한다는 소식이 건주에 전해졌다.2 여허와 칼카 5부 세력의 정략혼-동맹 관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었으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정략혼의 대상으로 선택된 여인이 바로 누르하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정략혼의 대상이 된 여인은 1597년 누르하치가 여허의 선제안으로 말미암아 결혼을 약정하여 폐백을 보냈으나 여허측의 돌연 거부로 결혼이 무산되고 예물은 예물대로 갈취당했던 그 '여허의 노녀'였다.
누르하치에게 있어, '여허의 노녀' 문제는 역린적인 문제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누르하치에게는 '여허의 노녀' 문제를 여허에 대한 공격 명분, 그리고 울라에 대한 공격 명분3으로 삼은 전례가 있다. '여허의 노녀'와의 파혼 문제는 누르하치가 겪은 일생일대의 모욕중 하나나 다름 없었고 그렇기에 해당 문제를 상대국에 대한 전쟁의 명분 중 하나로 적용시킨 것이다.4 그런데 그것을 뻔히 알고 있을 여허 측에서 옹기라트 세력에게 그녀를 시집보내려 하니, 누르하치로서는 여허로부터 다시 한 번 모욕을 받는 셈이었다.
여허의 버일러인 긴타이시와 부양구가 이 시점에서 부양구의 여동생을 옹기라트에 시집보내기로 한 것은 건주를 견제하기 위한 정략동맹이 급했던 탓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대건주관계에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 여허측 역시 부양구의 여동생이 상당히 민감한 인물, 요컨대 갈등의 핵심인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이전에 있었던 건주-여허간 전쟁에서의 누르하치의 자신들에 대한 전쟁선포 명분중 하나가 바로 그녀였는데, 여허가 그러한 사실을 몇 년도 지나지 않아서 망각했을리는 만무했다.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여허측이 다른 종실 여식이 아니라 그녀를 옹기라트에 시집보내려 한 것은 명-여허 공조 체제 하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건간에 누르하치와 건주가 자신들을 상대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리란 것을 인식한 덕이었다. 즉, 여허는 건주가 쉽사리 군사적 행동을 하지 못하는 틈에 사실상 애물단지로서 나이만 먹고 있는 그녀를 정략혼의 매개로 옹기라트로 보내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의 건주의 버일러들과 제장 역시도 여허가 명나라의 위세를 믿고 이러한 행동을 한다는 견해를 내비쳤다.5
이러한 여허의 행동은 건주의 버일러들과 제장들을 격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여허측이 자신들이 보낸 예물을 아직까지도 반환하거나 혹은 이 문제에 대한 정식적인 해결을 행하지 않았으면서 '여허의 노녀'를 옹기라트에 시집 보내고 그들과 정략혼 관계를 체결하려는 행동을 하는 것을 건주에 대한 큰 모독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에 따라 여허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여허의 노녀'가 누르하치의 자식들과 혼약을 맺었었다면 몰라도, 누르하치 본인이 그 혼약의 대상이었기에 여허의 해당 행동을 건주 전체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제장들은 누르하치에게 여허가 부양구의 여동생을 망굴다이에게 시집 보내기 전에 여허를 공격, 여허와 옹기라트간의 정략혼 성립을 막고 여허를 고립시켜 격파하는 전략을 상정했다. 그러한 전략은 이전에 울라와 여허간의 정략혼 관계가 체결되기전에 울라를 급습하여 멸망시킨 것과 일맥상통한 면이 존재했다.
그러나 버일러들과 장수들이 비분강개하여 여허에 대한 실질적인 공격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정작 모욕의 당사자가 된 누르하치는 오히려 자식들과 제장들의 그러한 행동을 통제하는 동시에 전쟁은 불가하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보다 큰 명분이 존재한다면 모르겠으나 '여허의 노녀'가 다른 곳에 시집을 간다는 이유만으로 공격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미 이전에도 '여허의 노녀'문제를 전쟁의 명분으로 많이 거론해온 누르하치가 이런 태도를 보이며 전쟁의 개전을 경계한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누르하치는 그녀의 존재 자체로 인해 숱한 전쟁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나라들이 망했으며,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존재가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건주가 승리하여 그녀를 데려온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숱한 나라들을 망하게 하느라 힘을 다 썼기에 얼마 못가 죽을 것이며 그리 되면 그것은 아국(我國)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이고도 미신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누르하치가 정말로 이러한 이유로 전쟁을 개시치 않았을 가능성은 무척이나 적다. 사실, 누르하치는 당시 전쟁을 일으킬 시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다수의 정치외교적 이유를 고려했다고 판단된다.6
1.누르하치의 오남 망굴타이와 이름이 비슷하지만, 누르하치의 오남 망굴타이의 경우 이름의 철자가 망굴타이(manggvltai)인 반면 바가다르한의 장남 망굴다이는 망굴다이(manggvldai)로 약간 다르다.
2.만주실록 을묘년 음력 6월
3.부잔타이가 여허의 노녀와 혼인한다는 이야기를 명분으로 삼았다.
4.물론 '여허의 노녀' 문제가 역린적 문제라고 하더라도, 정말로 누르하치가 그 원한만으로 전쟁 행동을 벌인 것은 아니다. 누르하치가 전쟁을 벌이는데에 있어 가장 중대히 고려한 것은 언제나 정치적, 군사적 이득과 같은 공적 가치였다.
5.만문노당 을묘년 음력 6월
6.이상 만문노당, 만주실록 을묘년 음력 6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