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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에서 이어집니다.
평소에 자던 만큼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묘하게 피곤한 아침이다.
잠을 깊게 못 잔 걸까, 아니면 바뀐 잠자리가 영 익숙하지 않았던 걸까.
침대 위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고, 잠들지도 못한 채 삼십분 정도를 뒹굴다가 아침을 먹으러 내려왔다.
지난번 비즈니스호텔은 간단한 식사를 차려줬는데, 여긴 중식 뷔페를 준비해놨다.
어제 체크인 할 때 보니 장사 중이던 가게였는데, 그래서인지 음식의 수준도 준수한 편이다.
맛있는 식사로 배를 불리고 나니 조금은 기운이 나는 것 같다.
오후까지 짐을 맡기고 오늘의 첫 목적지인 ‘죠죠지’로 향한다.
나오기 전에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 도쿄는 맑은 뒤 흐림이라는데 이미 하늘엔 구름이 가득 껴있다.
아무래도 어제처럼 멋진 하늘을 보긴 힘들 것 같다.
어제 숙소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는데 아마 이 곳에서 울린 소리인 것 같다.
시간이 맞는다면 종을 울리는 모습도 꼭 카메라에 담고 싶지만, 흐려서 그런지 은근히 쌀쌀한 날씨에 종루의 사진만 담고 갈 길을 재촉한다.
도쿄타워의 야경과 함께 봤던 모습과는 또 다른 느낌의 모습이다.
어젯밤에는 절의 뒤편을 아름답게 수놓던 모습이 낮에, 그것도 흐린 날에 보니 꽤나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풍경은 조금 쌀쌀하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들려서인지 주변은 꽤나 사람냄새가 난다.
안에서는 법회가 한창이었기에 현판 사진만 짧게 담고 가람 뒤편으로 들어간다.
멀리서 전시실 간판이 보이기에 가봤지만, 아직 열기까진 시간이 제법 남았다.
이상하게 어제보다 쌀쌀한 날씨에 어디든 안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
‘본전’ 옆에 있는 ‘안코쿠덴’에 가니 ‘도쿠가와 가문 영묘’로 가는 길이 보인다.
참배할 생각은 없다만, 여기까지 와서 안 보고 가는 것도 섭섭한 일이다.
어젯밤에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던 동자승들이 영묘 가는 길을 따라 줄지어 서있다.
밝은 날에 보니 표정이 보여서일까, 하나하나 제법 귀엽게 생겼다.
조금 이따 나오는 길에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봐야겠다.
멀리서 보기에도 위엄을 갖춘 모습이 딱 봐도 지체 높은 사람을 모신 곳이라는 티를 낸다.
에도 막부의 실권자인 ‘쇼군’. 그 가문인 도쿠가와 가문의 영묘이니 아무렴 당대에서 가장 높은 격식을 갖춘 곳 중 하나일 것이다.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별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전시실의 티켓과 합쳐 할인 판매를 하고 있었기에 영묘와 전시실 표를 함께 산다.
옆으로 보이는 멋있는 문으로는 출입이 불가하고, 옆으로 난 작은 쪽문으로 영묘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기 전의 ‘죠죠지’와 현재의 ‘죠죠지’를 비교한 지도가 가장 먼저 보인다.
쇼군 가문의 영묘가 있는 절 치고는 그 크기만 웅장하지 구성 자체는 별 볼 일 없다 생각했는데,
글을 읽어 보니 본래의 절은 거의 다 파괴되고 근래에 들어 재건한 절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람의 구성 또한 크게 바뀐 것을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영묘에는 어떤 사람의 무덤인지 하나하나 현판이 써져 있지만,
한자를 읽고 이름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일본사에 빠삭한 것은 아니기에 영묘를 이루는 작품 하나하나의 조형에 집중해서 돌아본다.
크게 멋있는 구석은 없지만, 도쿄 한 가운데에 이렇게 고요를 지키는 공간이 있다는 점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마치 주변을 둘러 심어진 나무들이 시간의 흐름을, 그리고 복잡한 도시를 거부하는 느낌이 든다.
나무 중에는 동백도 몇 그루 있었는데, 멀리서 보기에 꽃잎에 소복하게 쌓여있는 눈이 너무 아름다워 카메라를 들고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눈이 아니라 꽃잎이 살짝 흰색으로 물든 것이었는데, 정말이지 겨울에 어울리는 색이다.
영묘를 나와 전시실로 향하는 길에 동자승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바라본다.
묘하게 다른 얼굴들, 손마다 들고 있는 바람개비, 그리고 털모자까지.
분명 오래된 녀석들도 아니고 동자승마다 표정이 크게 다른 것도 아니건만, 적절하게 묻은 시간이 작은 조각상들에게 개성을 심어준다.
전시실이 열리는 시간까지 10여분 남았기에 절 구석구석을 돌아보기로 한다.
절 한쪽 구석에는 제법 그럴싸한 추모 공간을 마련해놨다.
새겨진 글을 읽어보니 전쟁이 끝난 후 본토로 귀환하던 함선이 ‘불법적인’ 연합군의 포격으로 가라앉고, 그로인해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공간이었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죽은 안타까운 일이건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천벌’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서로의 불행에 있어서 온전한 마음으로 안타까워 할 수 없는, 이런 불편한 관계가 하루빨리 종식되길 바랄 뿐이다.
절의 경계를 따라 돌다 보니 ‘산게츠몬’보다 더 오래되 보이는 문이 나온다.
죠죠지의 옛 정문이라는데, 복원 과정에서 가람의 위치도 크게 바뀌었는지 어째 위치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이 문 덕에 전화 속에 사라진 절의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다. 적어도 지금보단 훨씬 내 취향에 맞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지금의 ‘죠죠지’는 온전한 절이라기 보단, 그 기능만을 살려놓은 모습에 가깝다.
절 자체의 철학이 없어 보이는 가람의 구성 때문인지 볼수록 하품이 난다. 산 속에서 풍경과 어우러진 한국의 고찰이 그리워진다.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며 경내를 돌다 보니 시간이 제법 지났다.
다시 돌아온 전시실 앞은 출입금지 표시 대신에 입장권 판매소 안내문이 걸려있다.
뭔가 이곳저곳 돌다가 돌아오니 입구가 열린게 꼭 포켓몬스터 게임을 하는 것 같다.
내부는 아쉽게도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 다만, 안에 전시된 ‘죠죠지’의 모형과 탱화는 돈을 지불해서라도 볼 가치가 충분한 것 같다.
모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꽤나 즐거운 공간이 될 것이다.
아주 정교한 ‘죠죠지’의 모형에, 차라리 이정도면 밖의 절은 소박한 느낌으로 짓고
디오라마에 제대로 신경을 써서 옛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마저 든다.
전시실의 의자에서 잠깐 앉아 지친 다리를 풀고, 지도를 켜 다음 갈 길을 찾아본다.
벤텐이케를 지나 ‘게이오기주쿠’로 향한다.
뒤편에 보이는 절은 왠지 다리도 아프고, 그다지 볼 것도 없어 보여서 지나쳤는데 돌아와서 찾아보니 아무래도 죠죠지와 관련된 장소였던 모양이다.
평소에는 남들이 안 가는 곳도 잘 돌아보며 다니는데, 한 번 게으름을 피웠다고 또 이렇게 놓치는 장소가 생겨버린다.
이곳 ‘시바코엔’은 ‘죠죠지’의 경내와 이어진 꽤 큰 규모의 공원이다.
지도를 통해 근처를 보니 아마 이 공원 부지 전체가 옛 ‘죠죠지’가 위치했던 장소가 아닐까 싶다.
공원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빵가루를 뿌리니 근처의 비둘기둘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불법인데 일본에선 별 상관없는 건가?
‘아카바네바시’를 지나 ‘미타’에 들어선다.
근처의 지하철 역 이름도 ‘아카바네바시’여서 중요한 다리인가 싶었다만, 따로 설명을 적어둔 곳은 보이지 않는다.
따로 조사해보니 이 다리의 유래는 적어도 16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당시의 그림에도 이 다리가 보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 표지마저 없었으면 강을 건넌다는 느낌도 잘 들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가 어제 도쿄타워에서 찍은 별 모양의 도로 근처인데, 위에서 본 밤의 아름다운 풍경과 달리 밑에서 본 낮의 풍경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다리를 건너 십여 분 정도 걷고 나니 오른쪽으로 게이오 대학의 동문이 보인다.
건물의 높이는 근처의 상가 건물과 크게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연히 옆을 돌아보게 만든다.
도쿄대도 그렇고, 일본의 대학들은 이런 아치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좁은 공간에서도 아치를 위해 건물의 2할은 가뿐히 쓴 모양이다.
이럴 바엔 굳이 동문을 만들 필요가 있나 싶다.
아무래도 발품을 팔아 정문까지 가지 않고서는 대학 안을 구경하기 힘들 것 같다.
시간도 벌써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정문까지 가서 구경하고 나오기엔 조금은 지쳤기에 근처 카페에서 잠깐 쉬며 시간을 때우다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야겠다.
안쪽으로 한참 공사 중인 건물이 보이긴 한다만 새로 짓는 중인지, 아니면 허무는 중인지, 고치는 중인지 알 길이 없다.
카페를 찾아보자, 뭐 어디든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멀리 도쿄타워가 보이는데, 아무래도 미나토 구에서는 어딜 가던 보이는 모양이다.
잠시 앉아 커피를 마시며 쌓인 사진들을 정리한다.
그러고 보니 여기 커피가 한 잔에 200엔 정도였는데 꽤나 싼 편이다. 부자 학교로 소문난 게이오인데, 그래도 대학로는 저렴한 건가?
커피도 마셨으니 이제 오늘의 점심인 중화요리를 먹으러 가보자. 미리 점 찍어둔 가게의 오픈시간에 맞춰 침입한다.
사실 중화요리 가게에서는 코스가 답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1인 코스가 갖춰진 중화요리 식당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코스가 없으면, 그 가격만큼 단품을 시키면 될 일이다. 메뉴판을 뒤적이며 코스를 짜보자.
개인적인 습관으로 처음 가는 중식당의 시작은 볶음밥으로 하지만, 일어 가득한 메뉴판을 읽다보니 먼저 나온 메뉴부터 시키게 되서 마파두부로 출발한다.
매운 음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지만, 숟가락을 멈추기가 힘들다.
다만 개인적으론 두부가 좀 더 작게 잘린 마파두부를 좋아하는데, 이건 꽤 큼직큼직하다. 두부전골 느낌이랄까?
잘 볶은 볶음밥이 나왔다.
동네 중화요리 가게든, 차이나타운의 가게든, 고급 중화요리집이든 볶음밥을 먹어보면 그 가게의 격이 나온다고 굳게 믿는 사람으로서,
이 집의 볶음밥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마파두부를 먹으면서도 볶음밥을 제법 기대하고 있었으니 평소랑 순서는 뒤바뀌었지만 공식은 앞으로도 유지될 것 같다.
적당히 볶음의 풍미가 잘 묻어난 고슬고슬한 밥이 식욕을 자극한다.
마지막 메뉴는 소롱포다.
육즙이 생명이자 상징인 소롱포이고,
그러다보니 피 안에 가득 찬 육즙을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먹기 위해 위를 살짝 베어 물고 육즙부터 처리한 뒤 먹는 식사법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래서야 소와 육즙이 뒤섞이는 맛을 느끼기 힘들지 않은가.
답은 하나다, 입천장이 까질지언정 크게 한 입에 먹으면 될 일이다.
사실 중간에 속이 궁금해서 반만 베어 물었다가 육즙이 사방으로 튀어서 꽤나 곤란했다. 이건 육즙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물풍선이다.
진한 육즙으로 입 안이 제법 꿉꿉했기에 상큼하고 달달한 디저트를 하나 주문한다.
그릇을 다 비워갈 때 쯤 갑자기 옆에 있던 종업원이 걸려있던 샤미센을 뜯기 시작하는데,
당연히 장식품인 줄 알았던지라 조금 놀라서 잠깐 자리에 앉아 감상을 하고 가게를 뜬다.
배를 잔뜩 채우고 나니 걸을 명분이 생겼다. 천천히 걸어 게이오 대학의 정문에 도착하고 나니 공식 기념품 판매를 하는 곳이 보여 호기심에 잠시 들어간다.
뭐 이것저것 많긴 한데, 여기에 다니지도 않으면서 굳이 살 필요는 없어 보인다.
동문은 잘 지어놓고 정문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내가 다닌 학교도 참 멋없기로 유명한 학교였는데, 여긴 한 술 더 뜨는 느낌이다.
지난 대학 구경이 ‘도쿄대학교’였던지라 기대가 크긴 했는데, 왠지 여긴 10분 정도만 돌아보고 나오게 될 것 같다.
안 그래도 딱딱한 건물에 겨울까지 묻히니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사진으로 봤을 때 ‘게이오기주쿠’에서 유일하게 보고 싶었던 이 캠퍼스의 ‘구 도서관’은 공사가 한창이다.
설마 동문에서 어렴풋이 보인 공사장이 이 곳일 줄이야... 더 볼 것도 없겠다 싶어 왔던 길을 돌아 나간다.
‘게이오기주쿠대학’이 있는 곳에서 다음 목적지인 ‘센카쿠지’까지는 걸어서 갈 만한 거리였기에 천천히 걸어보기로 한다.
사실 ‘게이오’에서 생각보다 너무 금방 나와서 시간이 꽤나 남는다.
초행길이기에 조금 헤매긴 했다만, ‘센카쿠지’로 가는 길목인 ‘이사라고자카’에 무사히 도착했다.
걷다보니 나무로 된 표지가 보여 읽어보니 명나라 사람인 ‘인베스’가 살았던 언덕이라는데 그냥 동네 언덕길 같은 곳에 이런 유래가 있으니 꽤나 재밌게 느껴진다.
그런데 아무리 동네를 봐도 큰 절이 있을 동네는 아닌 것 같은데, 일단 구글이 가라는 길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 보자.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조금 들어가니 멀리 절의 입구가 보인다.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 문은 산몬인 모양이다. 오전에 보고 온 ‘산게츠몬’도 산몬인데 확실히 이 산몬의 크기로 절의 크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모양이다.
저 뒤편으로 ‘센가쿠지’의 입구가 보인다.
안쪽으로 오니 조금 더 내가 아는 ‘산몬’에 가까운 모습의 문이 나온다.
아무래도 ‘센가쿠지’의 입구는 이곳이 맞는 것 같은데, 그럼 들어오기 전의 문은 뭐였을까?
아직 가람의 구성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고 심지어 일본의 절인지라 그 구조가 더욱 생소하게 느껴진다.
예전에 다녀왔던 신사나 절에서는 이런 문을 두고 ‘로몬’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앞의 명판을 봐도 이곳이 ‘산몬’이 맞는 모양이다.
사진을 찍는데 셔터스피드가 영 나오지 않아 하늘을 보니 아무래도 맑은 하늘을 기대하긴 그른 것 같다.
그래도 흐린 날엔 한층 더 주변이 고요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이런 절을 돌아볼 때엔 제법 괜찮은 환경이긴 하다.
다만 사진장이로써 사진이 칙칙하게 나온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이곳 ‘센가쿠지’는 ‘아코 의사’로 불리는 47명의 낭인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사에선 제법 굵직한 일 중 하나인 ‘아코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인데,
흔히 말하는 사무라이 정신에 대해서 공감을 못하는지라 그다지 위인을 모신 곳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분명 ‘충’이라는 개념은 옛날에도, 지금에도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일본에서 표현하는 ‘충’의 개념은 일종의 요소로 만들어 팔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나에겐 너무 과격해 보인다.
입구에서 향을 사다가 분향을 할 수도 있는데, 위에서 말했듯이 별로 위인으로 느끼지는 않기에 조용히 돌아만 보고 가려고 한다.
조금 놀란 건 외국인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인데, 일종의 기념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위인으로 여기고 기리기 위함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일본의 절이나 신사를 다니기 전에 한 번 알아보고, 가급적 뒷맛이 찝찝해질 행동은 하지 않는 주의인지라 어쩔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아사노 나가모리’의 아내인 ‘아구리’의 묘를 마지막으로 이 장소를 떠난다.
비록 나는 이곳에 볼멘소리만 잔뜩 냈지만, 그래도 이곳에 묻힌 ‘아코 의사’와 그들이 관련된 사건은 일본에서 유명한 가부키인 ‘츄신구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이들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림을 받는다.
그래도 돈을 쓰는 사람은 나니까, 내 입맛대로 말해도 문제는 없겠지.
바로 옆에는 기념관도 있었지만, 굳이 이 이상 볼 건 없어 보인다.
산몬을 나와 5분 정도 걸으니 도착한 지하철역. 이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을 향해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마지막 일정은 이왕이면 숙소와 가까운 곳 위주로 잡아봤다.
도시를 여행할 때 공원에 들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마침 호텔 근처에 ‘시바 리큐 은사 정원’과 ‘하마 리큐 은사 정원’이 있어서 마지막 일정으로 아껴뒀다.
맨 처음엔 ‘시바 리큐’라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와서 한자를 보니 ‘시바 이궁’, 즉 별궁의 개념으로 천황의 임시 거처가 있던 곳인 모양이다.
은사 정원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아마도 천황이 도쿄에 하사했으니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인 모양이다.
일본 천황이 실제 갖는 권력을 생각해보면 하사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도시 한 가운데에 있는 공원이라는 점은 참 좋았는데, 아쉽게도 호수의 반 정도는 물을 막고 공사가 한창이다.
아무래도 호수 가운데의 작은 섬까지 갈 수 있는 다리를 놓는 모양이다.
주변 경관도 묘하게 아쉽고, 하늘도 흐리고... 일단은 호수 둘레를 따라 난 길을 걸어본다.
작은 언덕, 돌다리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놓은 모습이 아기자기하게 느껴지기도, 허세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사장 특유의 을씨년스러운 느낌과, 겨울 공원이 주는 휑한 느낌이 겹쳐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계절엔 좀 더 꽉 찬 풍경이려나?
한 바퀴 돌아봤지만, 딱히 쉴만한 공간도 없고 날씨는 변덕스러워서 갑자기 우박이 떨어지기도 하고, 오래 머물긴 그른 것 같다.
입장료가 조금은 아깝지만 ‘하마 리큐 공원’으로 가봐야겠다.
종일 걸어 다녀서 그런지 공원에 이제 막 도착했건만 발바닥이 꽤나 아프다.
같은 ‘리큐’ 출신의 공원인 ‘시바 리큐 은사 정원’에서 실망을 해서 그런지 입장료를 선뜻 내기가 꺼림칙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안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니 동전지갑을 털어 입장료를 내고 공원 안으로 향한다.
꽃도, 나뭇잎도 없는 정원. 이런 건 애초에 큰 기대도 하지 않았다.
풍광은 별 거 없지만 그래도 이 공원 안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챠야’가 몇 군데 존재하는데, 잠깐 앉아 따스한 차를 한 잔 마시며 몸을 녹이고 싶다.
음... 첫 번째 ‘챠야’에 도착했지만 아무래도 따스하게 몸을 녹이긴 그른 것 같다.
그리고 왠지 근처에 기념품 가게는 보여도 찻집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가야할 것 같은데, 일단은 다리가 아프니 잠깐 앉았다 가기로 하자.
그래도 안내판까지 있는 걸 보니 ‘나카지마노오챠야’는 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지도로 봤을 땐 공원이 그리 커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다 보니 길을 헤매서 그런지, 꽤나 넓게 느껴진다.
그리고 딱 봐도 영업용이 아닌 전시용인 건물이 보이고, 여기도 꽝인가 싶었을 때.
호수 안의 섬으로 가는 다리가 보인다. ‘시바 리큐 공원’도 아마 이걸 하고 싶었던 걸까?
말차 한 잔과 차와 함께 즐길 다과를 주문한다.
온돌에 익숙한지라 안은 그렇게 따스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밖에서 한참을 걷다가 잠시 바람이 들지 않는 곳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몸의 긴장이 풀린다.
밖이 간간히 밝아져서 미닫이문을 열고 밖에 나가보니 구름이 아까보다 많이 옅어졌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구름이 걷힐 것 같기도 하다.
차를 한 잔 더 시키고 몸도 녹일 겸, 가져온 책도 마저 다 읽을 겸, 조금 더 눌러 앉기로 한다.
하늘까지 더 맑아진다면 금상첨화다.
비행기에서도 많이 못 읽고, 어제도 하루 종일 바빠서 아직 장수가 많이 남은 줄 알았는데 한 30분 정도 읽고 나니 역자 후기가 나온다.
책장을 덮고 창밖을 보니 분명 시간은 일몰에 더 가까워졌는데, 창밖을 보니 들어올 때보다 한층 더 밝아졌다.
욱신거리던 발바닥도 나아졌으니, 다시 움직여보자.
핸드폰으로 지도 어플 하나 켜면 길을 잃어버릴 일이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이런 공원에서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며 목적지로 직진하는 것도 멋이 없다 싶어 감에 맡긴 채 걷기로 한다.
이미 아까 길도 잃어버렸었는데, 별로 무서울 것도 없다.
아까 표지판에서 스쳐지나가듯 본 수상버스가 저 배인 모양이다.
예전에 아사쿠사 근처의 스미다 강가에서도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는데 노선이 궁금해진다.
다음 도쿄 여행엔 한 번쯤 배를 타보는 것도 제법 즐거운 일일 것 같다.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니 왔던 길을 방향만 바뀐 채 다시 걷고 있다. 또 길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이왕 길도 잃었으니 다 둘러보자 싶어 천천히 걷다 보니 멀리 탁 트인 곳이 보인다.
가까이 가 보니 작은 신사가 하나 나온다.
바로 앞에는 유채꽃이 잔뜩 심어져 있었는데, 아직 자리를 제대로 못 잡았는지 꽃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놓았다.
아쉬운 대로 바로 앞에 핀 매화로 만족하자.
분명 찍을 땐 매화가 주제였는데, 어째 콘라드 호텔 광고 사진마냥 찍혔다.
이제 슬슬 공원을 나가려는데 옆에 수령 300년의 소나무라는 명판이 보인다.
300년이라... 짧은 기간은 아니다만, 나무치고 오래 살았다고 느껴지진 않는 참 애매한 시간인 것 같다.
짐을 찾으러 호텔로 돌아가는 길, 사실 조금 피곤했기에 택시를 탈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여행인데 한 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유리카모메 선로를 따라 하마마쓰로 향한다.
공원 이름이 ‘이탈리아 공원’이라서 뭘까 싶어 들러봤다.
공원 둘레를 따라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 작품들의 복제품들이 전시 중인데, 아무래도 그래서 ‘이탈리아 공원’인 모양이다.
참, 직관적인 명명법이지 싶다.
‘이탈리아 공원’ 바로 앞에 있는, 야마노테센이 지나는 철길 밑으로 난 굴다리를 지나 호텔이 있는 ‘다이몬’ 근처로 향한다.
짐을 찾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하마마쓰쵸 역에 왔다.
처음 도쿄에 도착했을 때 JR 출구로 나왔던지라 당연히 탈 때도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옆의 빌딩을 통해 올라가야 도쿄 모노레일 역이 나온다.
거리상 다른 역으로 봐도 충분한 역도 환승통로로 이어주는 한국의 대중교통이 살짝 그리워진다.
서두른 덕에 조금 일찍 도착한 공항에서 남은 현금으로 기념품을 사고 전망대에 들러본다.
아직까지 공항이 여러 법으로 묶여 사진 한 장 찍기 힘든 우리나라다 보니 이런 시설이 있으면 꼭 들르는 편이다.
이쪽 터미널이 ANA가 쓰는 터미널인지, 주변을 둘러봐도 JAL은 안 보이고 ANA만 한 가득이다.
비행기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라운지에서 캄파리를 살짝 올린 맥주와 초콜릿, 비스켓으로 때운다.
하네다의 라운지를 사용해보니 김포의 라운지와 너무 비교가 된다.
경영난 이후로 각종 서비스를 줄이는 아시아나항공이니 라운지도 별 수 없겠다만, 옆 동네 항공사와 이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다시 김포로 떠나는 하늘길.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해 조금 허전했는데, 아무래도 안 먹길 잘한 것 같다.
흔히 해당 국가의 비행기나 선박은 그 나라의 영토로 간주한다고 한다.
일단 일본 국적기니까 대한민국 영공을 나는 지금도 일본이라 치자, 그래도 일본 여행기의 마지막 문단인데 일본에서 남기는게 뒷맛이 깔끔하니 말이다.
고작 이틀의 짧은 여행이건만 사진의 수도, 쌓은 추억도 여느 긴 여행 못지않게 가득 담아오는 느낌이다.
내심 ‘하루만 더 있었으면’라는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보낼 수 있는 이틀이란 시간 속에서 가장 많은걸 해본 이틀이었다.
그래도 다음엔 월요일에 연차라도 내고 다녀와야지. 참 짧고, 굵은 여행이었다.
- 후기 -
설날 준비에, 이사가 겹쳐 두번째 여행기가 많이 늦어졌습니다.
저는 흐린날을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만, 확실히 맑은 날에 비하면 사진도, 내용도 쳐진다는걸 이번에 느끼게 되네요.
다음 여행은 4월 말, 5월 초에 짧게 홍콩에 다녀올 예정입니다만 실제로 갈 수... 있겠죠?
굳은 결의로 비행기표부터 사놨으니 어떻게든 될겁니다 ㅎㅎ.
지난 여행 추억팔이도 끝났으니,
4월까지는 다른 분들 여행기를 열심히 뒤적이며 대리만족을 하며 버텨야겠네요.
다음 여행이 끝나고, 5월에 따끈한 여행기로 다시 뵙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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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 18.02.21 06: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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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보니 여러모로 비극이었습니다. 피해자로써의 일본 제국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지만요. | 18.02.21 12: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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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너무 짧다보니 힘이 많이 들어간 여행이라 다녀오고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도 언제나 여행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네요. 도쿄는 가까우니 가고자 하신다면 쉽게 다녀오실 수 있을 겁니다. ㅎㅎ | 18.03.16 17: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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