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애꾸눈 검객 야마모도 간스케(山本勘助)
야마모도 간스케 하루유키(晴幸) 호는 미치도키(道鬼)라고 하며, 외눈
박이에 한쪽 다리를 절름거리는 검객으로 유명하다.
미가와에서 태어났으며, 동향의 데라베(寺邊) 성주 스스키 휴가노가미 시
게노리(鈴木日向守重敎)에게 검술을 배웠다.
하루는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멧돼지가 덤벼들어 격투를 벌인 끝에 기어
코 잡기는 했지만, 그때 오른쪽 눈에 입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끝내는 애
꾸눈이 되고 말았다.
그후 오가타 나리우치(尾形成氏)로부터도 검술을 가르침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떠나 무사수업의 여행을 떠났다. 이 기간에 쓰가하라
보쿠덴에게서 신당류의 검술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하리마(播磨)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 지방
의 토박이 검사(劍士)인 하시모도 야나기도모에(橋本柳巴)라는 사람과 진검
승부를 벌인 적이 있었다.
물론 간스케가 승리하여 그를 쓰러뜨렸다.
그런데 이에 원한을 품은 하시모도의 제자 수십 명이 한데 모여 간스케
의 귀환길을 습격하였다.
간스케는 이것은 불공정한 싸움이라고 무시하려 했지만, 하시모도의 제
자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죽여 없애기만 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 간스케를 악인으로 몰아부쳐도
죽은 자는 입을 열 수가 없으니 어쩔 것인가.'
생각하고, 일제히 칼을 빼어들고 간스케를 덮쳤던 것이다.
검술에 자신이 있는 간스케는 종횡무진으로 칼을 휘둘러 댔다. 하지만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상대는 수십 명.
칼은 피범벅이 되었고, 눈으로는 땀이 쉴새없이 흘러들었으며, 몸은 지쳐
버려 끝내는 겨우 혈로를 뚫어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간스케는 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를 많이 입었다.
다른 상처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물었지만, 단 한군데 왼쪽 다리에
입은 깊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그 결과 간스케는 평생 한쪽 다리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불구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후 간스케는 고향에서 멀지 않은 순뿌(靜岡市)로 가서 동해 제일의 영
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이와가와 요시모도(今川義元) 밑에서 일하기를
희망했다.
소개하는 사람이 있어서 중역에게 부탁하여 2, 3회 전쟁터에도 출전하는
등 9년이나 기다렸지만, 끝내 이마가와는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았다. 신체
가 성하지 않은 자가 어찌 전투에서 충분히 활동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
이 주된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세상에는 버리는 신(神)이 있는가 하면 줍는 신도 있는 거와 같
이, 이 절름발이 야마모도 간스케를 불러쓰는 무장이 나타났다.
인접한 가히(甲斐) 지방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초임봉록은 100관이었다.
이때 신겐은,
"하인 하나 없는 간스케에게 100관의 봉록을 준다면 다른 하급부하들이
불평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간스케에게 시중드는 하인 하나를 붙여주는
게 좋겠다."
하고 사무라이 대장에게 명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여간 대단한 대우가
아니었다.
간스케는 이 덕분에 모든 준비를 갖추고 신겐을 알현하게 되었는데, 첫
눈에 신겐의 눈에 들어 그 자리에서 100관을 더 받게 되어 총 200관의 봉
록을 받게 되었다.
사실 간스케는 신겐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그해 11월부터 12월까지에 걸쳐 신슈(信州)의 9개 성을 점령하여, 신겐의
신슈 평정의 기초를 이루어놓은 것이다.
간스케의 검술은 매우 뛰어났던 듯 하다.
갑양군감(甲陽軍鑑)}이란 책에서는 검술에 능숙한 자를 다음과 같이 3단
계로 분류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자를 [병법유(兵法遺)], 기술이 뛰어나서 이
기는 자를 [병법자(兵法者)],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도 쉽게 이기는
자를 [병법인(兵法人)]이라 칭하고, 최고의 병법인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2
명의 무사를 들고 있는데, 그중 한 사람으로 야마모도 간스케를 꼽은 것이
다.
간스케는 1561년 가와나가지마(川中島)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62세라고도
하고, 70세라고도 한다.
From - 재미있는 검객이야기 -일본편-
유니텔 무예동 검도/ 거합도 게시판.
Written by - 유재주
야마모도 간스케 하루유키(晴幸) 호는 미치도키(道鬼)라고 하며, 외눈
박이에 한쪽 다리를 절름거리는 검객으로 유명하다.
미가와에서 태어났으며, 동향의 데라베(寺邊) 성주 스스키 휴가노가미 시
게노리(鈴木日向守重敎)에게 검술을 배웠다.
하루는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멧돼지가 덤벼들어 격투를 벌인 끝에 기어
코 잡기는 했지만, 그때 오른쪽 눈에 입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끝내는 애
꾸눈이 되고 말았다.
그후 오가타 나리우치(尾形成氏)로부터도 검술을 가르침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떠나 무사수업의 여행을 떠났다. 이 기간에 쓰가하라
보쿠덴에게서 신당류의 검술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하리마(播磨)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 지방
의 토박이 검사(劍士)인 하시모도 야나기도모에(橋本柳巴)라는 사람과 진검
승부를 벌인 적이 있었다.
물론 간스케가 승리하여 그를 쓰러뜨렸다.
그런데 이에 원한을 품은 하시모도의 제자 수십 명이 한데 모여 간스케
의 귀환길을 습격하였다.
간스케는 이것은 불공정한 싸움이라고 무시하려 했지만, 하시모도의 제
자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죽여 없애기만 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 간스케를 악인으로 몰아부쳐도
죽은 자는 입을 열 수가 없으니 어쩔 것인가.'
생각하고, 일제히 칼을 빼어들고 간스케를 덮쳤던 것이다.
검술에 자신이 있는 간스케는 종횡무진으로 칼을 휘둘러 댔다. 하지만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상대는 수십 명.
칼은 피범벅이 되었고, 눈으로는 땀이 쉴새없이 흘러들었으며, 몸은 지쳐
버려 끝내는 겨우 혈로를 뚫어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간스케는 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를 많이 입었다.
다른 상처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물었지만, 단 한군데 왼쪽 다리에
입은 깊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그 결과 간스케는 평생 한쪽 다리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불구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후 간스케는 고향에서 멀지 않은 순뿌(靜岡市)로 가서 동해 제일의 영
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이와가와 요시모도(今川義元) 밑에서 일하기를
희망했다.
소개하는 사람이 있어서 중역에게 부탁하여 2, 3회 전쟁터에도 출전하는
등 9년이나 기다렸지만, 끝내 이마가와는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았다. 신체
가 성하지 않은 자가 어찌 전투에서 충분히 활동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
이 주된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세상에는 버리는 신(神)이 있는가 하면 줍는 신도 있는 거와 같
이, 이 절름발이 야마모도 간스케를 불러쓰는 무장이 나타났다.
인접한 가히(甲斐) 지방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초임봉록은 100관이었다.
이때 신겐은,
"하인 하나 없는 간스케에게 100관의 봉록을 준다면 다른 하급부하들이
불평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간스케에게 시중드는 하인 하나를 붙여주는
게 좋겠다."
하고 사무라이 대장에게 명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여간 대단한 대우가
아니었다.
간스케는 이 덕분에 모든 준비를 갖추고 신겐을 알현하게 되었는데, 첫
눈에 신겐의 눈에 들어 그 자리에서 100관을 더 받게 되어 총 200관의 봉
록을 받게 되었다.
사실 간스케는 신겐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그해 11월부터 12월까지에 걸쳐 신슈(信州)의 9개 성을 점령하여, 신겐의
신슈 평정의 기초를 이루어놓은 것이다.
간스케의 검술은 매우 뛰어났던 듯 하다.
갑양군감(甲陽軍鑑)}이란 책에서는 검술에 능숙한 자를 다음과 같이 3단
계로 분류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자를 [병법유(兵法遺)], 기술이 뛰어나서 이
기는 자를 [병법자(兵法者)],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도 쉽게 이기는
자를 [병법인(兵法人)]이라 칭하고, 최고의 병법인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2
명의 무사를 들고 있는데, 그중 한 사람으로 야마모도 간스케를 꼽은 것이
다.
간스케는 1561년 가와나가지마(川中島)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62세라고도
하고, 70세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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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텔 무예동 검도/ 거합도 게시판.
Written by - 유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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