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8/read/33630134
천자 만력제로부터 요동 방어에 대한 전권을 확언받은 웅정필은 1619년 음력 7월에 출발하여 8월 초에 해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장 요동 방어의 중심점 요양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웅정필은 요동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머잖아 웅정필은 자신이 오기전에 이미 철령이 함락되었고,
또 명나라를 돕기 위해 남하했던 몽골군 역시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에게 궤멸당했으며 그 수장 자이사이가 사로잡혔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요동의 병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후금군의 공포에 사로잡혀 탈영하고 있었고, 주민들도 요동을 벗어나 요서로, 나아가서 산해관 안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가는 머잖아 요동이 후금에 넘어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야말로 암담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었으나, 웅정필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웅정필은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요동의 참혹한 현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를 바로잡겠다는 패기넘치는 발언을 했다.
이후 웅정필은 지난 사르후 전역에서 도주한 장수들 중 죄질이 심각한 자들을 처형하여 군기를 바로잡고,
사르후 전역과 개원, 철령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시행하여 병사들의 두려움을 일소했다.
그리고 요동 전역에 징병을 시행하여, 사르후 전역 이후로 방어군과 야전군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 요동의 방위력을 급격히 보강하기 시작했다.
또한 요동을 떠나려는 요민들을 설득해 다시 머물게하고, 후금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땅을 개간케 했다.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을 돌보며 민정체제를 복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웅정필이 이렇게 요동 방위를 확립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누르하치가 요동에 대한 공세를 잠시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가 만약 쉬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함락만을 노리고 진격했다면 웅정필의 이런 장기적 계획은 그리 큰 효과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누르하치는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이제야 막 요동에 온 웅정필을 공격치 않고 있던 것인가?
그는 개원과 철령을 함락한 뒤 잠시 휴식을 가지면서, 마지막 남은 여진 독립세력, 예허를 멸망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르후 전역으로 인해 병력이 거진 바닥나 비교적 손쉽게 함락할 수 있었던 개원, 철령과 달리
요양, 심양, 광녕등 요동에 남은 명의 세력거점은 모두 강력한 방위력을 지닌 방위지였고, 그 거점들을 함락하는 것은 누르하치로서도 꽤나 모험이었다.
그렇기에 우선은 언제든 후금의 뒤를 칠 수 있는 존재이자, 수십년에 걸쳐 자신과 대립해왔던 예허부터 멸망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러면 전력을 한 쪽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에 누르하치의 전략안정성은 더 상승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누르하치는 웅정필이 막 부임한 요동을 공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