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원래 한국에서 살다가 6년 전부터 해서 유럽으로 넘어가서 사진작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인들로부터 강도 조심해라,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피해라 별별 오지랖을 다 들으며 온 유럽은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양에서 사진작가 일을 하러 온 절 신기해하면서 다들 제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었죠. 그러다 사진을 찍을 장소를 수배하던 중 폴란드에 들를 일이 있었습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근처에 있는 루블린의 자모시치키라는 지역을 지나게 되었죠. 루블린 시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이 마을에는 넓고 아름다운 밀밭이 있습니다. 해가 질 때의 황혼빛을 머금은 밀밭을 볼 때마다 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겪게 된 기묘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시에 마을의 숙소에 방을 잡고 촬영하기 좋은 풍경을 물색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당시 폴란드에는 폭염주의보가 떠서 숙소 주인아주머니께서 제가 들를 목적지들을 대충 들으시고는, 그쪽은 근처에 인가나 건물도 없어서 혹여나 열사병에 걸려 쓰러지면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거라며 제 여행을 만류하셨죠.
저는 그때 당시 더워봐야 얼마나 덥겠어 하며, 아주머니께는 그러면 근처만 둘러보겠다고 대충 둘러대고는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곧 어르신 말씀을 들을 걸 하며 후회했습니다. 유럽은 비가 내리고 춥다는 인상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편입니다만, 실제로는 온대지역들도 많이 존재하며, 특히 여름에는 온도가 30도까지 올라가며 푹푹 찌는 한국의 습한 여름과 같은 기후들이 존재하는 곳이 많습니다. 특히나 제가 있던 마을은 그때 당시, 저번 주 즈음에 폭우가 내리고 난 뒤 폭염이 오면서 습도가 미친 듯이 올라갔던 시기였습니다.
걷기만 해도 얼굴에다가 대고 가습기의 증기를 들이마시는 듯한 습함과 짠 내음을 풍기며 땀이 먹은 셔츠는 몸에 착 달라붙어 끈적거리며 달라붙었고. 팬티까지 땀에 젖에 다리 구멍 부분이 말려올라가 가랑이를 괴롭히는 데 정말 괴롭고 짜증이 솟구쳤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나중에 정비해야지 하고 미뤄놨던 체인마저 고장이 나면서, 저는 졸지에 17kg 짜리 고철 덩어리를 들고는 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폰은 충전을 안 해놔서 0%에 예비 충전기는 숙소에 두고 왔고 정말이지 앞이 깜깜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안되겠다 싶어서 히치하이킹이라도 시도를 하려고 했습니다만 그날따라 차도에는 차들도 한 대도 지나지 않더군요.
그렇게 한참을 히치하이킹할 수 있는 차가 있나 둘러보며 도로를 터벅터벅 걷던 중 거의 정오가 되었습니다. 해가 머리 위에서 사정없이 햇빛을 쏘아대니,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들더군요. 그러다가 근처에 커다란 나무가 있어서 급히 거기로 피신에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더워 죽을 것 같았습니다만, 그래도 푸른 하늘 아래에 펼쳐진 밀밭은 더럽게 멋지더군요. 그러다가 이상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밀밭의 한 가운데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 같은 것이 서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날씨에도 일하는 사람이 있네 하고 신기해했습니다만, 멀리 있어서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농사하면서 입기에는 이상한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피스 같으면서도 너덜너덜한 천을 엉기성기 덧댄 것처럼 보였었거든요. 마치 허수아비에다가 옷을 입히지 않고 그냥 천만 얹은 것 같은 그런 모양새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제가 쉬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밭의 중앙을 뱅뱅 돌고 있었습니다. 밭의 상태를 확인하거나, 벌레를 잡거나 그런 모양새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흐느적거리면서 계속 중앙을 맴돌 뿐이었죠.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모양새라 도움을 요청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히 쉬었다가 떠나기로 했죠. 그러던 중 그 사람이 갑자기 중앙에 멈춰 섰습니다. 그러고는 몸을 앞뒤로 흔들흔들거리며 그 자리에서 계속 서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아 이거 ㅁㅇ 한 사람이다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더군요. 이전에 독일과 프랑스를 거치면서, ㅁㅇ 한 사람들과 몇 번 마주치며 안 좋은 기억이 있었기에, 안되겠다 싶어서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흔들거리던 것을 멈췄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렸습니다. 그 사람과 저와의 거리는 일반 차도의 4차선 보다 조금 더 떨어진 정도의 거리로, 제법 멀리 떨어져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왠지 저는 그 사람이 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계속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시발 시발 거리면서 최대한 웃어 보이며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죠.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저를 향해서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거였습니다. 목소리 높낮이가 좀 이상해서, 목소리가 얇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렸습니다만, 목소리가 가날팠던 것이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몸을 이쪽으로 돌릴 때 몸선이 여자의 것과 같기도 했고요. 그 여자는 저를 보고 뭐라고 한참을 외쳐댔습니다. 처음에는 폴란드어인가 싶었는데, 이건 뭐 폴란드어도 아닌 거 같고 영어도 아닌 이상한 말을 계속 외치는 거 같았습니다. 어쩌면 약에 취해 아무 헛소리나 지껄이는 거였을 수도 있겠죠.
그때 저는 안 그래도 긴장한 상태에 뭐라는지 알 수도 없는 말로 계속 외치니 괜히 무서워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뻘쭘하게 서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인사하는 제스처를 지은 후 자전거를 몰고 그 자리를 떠나려 했습니다.
그때, 그 여자가 오른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여자가 쥐고 있는 물건을 보았죠. 그것은 낫이었습니다. 그걸 보자마자 저는 그 숨 막히는 습기도 피의 뜨거운 열기도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오직 이거 하나 밖에 생각이 안 났죠. ↗됐다.
그리고 그 여자가 저를 향해서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밀밭을 가로지르면서 동물처럼 괴성을 지르면서 미친 듯이 달려오자, 저는 자전 거고 나발이고 다 집어던지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근처에 숨을 데가 없나 하고 둘러봤지만, 그 광활하고 넓은 밀밭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그 아름다운 풍경이 정말 원망스럽더군요. 무서워서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그 여자의 비명소리만큼은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더군요.
ㅆㅂ, ㅆㅂ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만, 뒤를 돌아봤다간 그 섬뜩한 낫이 제 눈을 찍을 것만 같아서 무작정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눈앞에 교차로가 보였습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뻗은 길 중에서 어디로 가야 되나 하다가 오른쪽으로 가기로 하고 급하게 몸을 틀었습니다만 저는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해서 그대로 촤아악 하고 미끄러져 그대로 굴렀습니다. 그렇게 구르다가 도랑에 빠져 머리를 세게 박고 말았습니다. 머리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만, 저는 아파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무조건 일어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머리를 너무 세게 박은 건지 머리가 핑 돌고 일어나려다 계속 고꾸라지고 하면서 그대로 바닥에 뻗었습니다.
그리고 곧 제 머리맡에 그 여자의 다다다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됐다. ↗됐다 하면서도 일어나려고 했지만,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비명소리가 귓가에서 들리고 손 같은 게 제 옷을 잡고 당기는 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아 이제 끝났구나. 이 먼 곳에서 이상한 사람을 잘못 만나 이렇게 죽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그다음에 올 끔찍한 미래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곧 무언가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죠.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한데 섞이면서 제 주변에서 계속 웅성거렸습니다. 저는 눈을 뜨면, 그 여자의 얼굴이 바로 제 앞에서 절 노려볼 거 같아 한참을 눈을 못 뜨고 있었습니다만, 결국에는 침을 삼키고 눈을 힘겹게 떴습니다.
눈을 떠보니 제가 있는 곳은 병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간호사와 의사들이었죠. 나중에서야 자세한 상황을 의사선생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이 지긋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상인 의사 선생님은 제가 길에서 피를 흘리며 기절한 것을 근처를 지나던 농부 아저씨가 발견해 응급처치를 하고 급히 신고해 이렇게 병원에 오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열사병 증상도 좀 있고 타박상이 좀 있지만,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불과 아까까지만 해도 그 무서운 여자와 공포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도주극을 찍고 있었는데, 제 앞에 펼쳐지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혹시나 그 여자도 같이 온 건가 싶어 의사 선생님한테 혹시 저와 같이 온 여자는 없었냐고 혹시 농부 아저씨는 괜찮으시냐고 물어봤습니다만, 의사 선생님은 의아한 얼굴로 그때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당신이 혼자라고 말해줬습니다. 저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죠. 그러자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아마 열사병 때문에 환각을 본 것 같다. 이제 보니 환각한테 도망치다가 혼자 머리를 박았구먼 하면서 껄껄 웃었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게 환각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나 생생했는데? 저는 몇 번이고 간호사와 의사선생님께 물었습니다만, 돌아온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저는 어이가 없었죠. 하지만 곧 병원비를 비롯한 현실적인 문제가 제 앞에 닥쳐오자, 저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렇게 그 끔찍한 사건을 빨리 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정도 병원에 더 입원하다 퇴원을 하루 남겨둔 날, 저를 발견하고 신고를 하신 농부 아저씨가 제 얼굴을 보러 방문하셨습니다. 아저씨도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진 경험이 처음이라 나름 놀라셨는 듯, 몇 번씩 병원에 전화로 제 상태를 확인하다가 직접 얼굴을 보러 와주신 거였습니다.
아저씨를 처음 보자마자 든 인상은 슈퍼마리오의 마리오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 좋아 보이던 아저씨는 제 모습을 보더니만, 멀리서 와서 별 희한한 경험을 다했구먼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줬습니다. 저는 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면서, 나중에 사례를 하고 싶다고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냐 물었지만, 아저씨께서는 한사코 거절하셨죠. 사람이 살았으면 됐지. 무슨 사례냐 하면서요.
그러던 중 아저씨가 의아한 얼굴로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근데, 자네, 그때 대체 왜 그렇게 뛰어갔었나? 무언가에 쫓기듯이 뛰어가더니 갑자기 자빠져서 얼마나 놀랬는데."
저는 그 질문을 듣자, 다시 그 여자의 끔찍한 비명을 떠올리고는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습니다. 저는 아저씨께 열사병 때문에 이상한 것에게 쫓기는 환각을 봤었던 거 같다. 그래서 도망가다가 넘어진 거 같다며 자초지종 설명드렸습니다. 그러더니 아저씨는 입을 다무시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무언가 중얼거리셨습니다.
"포우드니차...포우드니차..."
"...? 그게 대체 뭐죠?"
제가 궁금해서 질문을 드리니, 아저씨께서는 무언가 머쓱한 듯 콧수염을 메만 지더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일종의 미신일세. 아주 무더운 날, 밭 한가운데에 어떤 여자가 낫을 들고 나타나는 데 그 여자를 보면 안 좋은 일이 닥친다고 하지."
"여자요? 무슨 유령 같은 거예요?"
"뭐 그런 거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야. 나도 여기서 50년 넘게 살면서 본 적이 없는데. 바다 건너온 친구가 봤다니, 허 별일도 다 있구먼그래. 허허."
"아, 네... 그런데 안 좋은 일이라뇨?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그러자 아저씨는 말하기가 껄끄러운 듯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뭐... 죽다 살아난 사람한테 할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들고 있는 낫으로 목을 베어간다더군."
그 말을 들은 나는 피가 사악 식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귓가에서 들리던 여자의 괴성과 낫을 들고 미친 듯이 쫓아오던 그 무서운 모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그 귀신한테 거의 죽을뻔했다가 살아난 것 같습니다.
나중에 폴란드에서 다시 독일로 건너오고 나서 위키를 통해 그 포우드니차라는 것을 조사해 봤습니다. 포우드니차는 '정오의 악령'이라고도 불리며, 무더운 여름날, 특히 해가 가장 높게 뜬 정오에 나타나 정오에 밭에서 일하거나 일하다 쉬는 농민들에게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지 못하면 들고 있는 낫으로 목을 베어가거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유령이라고 합니다. 동유럽에 널리 알려진 이 유령은 현대에 와서는 사람들에게 열사병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합니다만,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여자가 창을 긁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낫을 들고 저에게 달려오던 그 모습을... 지금까지 제가 유럽에서 경험했던 기묘한 경험이었습니다.
폴란드의 '정오의 악령, 포우드니차'
-글쓴이의 말-
사실 나는 유럽여행을 다녀온 적도 없으며,
이 이야기는 소설연습 및 포우드니차를 알리기 위해
직접 창작한 소설임. 진짜로 믿으면 곤란함.
(IP보기클릭)123.142.***.***
헐.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푹 빠져서 재미나게 잘 봤습니다. 다음에도 재미난 이야기 부탁드릴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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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푹 빠져서 재미나게 잘 봤습니다. 다음에도 재미난 이야기 부탁드릴께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