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만주실록
1618년 음력 6월 22일 후금에는 명으로부터의, 정확히 말하자면 요동순무 이하 아문 내지는 요동경략으로부터의 차관이 왔다. 그들은 이전에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보낸 화친 사절과 함께였다. 그들은 누르하치에게 화친을 원한다면 포로중 일부라도 쇄환하라는 뜻을 통지했다. 그들의 답변을 통해 확실하게, 누르하치의 명나라를 향한 요구, 즉슨 전쟁명분과 건국의 인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명나라가 원하는 명-후금 관계의 원점 회귀에 대하여 누르하치는 그들에게 자신이 전쟁을 통해 포로로 잡은 이들을 어찌 돌려보내겠느냐면서 자신의 전쟁명분, 건국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재물을 보내지 않으면 화친은 없으며 전쟁이 계속될 것이라고 하였다. 누르하치는 전쟁을 시작한 이상 반드시 명과의 외교관계 문제를 해결하고 본인의 세력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다.
1618년 음력 6월 이후,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한 3차 공격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명나라에 대한 3차 요구가 명나라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다시금 명나라에 대해 공격을 가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그의 이번 공격 목표는 청하(清河)로 결정되었다.
명나라가 후금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해 상당한 수의 군병과 지휘관을 청하에 배치하였으므로 자연히 청하는 후금이 1차 원정 당시 공략했던 무순, 동주, 마근단이나 2차 원정 당시에 공략했던 범하, 삼차아, 화표충, 송산돈과 같은 요새보다 월등히 방어역량이 뛰어난 상태였다.
청하의 지형적인 입지 요건은 둘째 치더라도, 단순히 청하에 주둔한 병력만 고려해 보아도 그러했다. 다양한 출전에 따라, 당시 청하에는 적게는 6천 4백여명, 많게는 8,250여명의 명군 부대가 존재했다고 일컬어진다1. 여기서 『국각』의 8,250명 기술의 경우 5천 2백 50명은 본래의 주둔군이며, 3천여명은 지원군의 지휘관 장패(張斾)가 이끌고 온 추가적인 증원군이라고 기술한다.2 한편 『명신종실록』에서는 청하 함락 당시 전사한 군민이 모두 합쳐 1만인이라고 서술하는데, 이를 보건대 청하에는 군대 뿐 아니라 적지 않은 수의 민인들 역시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3
한편 후금/청의 기록인 『만문노당』에 따르면 청하에 주둔한 병력이 1만에 달했다고 서술된다.4 반면 『구만주당』은 『만문노당』과 마찬가지로 청하에 주둔 중이던 명군 병력의 비정에 대해 1만여명이라고 기술하나5, 여기에 더해 일반 백성 장정들 역시도 수천여명이 존재해 명군과 함께 청하를 지켰다고 서술하고 있다. 즉, 『구만주당』에서는 1만 수천의 병력이 청하를 지켰다고 기술하되 군병력(1만)과 민정(수천)이 함께 청하를 지켰다고 기술하고 있고, 『만문노당』은 청하의 수비에 힘을 보탠 민정의 존재를 생략함으로서 군병력 1만만을 기술하고 있다.
『만문노당』의 서술에서 '수 천의 민정 저항 집단'을 뺀 것은 굳이 이들의 존재를 서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일 공산이 있다. 나아가 두 사료에 기술된 '1만여명의 명군'이라는 숫자 자체가 군병력과 저항 민정을 합한 수효일 수도 있으며, 전투의 치열함을 강조하기 위해 『구만주당』이건 『만문노당』이건 청하의 저항병력을 교묘히 다소 과장했을 수 있다는 추정도 가능하게 한다.6 실제로 앞서 언급했듯 『신종실록』에서는 청하 함락 당시 전사한 군민을 1만이라고 서술하는 만큼, 후금이 지목하는 '1만인의 명군'이라는 것은 사실 군병만이 아니라 군병과 민정을 모두 합친 숫자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무엇이 되었건, 이상의 사료들 중 청하의 주둔 병력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이 주둔했다는 기술을 채택하더라도 기존까지-즉 당해 5월까지 후금군이 상대했던 다른 명군의 요새들과 비교해 훨씬 많은 군병이 배치된 것은 확실하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의 경우 후금과의 전쟁 상황에 따라 명 조정에 의해 대후금 방어선의 최일선에 배치된 군병들이었기에 후금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단단히 대응태세가 갖추어져 있었고, 여기에 화기 역시도 다수 배치되었으므로 후금으로서는 상대하기 까다로울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청하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은 공성군의 입장에서 공략의 난이도를 높이는 요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야전이라 한다면, 후금으로서는 그리 위협적인 숫자라고 할 만한 병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청하를 끼고 버티는 수천명의 군병을 상대하는 것은 누르하치로서는 지난 1, 2차 원정보다도 큰 모험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는 청하를 공격할 것을 계획했다. 이는 당시 누르하치와 후금의 입장서 청하야 말로 가장 적합한 공략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명이 후금과의 전쟁에 대한 방비체계를 갖춤에 따라 요동 지역에 속속들이 군병과 장교, 지휘관들이 배치되는 와중에 개원(開原)이나 철령(鐵嶺)같은 거대 거점을 공격하는 것은 누르하치와 후금으로서는 지나친 모험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자잘한 군소 요새들을 공격하는 것은 이미 지난 1, 2차 원정을 통해서 진행했던 일이기에 명에게 줄 충격이 그리 크지 않았으므로 공략을 이룬다 하더라도 추후의 전쟁/외교 국면을 후금에 유리하게 끌어오기에 힘들었다.
그러나 청하는 요동의 중요 요충지 중 하나로서, 명과 후금간의 전선에서 지리적, 군사적인 위상이 강했다. 청하의 함락은 곧 명에 대한 강한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당시 상황상 후금이 공격하기에 상대적으로 가장 적합한 대상이었던 청하를 노린 것으로 판단된다.
외교, 정치적 목적을 제하고도, 군사전략상으로도 청하의 함락이 필요했다. 청하는 명의 대 여진 방어선인 동단변장의 중요거점 중 하나로서 당시로서는 명의 후금에 대한 방어선에서 중요한 축이었다. 그렇기에 명도 수천의 병력을 증강하면서 그 방어를 공고히 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후금으로서 이어질 전쟁의 수월한 진행을 위하여 전략상 청하를 허물어야 했다. 청하를 함락한다면 후금은 명의 방어선 남방에 큰 군사 공백 상황을 만들고, 그로서 향후의 대명 전쟁 전략을 공격의 측면에서건 방어의 측면에서건 보다 수월히 진행할 수 있었다.
누르하치가 청하로 출병한 것은 당해 음력 7월 20일이었다.7 이는 음력 6월 22일 명으로부터 사신이 온 것으로부터 약 1달이 지난 뒤였다. 이 동안 누르하치는 음력 5~6월의 2차 원정으로 지친 군대를 정비하는 동시에 명으로부터 자신의 요구에 대한 회답을 기다렸다고 보여진다. 약 1달간의 시간 동안 군대를 정비하는 동시에 회답을 기다린 것은 지난 윤 4월 22일에 명에 화친 사절을 보내고 음력 5월 17일에 범하, 화표충, 삼차아로 출병한 것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누르하치는 이 시기 명으로부터의 회답을 1달여간 기다리고 그 이후 답변이 오지 않으면 공격을 가하여 압박을 행하는 전략을 구축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 때 누르하치가 대동한 병력은 이전 5월달의 2차 출정과 마찬가지로 역시 기록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명의 방어체계 재정비에 따라 청하의 방어력이 기존에 비해 매우 강화되고 대규모의 병력이 운집한 것을 누르하치 역시 예상하고 있었던 데다가, 이영방이 원정에 종군함에 따라 그가 이끄는 항복한 명군 역시도 종군했을 것이 예상되고8, 또 지난 음력 5월에 항복한 명군 역시도 신편 후금군으로서 동원되었을 것으로 유추되는 만큼 상당한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최소한 음력 4월에 있었던 무순 전투는 확실히 상회하는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마도 쿠툴러를 포함하여 3만 이상/4만선으로 생각해 봄직 않을까 한다.
1. 소수설의 경우 『명계북략』을, 다수설의 경우 『국각』을 출전으로 삼는다.
2. 진첩선의 경우 다수인 8천여명설을 채택했다. 진첩선, 『누르하치 : 청제국의 건설자』, 2015, 홍순도역, 돌베개, 193쪽. 李治亭와 孫文良 역시도 다수설을 지지했다. 李治亭·孫文良, 2012, 『明淸戰爭史略』, 中國人民大學出版社, p.27. Swope의 경우 소수설인 6,400명을 채택했다. Kenneth M. Swope, 2014,『The Military Collapse of China's Ming Dynasty, 1618-44』, Routledge,p.14.한편 후금의 기록 기술대로 1만을 언급하는 학자 역시 존재한다. 閻崇年, 2006(2022), 『明亡淸興六十年(1583-1644)』, 華文出版社有限公司, p.653.
3.『명신종실록』 만력 46년 7월 22일.
4.『만문노당』 천명 3년 7월 22일.
5.『구만주당』 천명 3년 7월 22일.
6.이러한 추정의 경우, 『구만주당』의 경우에는 저항 민정의 존재를 다루되 그들을 명군 정규군 1만과 분리하여 '수천'의 별도의 집단으로 다룸으로서 청하의 방어병력을 1만 수천으로 과장하고, 『만문노당』의 경우 저항 민정의 존재는 생략하되 청하의 총군 규모를 1만으로 기술하며 총 방어병력의 숫자 자체는 『구만주당』보다 감소시키되 청하의 병력 1만명 모두가 군병력이었다고 과장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7.『만문노당』 천명 3년 7월 20일.
8.『청사고』 권231 열전18 이영방 열전,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13년 9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