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태평양 함대는 웅기, 나진에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무서운 기세로 남하하던 소련군은 개전 6일 만에
이미 한반도의 북부 상당부를 점령했다.
당시 미군은 아직 오키나와에 있었다.
한반도에서 1000km나 떨어진 곳이었다.
미군은 소련군이 한반도를 단독 점령할 것을 우려해 한반도 점령 계획 일부를 수정했다.
하지 중장의 24군단을 중화기 없이 경장비만 갖추게 하고 급히 한반도로 이동시켰다.
예상치 못한 소련의 참전과 빠른 남하 속도에 당황한 미군은
소련의 단독 점령을 막기 위해 분주해졌다.
단지 두 점령군의 작전지역을 구분하기 위한 선,
그것은 북위 38도선이었다.
북위 38도선이라는 낯선 경계는 일반명령 1호에서 처음 그 존재를 드러냈다.
두 점령군을 위한 경계선, 38선은 이렇게 처음 한반도에 나타났다.
1945년 8월 15일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1주일 만에
일왕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한반도는 해방의 감격에 휩싸였다. 일본은 물러갔다.
다시 제 나라의 주인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자주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된 한반도는 희망과 희열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해방과 함께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주하자마자 도착 성명을 통해 자신들이 해방군 임을 강조했다.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미군은 일본이 투항한지 3주가 지나서야 한반도에 들어왔다.
하지 중장이 이끄는 24군단이 인천에 도착했다.
미군 진주의 분위기는 소련군 진주 때와는 사뭇 달랐다.
어디까지나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군사 작전일 뿐이었다.
미군은 진주할 때까지의 치안 유지를 일본 경찰에게 맡겼다.
38선 이남 주민들이 미군 진주 소식을 들은 것은 미군이 서울로 입성하기 전
서울 상공에 뿌려진 맥아더 포고문을 통해서 였다.
한국인에 의한 어떤 자치단체도 인정하지 않으며 명령을 위반하면
엄중히 처벌한다는 고압적인 내용이었다.
미군은 한반도에서 무장 해제시킨 일본군에 대해선 비교적 관대했다.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이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이미 패전국인 일본이 아니라
동시에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소련군이었던 것이다.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 17방면군은 소련의 한반도 단독 점령 위험을
미군에게 과대부각해서 보고했다.
이러한 왜곡된 정보는 미군의 초기 점령 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한국인들이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것 이상으로 미군은 한반도 사정에 무지했다.
미 군정은 모든 정보를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군에게 의지했다.
서울에 입성한 하지와 미 군부는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와 마주 앉았다.
항복 조인식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미군에게 이양하는 자리였다.
조인 문서 5조에는 일본의 문무관 모두를 그 자리에 유임하기로 했다.
미군은 아직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이 어떤지를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인은 여전히 미국과 소련 연합군을 해방군으로 믿었고,
곧 머지않아 한국인에 의한 정부가 세워지리라 생각했다.
해방 직후 가장 신속하게 대처한 정치 세력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였다.
건준은 전국에 145개 지부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조직화되어 있었다.
미군 진주 소식이 전해지자, 여운형 주도의 건준은 정부로 인정받기 위해
'인민공화국'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해외 독립 운동가의 명성을 안고 귀국한 이승만, 그러나 귀국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미국내 일부 세력은 이승만의 귀국을 탐탁치않아 하며 귀국을 방해했다.
이승만은 미국 정보부와 군부의 후원 하에 한국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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