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게시판에서 이야기게시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아래는 SNS에서 개인적인 사유를 하며 적어둔 내용입니다만,
귀멸의칼날을 관람하신 분들 중 해당 키워드에 대해 어떠한 관점으로 받아들이고 계시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그대로 옮겨옵니다.
(존칭이 생략된 점 양해를 구합니다.)
루리웹은 한국의 서브컬쳐 커뮤니티의 하나의 축이라고 생각하기에,
서브컬쳐를 사유하는 유저분들 각자의 관점과 사유에 대해 작은 담론의 자리(시간)이 되길 기원하며 글을 올려봅니다.
귀멸의 칼날 TV판 관람 완료...
서브컬쳐, 소년만화적인 장르적 특징을 훌륭하게 계승하면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 하고 비틀어진 혈귀가 만연한 세계에서,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으로써 가족애와 함께 올곧은 선을 통한 휴머니즘의 회복을 힘 있게 호소하고 있다.
일본인이라면 추억할만한(디지털시대의 사람들에겐 생소하게 보일 수 있을) 그때 그 시절의 놀이와 풍경들...
마치 그때의 향수를 느낄 만큼 냄새마저 떠올리게 하는듯한 시대상이지만,
이 작품이 나아가는 거대한 원동력은 시대상보단 시작점과 같이 유일무이한 가족애이다.
TV판 후반부에서 길게 나뉘어서 그려낸 하현5에 대한 이야기구성과 함께 화룡점정의 연출을 보여주며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장면, 처음 제시했던 진정한 가족애 앞에 가짜인연, 오합지졸가족이란 극명한 대조를 겹쳐놓은 구성에 있다. 표층적으로도 심층적으로도 가장 공들였다고 생각한다.
개운하지 않는 부분은, 의미심장하게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진실성을 대변하는 키워드로 할복을 선택했지만, 몇몇 개그장면들의 우스꽝스러운 칼부림 덕분에, 가족애와 인연의 신뢰를 대변하는 자기희생마저 뒤틀린 와색으로 변질시키는 위험성을 내포하며 작품윤리를 스스로 져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브컬쳐이면서 지금 시대에 사라져버린 것... 자신과 인연에 대한 응원을 멈추지 않는 주인공을 보고있자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허망한 세계라 할지라도, 함께 있는 동료들이 뒤늦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처럼, 관람하는 우리들 또한...
관람하는 내내, 격려를 받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TV판 중반, 하현에 버려진 혈귀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사무치게 다가온다.
그정도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올곧은 선함과 격려의 말 한마디가 마치 지나간 시대처럼, 자취를 감춰버린 것은 아닐까...
TV판 마지막은 마치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것처럼 마무리된다.
TV판 애니메이션에서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이동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영화로써의 귀멸의칼날을 일요일인 오늘은 관람하고 지금 가지고 있던 관점이 어떻게 이동하게 될지 조금은 기대해본다.
극장판 관람완료...
영화란 형식의 미학을 시도하기보단,
TV판의 단조로운 로직의 연장선이다.
액션으로써는 제작사 특유의 갈아만들어진 진한 액션이 돋보이지만, 이런 속도로는 지금까지 등장한 인물들만으로도, 같은 형식과 페이스로 전부 소화해내려면 몇개의 시즌과 몇개의 극장판이 필요할까,
...하여 찾아보니 원작의 8권정도에 해당하는 모양,
TV판과 극장판에서 계속해서 제시된 과잉된 상승욕구와 영생을 통한 자기수련 및 끝없는 싸움에 대한 갈망, 그 반론이자 이 영화의 대답은, 진한 액션과 대비해서, 너무 옅고, 낙관적이기에 위태롭기까지 하다.
질문을 깊이있게 밀고나아가기보단, 진한 액션에 물리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될 수 있을 정도의 감초역활, 혹은 입가심용의 차와 같은 역활이라는 인상마저 들게 한다. 때문에 당혹하게 만들었던 연출인 하현1의 꿈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의 알레고리에 대해서 깊이있게 사유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자 적어본다.
주인공이 들어간 꿈은 자각몽으로 진행되고, 그 자각몽 안에서 보게 되는 풍경은 이 작품의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 "원래였다면" 녹록한 삶은 아니지만,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숯을 만들어 팔기위해 도끼질을 하며 나이 먹었을 인물이다.
꿈속에서는 잃어버린 가족도, 혈귀가 되어 낮에 생활하지도 못 하는, 등에 짊어진 유일한 가족(동생)마저 인간의 모습 그대로이다. TV판 1화 이후부터 가족을 생각해왔던 주인공이라면, 이 풍경이야말로 되돌아가고 싶은 풍경이며, 자각몽이기에 분명하게 선택을 행할 수 있기까지 한다.
우리들 모두가 이미 지나가버린, 되돌릴 수 없는 기억을 꿈에서 마주한다면 어떻게 행동할 텐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존재와 만날 수 있다면?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릴 수 있게 되었다면, 그래서 그것을 실제처럼 마주했다면... 마음은 어디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가?
하지만 그 유혹은 꿈속의 풍경은 분명 “되돌아가고 싶은 곳”이지만, “나아갈 곳”은 아니다.
주인공은 “동생을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이미 일어난 일, 되돌릴 수 없는 기억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 짓고 있다.
때문에 꿈속에서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가족들의 모습, 떠나지 말라는 애원에서조차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된다.
가족을 마음에 품고 나아갈 뿐이다.
이 결단의 근원은 다음 장면에서 보여주는 무의식의 풍경,
우유니 소금사막과 같이 드넓고 평온한 풍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하늘과 땅차이라는 구분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늘의 풍경은 조용한 수면위에 반사되어 밟고 있는 지면이 곧 하늘이 된다. 그곳에 있는 인물이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런 결단이 있었지만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이 꿈을 끝낼 수가 없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당혹스럽게 만든 자결씬이다.
깨어나지 않는 꿈을 깨어내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베어야할 것...
꿈에 빠져든 자신... 몇 번이고 꿈에 빠져든 자신을 자결시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사유해봐도 전혀 개운하지 않다.
다이쇼로망이 투영된 시대상보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할복과 자결의 키워드가 마치 블랙홀처럼 납득하지 못 하게 만든다. 서브컬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 한, 단순히 뒤틀린 와색일 뿐인가, 뒤틀린 로망의 형태중 하나인가...
아니면 내가 알지 못 하는 깊이의 알레고리가 있는것인가...??
...혹여나 해당 키워드에 깊이있는 사유를 하신 분이 계시다면, 조금이나마 담론을 나눠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