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본 작품에 혐한적 표현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또한 이런 경우 작품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쉽게 판단이 내려지지 않아서 고민이 됩니다.
우선, 슈타게는 '일본인이 만든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생각해봤습니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이 일본인만 보라는 법을 없지만, 기본적으로 일본인이 주된 관객임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온전히 우리 한국인의 시각에 들어맞길 바라는 건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모든 문화예술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도 시대와 장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특정한 창작자와 어느 정도 특정되는 수용자 사이에 놓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해석이라는 과정이 필요하겠죠.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비교적 보편적인 내용을 다루어 좀더 넓은 범위의 수용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이 있는 반면, 비교적 좁은 범위의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한 작품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작품이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갖지만, 상대적으로 그렇게 분류할 수 있다는 겁니다. 고전과 라이트노벨의 사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보편과 특수를 다루는 문제가 권력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이게 중점 내용은 아니니 이정도로만...
전자의 예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슈타게의 경우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서브컬쳐'라는 말을 쓰는데 문화에서도 애니메이션이 전체 사회에서 서브컬쳐에 속한다면 그 안에서도 다시 다양한 층위가 나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용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슈타게의 경우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도 상대적으로 협소한 수용자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봅니다. 스스로가 굳이 더 많은 보편성을 추구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혐한 드립이나, 성적 묘사 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측면이 있습니다. 이건 작품 스스로가 일정 범위 이상의 수용자 층 확대에 관심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혐한 코드가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하겠지요. 감독의 정체성이 급변하지 않는 한.
혐한 코드에 관한 논란이 비단 이번 슈타게의 사례에 국한된 게 아닌 걸로 압니다.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로 절망선생에도 혐한 코드가 꽤 있다고 하네요. 최근에 죠시라쿠도 비슷한 얘기가 있었지요, 아마. 전 보지 않아서... 이런 작품들은 다양한 계층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못하지요. 작품이 스스로 선택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난 내가 하고 싶은 말 하겠다, 그 대가로 넓은 관심과 지지는 포기한다... 정도 일까요.
슈타게의 경우에 2ch의 혐한적 넷 우익들의 선호를 좀더 고려하기로 선택했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대신 혐한 코드를 싫어하는 계층이나 특히 대다수 한국인의 지지는 포기하는 거죠. 이걸 못하게 막을 방법은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소수의 수용자 층에게만 잘 팔려도 재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속 가능하다면 충분히 그럴 유인이 있습니다. 한국 시장이 매우 커서 우리의 선호를 무시하고는 상품을 팔아먹을 수 없다 라는상황이 아닌 이상 그렇습니다. 반대로 중국에 대해 혐중 감정을 드러내는 작품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슈타게 제작진이 한국인을 자신들의 수용자 집단에서 배제하겠다는 선택을 했다면, 그건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작품은 불가능하다고 보구요, 그래서 그들만의 리그에서 놀겠다는데 굳이 끌어내서 좀더 보편적인 코드에 맞추라고 할 수 없다는 거죠.
제 생각에 정작 고민해야할 점은 혐한 코드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에 정치적 부담을 느끼지 않는 집단이 일본 사회 내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그 배경으로는 사회경제적 배경, 정치적 동원, 역사적 과거 청산의 문제 등등 많은 요인이 있겠지요. 많은 분들이 다소 예민하게 이번 사태에 반응하는 것은 혐한적 기류가 일본 애니계, 나아가 일본 사회 전반에 만연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 이 부분은 개개인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도 심각히 다뤄야 한다고 봅니다. 혐한 코드를 그 속뜻에 큰 관심 없이 유머나 유행어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일본의 젊은이들이 부지불식간에 정말 혐한을 내면화 할 위험은 상존합니다.
비슷한 예가 국내의 '일베'현상입니다. '오오미' '운지','민주화' 등 특정 맥락의 가치 편향적인 말들을 별 생각없이 쓰다가 지탄의 대상이 된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목적이나 내용, 의도를 불문하고 이런 말이 들어간 글이나 이런 말을 사용하는 이에게 저 역시 반사적으로 적대감을 느낍니다. 반면 옹호자들은 언어 사용의 외관으로 그 사람의 내면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 언어가 단순히 의사표현수단일 뿐만 아니라 사고의 틀을 구성한다고 보기 때문에 저런 말들을 배척해야 한다고 봅니다. 말하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작품에서 혐한 대사가 사용되었다, 아니다 또는 혐한 작품이다, 아니다의 논쟁보다는 그 이면을 보여주는 어떤 징후를 포착하는 데 주안점을 둬야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슈타게 제작진이 혐한을 거부하는 많은 일본인, 그리고 절대 다수의 한국인을 모욕하고 무시함으로써 그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것은 부정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거기서 괘씸함을 느끼는 거구요. 이건 저의 판단입니다.
덧붙여, 약간 다른 관점에서 생각을 개진해보고자 합니다. 슈타게 논쟁에서 옹호아닌 옹호(?) 역할을 떠안게 된 몇몇 분들이 제기한 문제 중에 "슈타게나 여타 다른 애니에서 보여지는 여성에 대한 성희롱, 성적 묘사에 대해서 아무 반응이 없다가 왜 혐한에만 유독 과민반응인가?" 라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의식이라고 봅니다.
사실, 우리 모두 하나의 정체성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애니를 좋아하는 동시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도 갖지요. 개인의 수많은 정체성들은 특정 상황과 맥락에서 부분적, 선택적으로 표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볼 때 여러 측면이 드러나는 것도, 완벽한 사람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슈타게 사태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보이는 분들은 이 경우 애니 애호가라는 정체성 보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옹호의 입장에 선 분들은 반대겠지요. 중간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일순위로 놓기를 강요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런 정체성의 표현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건 개인의 선택 몫이라는 게 제 의견입니다.
사실, 일본 애니가 여성의 성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확대 재생산하는 측면은 분명 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 루리뤱 유저들이 여기에 대해 문제의식을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렇구요. 페미니스트적 시각 등 다른 정체성을 보유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애니들을 보면 매우 불쾌한, 혐오스러운 감정을 느낄 여지는 충분합니다. 단지 루리웹이라는 특정 공간에서는 그런 정체성을 드러내는 분들이 미미한 거구요. 여성의 성에 대해서는 다소 편파적인, 관대한 시각을 가진 커뮤니티라고 외부에서 볼 수도 있는 겁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루리웹도 수많은 문화영역들 중 극히 일부일 뿐이잖아요? 공명정대한 판단을 바라는 건 다소 무리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극단적인 문화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건 아니구요, 루리웹에서 보이는 여성에 대한 태도를 그 바깥영역에서까지 가감없이 드러낼 경우 날아오는 비난은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좀더 넓은 상위의 사회에서 보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이니까요. '일베'나 2ch의 경우도 그들의 주장이 다른 영역으로 번지는 것을 경계하고 막는 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옆으로 좀 빠졌는데, 성적 묘사에 관대한 곳이니 혐한에 대해서도 관대해야 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 경우에는 일본 애니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은 군대와 전쟁에 대한 묘사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군대나 전쟁을 이미지화하는 방식에서 군국주의적인 냄새가 난다고 할까요? 밀덕 분들은 동의하기 어려울지 모르는데, 사례로 '걸즈&판저'같은 작품이 군대나 전쟁을 장난스럽거나 아름다운 이미지로 탈색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거든요. 특히나 일본같은 전범국의 역사적 경험을 보면 군대와 전쟁은 분명 야만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말이죠. 이게 어떤 의도가 있다기 보다는 일본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군대를 가진 '정상국가'로의 회귀에 대한 의지나 과거 군국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표출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엔 이런 애니를 볼 때 저만의 편견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글이 너무 난삽해지네요 ㅠ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사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잣대를 문화예술 영역에 어느 정도까지 들이댈 수 있는가 라는 문제는 제법 오래된 질문이면서 모든 나라들이 안고 있는 고민거리입니다. 우리의 경우 친일 문학가, 예술가 등에 대한 평가가 그렇고 독일의 경우도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판단 문제(하이데거나 귄터 그라스)가 있습니다. 비교적 확고하게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적 평가의 기준이 뚜렷한 편인 서구도 완벽하게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봐야지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주장도 있지만 '예술가도 한 시대의 인간이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둘 다 일방적으로 옳거나 틀렸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과 '비평'이라는 과정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위에서 말했듯이, 현상의 이면을 파악하고 그 맥락과 배경에 대해 고민함으로써 나의 생각을 좀더 정교하게 만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주체적 사고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가치는 그 내용여하를 불문하고 위험합니다. 어떤 작품을 마주했을 때 내 안에서 충돌이 일어난다면 그 정체가 무엇인지, 내가 가진 생각들의 기원이 어디인지 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슈타게 사태에 대해서도 단지 '혐한이다, 아니다'의 논쟁보다는 혐한이라는 사회현상이 갖는 의미에 대해 고민해보고 어떤 작품에 내포된 가치에 대해 수용자로써 어떤 태도를 갖는 게 옳은가에 대해 성찰해보는 계기로 삼는게 어떨까요?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에야 슈타게가 혐한작품인지, 작품을 볼 것인지, 어떤 가치판단을 내려야할지에 대해 자기만의 답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붙임. 첫 글인데 아무도 읽지 않을 것 같다는 허무감이...ㅋㅋ 필력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요. 모든 게시물의 작성자 분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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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좋은데 // 덧붙여, 약간 다른 관점에서 생각을 개진해보고자 합니다. 슈타게 논쟁에서 옹호아닌 옹호(?) 역할을 떠안게 된 몇몇 분들이 제기한 문제 중에 "슈타게나 여타 다른 애니에서 보여지는 여성에 대한 성희롱, 성적 묘사에 대해서 아무 반응이 없다가 왜 혐한에만 유독 과민반응인가?" 라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의식이라고 봅니다// 이거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임. 그냥 전형적인 논점 이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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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짧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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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좋은데 // 덧붙여, 약간 다른 관점에서 생각을 개진해보고자 합니다. 슈타게 논쟁에서 옹호아닌 옹호(?) 역할을 떠안게 된 몇몇 분들이 제기한 문제 중에 "슈타게나 여타 다른 애니에서 보여지는 여성에 대한 성희롱, 성적 묘사에 대해서 아무 반응이 없다가 왜 혐한에만 유독 과민반응인가?" 라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의식이라고 봅니다// 이거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임. 그냥 전형적인 논점 이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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