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나 자매끼리는 서로 닮아간다는 주장은 어떤 바보가 생각해냈는지 몰라도 헛소리임이 분명하다. 그 증거로 내 곁에 있는 자매들은 복장을 빼놓고는 닮았다고 할 만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었다. 심지어 눈에 난 상처마저 서로 반대쪽이었다. 동생이 햇볕이 쨍쨍한 대낮이라면 언니는 저물어가는 노을 뒤로 감춰진 밤과 같았다. 동생인 UMP9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다녔다. 성격 또한 명랑해서 앙증맞게 리본으로 묶은 갈색 트윈 테일을 이쪽 어깨에서 저쪽 어깨로 흔들고 다니길 좋아했다. 그녀는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까지 즐겁게 만들어줄 분위기메이커였다. 그녀는 머릿속에 꽃밭이 들어찬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사에 긍정적이었다. 전술 인형으로선 부적합한 태도겠지만 그렇다고 임무를 허투루 수행하지는 않았다.
한 번은 그녀의 소대가 철혈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인형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지원군을 보내줄 방법을 찾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UMP9는 내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도 평소와 같은 밝은 태도로 일관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지휘관. 곧 우리 언니가 해결해줄 거야."
그때도 그녀의 애교부리는 듯한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질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언니인 UMP45가 급조한 함정으로 철혈들을 보기 좋게 따돌리며 소대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것 봐, 지휘관. 언니만 믿고 있으면 된다니까?"
UMP9는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언니를 치켜세워 주었다. 그녀의 의기양양한 태도는 UMP45가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UMP45는 동생과 마찬가지로 허여멀건 얼굴로 싱글생글 웃고 다니며 내 부름에 곧장 답해주었다. 단정하게 묶은 사이드 테일 아래로 후드 재킷에 도드라진 굴곡들은 동생만큼 돋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는 더 산뜻했다. 전투력은 내 담당 인형 중에선 두말 할 것 없이 최고였다. 그녀는 전장에 들어서면 냉철한 태도로 상황을 파악하고 스스로 움직일 줄 알았다. 지휘관인 나까지 작전 중에 그녀의 도움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만 보면 누구라도 가까이에 두고 싶은 인형이겠지만 그녀에겐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구석이 있었다. 즐거울 때나 위급할 때나 그녀의 밝은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그런 목소리로 비수 같은 일침들을 쏘아붙이는 게 문제였다. 일상 중에 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면서도 눈앞에선 미소를 짓고 있으니 내게 정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나는 막연히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어둠이 드리워져 있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두 자매 중에 동생 쪽에 더 호감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언뜻 보기엔 철이 없었지만, 학창 시절 이후부터 줄곧 외톨이였던 나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감싸주려고 노력했다. 언니와 다르게 하는 말에 숨기는 구석이 없고 태도나 분위기도 한결같아서 그녀를 곁에 두고 있으면 조금 소란스럽긴 해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서 야근에 찌들 땐 UMP45의 잔소리를, 쉬고 있을 땐 UMP9가 재잘거리는 걸 듣고 있었다. 그녀가 소파에서 쿠션을 껴안고 엎드린 채로 쏟아내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피로를 떨쳐낼 수 있었다.
나는 인형과의 서약엔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내게 그 정도의 호감을 느끼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코트 주머니에 넣어둔 반지를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UMP9는 내가 태도를 바꿔봐도 이전처럼 웃고만 있었다. 오히려 언니 쪽이 더 날카롭게 반응했다. 숙소에서 UMP9와 어울리다 보면 UMP45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애써 외면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동전처럼 앞면만을 보여주던 UMP45도 정말 진지해지면 자기 자신을 뒤집기도 했다. 나는 서재에서 보고서를 정리하다가 갑자기 내 등 뒤에 나타난 그녀를 보고 놀라서 하마터면 사다리에서 떨어질 뻔했었다. 그녀는 내가 사다리 위에서 팔을 휘젓는 걸 보고 피식 웃더니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먼저 지휘실로 가버렸다. 마침 그녀와 연관된 자료들을 찾아보던 중이었다. 그녀의 성격처럼 더러운 목적들이 숨겨진 기밀 임무였다. 작전 중에 아무렇지 않게 피바다를 몰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리 밝게 웃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책상에서 UMP45와 마주 보고 앉았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흔들거렸다. 춤을 추는 커튼 사이로 따뜻한 햇볕이 스며들었다. UMP45는 햇살처럼 유순한 눈매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태도만은 진심이었지만 나는 부담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지휘관, 9한테 관심 있죠?"
UMP45가 물었다. 그녀다운 질문이었다. 시작부터 핵심을 파고들어 상대방이 머리를 굴릴 틈을 주질 않았다. 동생은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나는 그녀의 언니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인형을 좋아하는 게 범죄도 아닌데 애써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응, 좀 갖고 있어."
"역시 그렇구나. 9가 저보다 매력적인가요?"
나는 무심결에 그 질문마저 선선히 답해줄 뻔했다. 찰나의 순간에 많은 걸 생각해야 했다. 언니로서 동생의 어떤 점이 좋아 보이는지 알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녀가 내게 관심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내 대답에 따라 동생을 질투하게 되는 건 아닐까?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망상이었지만 그렇게라도 궁리하지 않으면 내가 생각해오던 그녀들의 차이점을 술술 불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그냥 UMP9가 마음에 들었던 거야. 너랑 비교해본 적은 없었어."
"헤에, 그거 의외네요. 자존심 상하는데요?"
UMP45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나지막이 콧노래를 불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말해주려다가 말았다. 쓸데없이 건드렸다간 무슨 불똥이 튈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 고개를 돌렸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계속 미소 짓고 있어서 더 무서웠다.
"지휘관, 누구를 좋아하건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상대가 9라면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무슨 소리야?"
"9의 마음에 상처라도 내면 지휘관님께서 곤란해지신다는 점만 알아두세요."
그녀는 섬뜩한 경고를 남겨놓고 방을 나섰다.
"…지휘관? 지휘관!"
UMP9가 소리쳤다. 나는 그녀의 부름을 받고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턱을 괴고 있는 내 손을 흔들면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휘관, 어디 아픈 거야? 왜 대답이 없어?"
"아, 잠깐 졸고 있었어." 내가 말했다. 너무 뻔한 거짓말이었다.
"눈도 안 감고?"
그녀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나는 숙소에서도 UMP45의 저의를 파악하는데 정신이 팔렸었다. 마음의 상처? 그저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뜻일까? 아니면 신중하게 고백하란 걸까? 어느 쪽이 됐건 간에 내 쪽에서 조심해야 했다. 내 섣부른 행동이 그녀의 경고를 무시하게 된다면 내가 지휘관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시달리게 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평소엔 물결처럼 잔잔하다가 한 번 화를 내면 무시무시하게 터뜨리는 사람이 주변에 꼭 한 명씩은 있기 마련이다. UMP45가 마냥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내 앞에서 화를 내기는커녕 투정을 부린 적도 없었다. 희귀한 구경거리라도 당사자가 나라면 당연히 거절하고 싶었다.
보기 어려운 거로 치자면 UMP9가 상처받는 쪽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가 기죽은 모습은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아주 잠깐뿐이었다. 주변에 행복 바이러스를 뿌리고 다니는 그녀가 슬퍼할 정도면 얼마나 큰 실망감을 안겨줘야 할까? UMP45는 내 행동이 그만한 파급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지휘관…또…!"
UMP9가 양손으로 내 목덜미를 감싸 안고 투덜거렸다. 그녀의 따스한 기운이 살갗에 닿았다. 그녀는 쌤통이 난 듯 양쪽 볼에 바람을 가득 채워 넣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해맑게 웃었다. UMP45의 마음마저 녹여버릴 법한 미소였다. 소파에서 다정한 삐걱거림이 들렸다.
"무슨 고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줘, 지휘관. 내가 깔끔하게 해결해줄게!"
"고마워, 하지만 이건 나 혼자서 해결해야 하거든."
나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살짝 들이밀어 그녀와 뺨을 마주 대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녀가 이 정도로 웃어주는 게 다행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아쉬웠다. 볼이 조금만 더 발그레해지거나 아쉬워하는 눈빛을 보낸다면 기꺼이 한 발자국 더 내밀어 볼 텐데….
UMP9가 둔감한 건 아니었다. 언니의 뒤를 따라 바깥에 공개할 수 없는 험한 일들을 맡아온 만큼 예리한 직감은 살아 있었다. 그녀의 레이더망은 내 기분이 조금만 안 좋아져도 곧장 잡아내 왔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만은 계속 놓치고 있었다. 내가 그만큼 잘 감추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녀가 알고도 애써 무시하는 걸까? 지금은 모든 게 의문점투성이였다.
그래도 후자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지금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즐겁게 이야기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의 잡담은 매번 레퍼토리가 비슷비슷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내가 잘 극복했다, 그때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언니는 든든하고 뛰어나다,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 등등. 다른 건 몰라도 언니에 대한 칭찬이 빠진 적은 없었다. 그녀는 이야기하던 중에 벌떡 일어나서 내가 가져온 쿠키를 꺼내 먹었다. 이번엔 레몬 크림치즈였다. 매번 간식거리를 사다 주는데도 그녀가 무슨 맛을 가장 좋아하는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건 맛이 어때?" 내가 물었다.
"응, 맛있어. 지휘관이 주는 건 뭐든지 좋아!"
이러기만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내겠는가. 그래도 그녀가 정말로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웠다.
"9, 요새 너무 먹는 거 아니야? 자꾸 그러면 너 살찐다."
UMP45가 소파 너머로 얼굴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한텐 살벌하게 느껴졌다. UMP9는 보란 듯이 쿠키를 한입 가득 베어 물고 그녀를 향해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럴 일 없거든요, 내가 먹는 건 다 여기로 간다고."
UMP9가 가슴팍을 자신 있게 치면서 말했다. 귀여웠지만 매를 버는 짓이었다. 예상대로 매서운 꿀밤이 그녀의 정수리 한가운데에 꽂혔다.
"그래, 너 좋겠다. 지휘관, 이제 슬슬 다음 작전을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요."
UMP45가 서류를 내밀었다. 그녀와 아무 상관 없는 임무였다. UMP9가 내 곁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동안 바쁘게 움직여주는 쪽은 늘 UMP45였다.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았어, 지금 가서 검토해볼게. 항상 고마워."
"별말씀을요. 제가 했던 말만 기억하시면 돼요." 그녀가 말했다.
할 말은 반드시 하고 가는 게 역시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나간 뒤에 UMP9가 꿀밤 맞은 부위를 어루만지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휘관, 언니가 무슨 말을 했는데?"
"작전 중에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주의를 줬거든."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맞아, 지휘관 저번에도 실수해서 언니한테 한소리 들었지? 내가 다음에 나갈 땐 그러면 안 돼."
그녀는 내 두 번째 거짓말은 믿어주었다. 나는 실없이 웃으면서 방을 나섰지만 지휘실로 가는 동안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주말이 다가왔다. 나는 여느 때처럼 인형들을 데리고 시내로 외출할 계획이었다. 이번엔 UMP 자매 차례였다. UMP9는 내 팔에 매달려서 그녀의 언니와 함께 다닐 곳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녀의 코스대로만 간다면 UMP45의 분위기에 어울릴 만한 곳은 한 군데도 들르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주말 동안 시내에 있을 행사들을 알아보고 균형 있게 코스를 정해두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UMP45가 외출을 거절했다.
"지휘관, 이번 주말엔 9와 둘이서 다녀오세요."
나는 서류를 파일에 꽂다가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까진 항상 자매가 꼭 붙어 다녔었다. 그녀는 동생이 아쉬워할 거라는 내 말에 코웃음을 쳤다.
"지휘관한테는 아쉽지 않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한테는 다음 기회를 주시면 돼요. 9한테는 제가 말해둘게요. 이번엔 제 시선 의식하지 말고 잘해보시라고요."
인형에게 격려를 받는 내 신세가 처량해 보였다. 나는 지난밤에 세워두었던 계획들을 전부 찢어버리고 간편한 복장으로 UMP9와 함께 시내로 나갔다. UMP45가 동행했을 땐 그녀가 어느 정도 완급 조절을 해줬었지만 이번엔 어림없었다. UMP9는 사뿐하게 거리를 쏘다니면서 나를 끌고 다녔다. 그녀는 단골 오락실에 자리를 잡고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치면서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게임에는 소질이 없어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신작을 뽑아내는 격투 게임이었다. 그녀는 입을 꽉 다물고 현란하게 래버를 돌리면서 손쉽게 1승을 따냈다.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손놀림이었다. 게임에 관해선 일자무식인 내가 봐도 지난번보다 실력이 늘어난 것 같았다. 도대체 언제 연습을 해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맞은편에 앉은 사내를 상대로 3승을 뽑아내고 우쭐해졌다.
"지휘관, 나 어땠어?"
"내가 아는 인형 중에 최고였어. 그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리진 않겠는데."
"그 정도는 아니야. 얼마 전에 옆 동네에 게임을 끝내주게 잘하는 인형이 있다고 들었거든. 나도 그 정도 소문은 나야 하지 않겠어?"
그만한 명성을 얻기 위한 비용은 계속 내 지갑에서 나가겠지. 그래도 오락실은 시간 대비 비용이 적게 드는 곳이라 나쁘지만은 않았다. 한 시간에 걸쳐 수많은 도전자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모두 처음엔 기세등등했지만, 레버 앞에 올려둔 동전이 떨어지고 나면 풀이 죽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임이 다 끝났을 땐 도전자들이 시위대처럼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UMP9 대신에 시기 어린 눈빛들을 한 몸에 받으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제 겨우 손 풀기가 끝났을 뿐이었다.
"지휘관, 이번엔 몸 좀 풀러 가자. 같이 해줄 거지?"
UMP9가 양손으로 배트를 잡는 흉내를 내면서 말했다. 그녀는 그럴싸한 자세로 스윙을 해보고 나서 가볍게 손을 털었다. 나는 사양했지만 그런다고 멈출 그녀가 아니었다. 내가 다시 한번 구경꾼이 돼야 했다. 나는 큼지막한 가상 장치들이 매달려 있는 야구장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제 딴엔 멋진 타자 흉내를 내는 것 같았지만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우지는 못했다.. 그녀는 자기에게 날아드는 공이 빨라질수록 더 크게 배트를 휘두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마지막 공을 홈런으로 마무리 지었을 땐 턱밑에까지 구슬땀을 흘리면서 내게 엄지를 추켜세웠다.
"이제 몸풀기는 끝난 거야?"
내가 물었다. 그녀가 땀을 훔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뺀 다음엔 배를 채울 차례였다. 나는 그녀에게 길 안내를 맡겼다. 언니와 달리 그녀는 유독 단골로 찾아다니는 곳이 많았다. 셋이서 오던 패밀리 레스토랑을 둘이서만 오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UMP9가 군침을 흘리면서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체하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골라."
내가 말했다. 예전에 UMP9가 배탈이 날 정도로 음식을 잔뜩 주문했다가 UMP45에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철없는 부탁을 들어준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UMP9는 내가 치즈 후라이 한 접시를 비우는 동안 토마토소스에 크림을 얹은 파스타와 갖가지 채소가 듬뿍 올려진 스테이크 샐러드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그녀는 방금 닦아낸 듯이 깔끔하게 비워진 접시를 보고 나서 배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만족했다. 레스토랑에 처음 들른 어린이도 그렇게 맛있게 먹지는 못할 것 같았다.
계산을 마치고 나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볼 만한 기회가 생겼다. 나는 곧장 영화관으로 향했다. 주말인데도 로비가 한산했다. 계획을 짜다 말아서 생각해둔 작품이 없었다. 나는 못마땅하게 포스터를 넘겨보았다. 이번에도 UMP9에게 선택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미 첫 번째 포스트에 마음이 꽂혀 있었다.
"지휘관, 이거 보자, 이거!"
포스터부터 요란하기 그지없는 러브 코미디였다. 한물간 배우들이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음…정말 이걸 보고 싶어?" 내가 물었다.
"응! 싫으면 다른 걸로 해도 돼."
마땅한 대안이 없었던 터라 표를 사고 말았다. 그녀는 팝콘이 위태롭게 쌓인 봉지를 안아 들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기 전부터 기대감을 낮춰두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고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말았다. UMP9는 내게 고문 같았던 두 시간 동안 감탄사를 중얼거리면서 팝콘을 비워냈다. 흔해 빠진 해피 엔딩과 함께 올라오는 스텝롤을 보면서 나는 한쪽이라도 즐거워서 다행이라고 나 자신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휘관, 재미없었어?"
그녀가 물었다. 나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끔찍했어."
"그래? 난 괜찮았는데."
그녀가 쓰레기통에 구겨놓은 빈 봉지를 던져넣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환상을 만족하게 해주려면 내 능력으로는 무리일 것 같았다. 신선한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기 무섭게 그녀가 내 손을 붙잡았다.
"지금 쉴 생각은 아니지, 지휘관?"
그럼 그렇지.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발길을 옮겼다.
나는 강가의 벤치에 앉아 저녁노을이 지는 걸 지켜보았다. UMP9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얼굴로 빨대 꽂힌 과일 주스를 마시면서 다리를 흔들었다. 영화관에 있던 때를 빼곤 정신없이 움직이기만 하던 하루였다. 말 그대로 그녀다운 일정이었건만 UMP45가 생각했을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평소대로 놀기만 했다는 내 설명을 듣고 나면 UMP45가 나를 한심한 숙맥으로 여길 게 뻔했다. 그래도 나는 UMP9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녀가 내게 서운해하지만 않는다면 지금보다 가까워질 기회는 언제든 다시 찾아올 터였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 지휘관." 그녀가 말했다. "언니도 함께였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UMP45가 있었으면 어림도 없었을 거란 걸 알면서 하는 말이었다. 나는 혼자서 당직실을 지키고 있을 그녀를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아, 잠깐만."
그녀가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놓고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보고 있다가 난데없는 기습을 당했다. 가벼운 입맞춤뿐이었지만 입술을 타고 전해진 아찔한 전율과 달콤한 향기가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그 감촉들은 목마를 때 만난 물웅덩이처럼 달가웠다. 그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내 마음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이건 내 답례야."
그녀가 말했다.
온종일 활력이 넘치던 UMP9도 기지에 돌아오고 나선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놀았으면 질릴 법도 한데 그녀는 다음 외출도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언니도 챙겨줘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면서 숙소까지 바래다주었다. 저녁 식사를 끝마친 인형들이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그녀의 자랑을 듣기 전에 방문을 닫았다.
UMP45는 내가 생각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뒤통수에 깍지 낀 손을 대고 다리를 쭉 편 채로 당직실 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기지 내 CCTV 화면들을 보고 있었다. 탁자에는 밑바닥에 커피 찌꺼기가 눌어붙은 머그잔과 얇은 잡지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내가 들어온 걸 알고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잘 놀다 왔어요?"
그녀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음…아주 조금 진전이 있었어."
"그거 확실한 거예요?"
갑자기 날이 섰다.
"사실 별일 없었어."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휘관, 같은 기회를 두 번이나 줄 순 없어요. 저도 나가서 쉬고 싶었단 말이에요."
"알고 있어. 내가 다음에 챙겨줄 테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아줘."
"실망이라뇨. 9에게 문제만 없으면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지금 하신 약속도 잘 지켜주셔야 해요."
그녀는 차트에서 UMP9를 체크하고 나가보란 듯이 어깨너머로 손짓을 보냈다. 야간 당직은 내가 대신 서줄 생각이었는데 말을 꺼내볼 틈도 없었다.
나는 다음 주말이 오자마자 UMP45와의 약속을 지켰다. 이번에도 계획은 세울 필요가 없었다. 지난주보다 날씨가 안 좋은 게 흠이었지만 다행히 비가 온다는 소식은 없었다. 나는 두꺼운 코트를 꺼내 입고 기지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칙칙한 구름이 몰려다니면서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돋보기에 집중된 것처럼 한 줄기씩 빠져나온 햇빛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거친 바람이 불어오면서 나뭇가지들이 사납게 흔들렸다. UMP45는 잔기침을 하면서 목도리를 두르고 나왔다. 재킷 안에 스웨터를 입고 있어서 감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UMP45와 단둘이 외출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시내로 나가는 동안 내 옆자리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차에서 내릴 때까지 대화는 한마디도 없었다. 히터의 윙윙거리는 소음만이 완전한 정적을 막아주었다. 어느 정도 예상해둔 일이었기에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그래도 자매가 함께 다니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돌풍이 더운 공기를 빨아들이면서 앞 좌석을 훑고 지나갔다.
"어디부터 들르고 싶어?" 내가 물었다.
"서점부터 가세요."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 이것저것 살 게 많잖아요?"
마침 나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주말에는 서점이 일찍 문을 닫아서 늦지 않게 들러야 했다.
"그래도 이제 막 나왔는데…."
"아직 여유 있잖아요. 전 상관없어요."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그녀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거리는 바람이 쓸고 지나간 듯이 텅 비어 있었다. 나처럼 코트로 중무장하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사내 몇몇만이 우리 곁을 지나쳤다.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훈기가 얼굴을 덮었다. UMP45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책들을 둘러보면서 알아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휴대폰에 입력해둔 구입 목록을 열어보고 점원에게 물어가면서 책들을 봉투 안에 담았다. 복잡한 도시를 피하고 싶어서 선택한 직업이었는데 이 작은 사회 안에서 배워야 하는 게 바깥보다 훨씬 더 많았다. 내가 마지막 책을 고르는 동안 UMP45는 책장에 등을 기댄 채로 독서에 열중이었다. 어떤 서점에서나 야단맞기 딱 좋은 행동이었지만 내 지갑이 있으니 문제 될 게 없었다. 나는 그녀가 읽고 있던 추리 소설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서점을 나서면서 내 손을 잡고 나름대로 고마움을 전했다.
나는 그녀의 곁에서 천천히 걸었다. 지난주와 달리 모든 게 느릿느릿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칼바람에 파묻히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샌가 다른 길로 접어들곤 했다.
우리는 자그마한 카페에 들어섰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흔들렸다. 고풍스러운 목제 인테리어처럼 황혼기에 접어든 중년 남성이 반겨주었다. 나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UMP45는 코코아를 고르고 나서 디저트는 어떤 거로 하겠냐는 내 질문에 작게 미소 지었다.
"저도 9처럼 지휘관이 사주는 거로 하고 싶네요."
나는 산뜻한 딸기가 올려진 조각 케이크를 추가했다. 우리는 김이 허옇게 서린 유리창을 보면서 잔을 비웠다. 고요한 공기가 웃돌았지만 졸리지는 않았다. UMP45는 케이크를 포크로 조금씩 잘라가며 먹었다. 동생이었다면 한 입 거리도 안 됐겠지. 그녀의 이미지에 시끌벅적한 음식점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동안 UMP9를 따라 그런 곳만을 골랐었다. 자매를 떼어놓고 보니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신선했다. UMP45는 내 시선을 알아채고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닦아냈다.
"맛이 어때?"
내가 물었다. UMP9에겐 수도 없이 했던 질문이었지만 그녀에겐 처음이었다.
"지휘관이 사준 건데 안 좋을 수가 없죠."
그녀가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UMP45의 다음 선택은 영화관이었다. 이번엔 배려가 섞인 게 아니었다. 그녀는 영화관에 들어서자마자 미리 점찍어둔 포스터 두 개를 빼내 내 눈앞에 펼쳐 보였다. 간격을 십 분 두고 연속으로 볼 수 있게 상영 시간이 짜여 있었다. 그녀는 내 난처한 얼굴빛을 보고 즐거워했다. 나는 팝콘을 챙겨 들고 좌석에 앉았다. 그거라도 없으면 영화를 보는 내내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첫 번째 작품은 가족을 잃은 남자의 복수극을 다룬 스릴러물이었다. 흔해 빠진 스토리였지만 연출력이 뛰어난 작품이었다. 작품 속에서 칼부림이 벌어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UMP45는 피바다로 변해가는 스크린을 아무렇지 않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누비고 다닌 전장과 비교하면 그 정도는 새 발의 피긴 했다. 그녀는 그 작품이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안에도 팸플릿을 꼭 붙들고 있었다.
진짜 문제는 두 번째 영화였다. 첫 장면에서부터 그 작품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깨에 두툼한 근육이 붙은 사내가 여자를 장롱으로 밀어붙이고 그녀의 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살며시 떼주었다. 바짝 마른 입술끼리 맞붙고 나서 혀끝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사내의 혀가 여자의 풍만한 ㅁㅁ을 따라 엉덩이와 허벅지로 내려가면서 둘의 맥박이 똑같이 두근거렸다. 여자의 손이 사내의 허리띠 속을 서툴게 헤집다가 버클을 끌렀다.
여주인공이 침대에서 첫 경험의 배덕감으로 몸서리치는 동안 나는 UMP45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팝콘을 집어 든 내 손은 더 과격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멈칫거렸다. 그녀는 입을 지그시 다물고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남자 관객들은 대부분 영화가 끝난 뒤에도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까지 화끈했던 탓이었다. 여자 친구와 동행한 이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나는 멀쩡했다. 아예 서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괜찮네요."
UMP45가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그게 그녀의 유일한 감상평이었다.
영화관을 나섰을 땐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바람이 더 매서워지면서 UMP45와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화려한 가게 장식과 어울리지 않게 깜빡거리는 가로등 앞에 멈춰 섰다. UMP9라면 내 지갑을 털어버리고도 남을 근사한 레스토랑이었다.
"지휘관, 여기서 먹게요?"
UMP45가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그런 반응을 보고 나니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고생해온 그녀에게 보답하려는 의도였지만 어울리는 분위기에 물든 그녀의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다.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웨이터들이 카펫 위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UMP45는 냅킨을 두르고 나서 메뉴판을 조심스럽게 훑어보았다. 나는 그녀가 거절할 수 없게 나와 똑같은 스테이크 세트를 주문하고 와인까지 한 병 추가했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쓸 돈이라면 크게 질러야 후회가 안 남는 법이야."
내가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먹는 동안에 후회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팁이 제외된 영수증을 받고 나면 누구나 눈이 접시만 해지겠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음식은 금세 테이블에 도착했다. UMP45는 보기보다 묵직한 순은 나이프를 들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썰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궁금했지만, 그녀의 우아한 분위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맛있네요." 그녀가 말했다. "9도 같이 있었으면…그건 무리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보다 양이 더 많은 곳을 좋아할 거야."
"그런 생각은 좋지 않아요. 여자들은 이런 곳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한 번쯤은 들르고 싶어 한다고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UMP9가 입가에 소스를 묻혀가며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발랄한 얼굴을 보려면 다시 기회가 찾아오더라도 이런 곳은 피해야 했다. 나는 잔에 와인을 따르면서 밤 불빛들이 뭉쳐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쯤이면 UMP9는 숙소에서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서 뒹굴고 있겠지. 게임에 빠져있다가도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만 들으면 쏜살같이 입구로 달려 나올 게 분명했다.
"벌써 9가 보고 싶어서 안달이에요?"
"아니, 그냥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싶어서."
"그게 그거잖아요."
그녀가 와인을 건네받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UMP9가 내게 입을 맞추었던 강가 앞의 산책로를 거닐었다. 밤공기가 쌀쌀해지면서 입 밖으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물 위에 비친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반짝였다. UMP45는 내 손을 잡고 말없이 걷기만 하다가 이따금 도시의 야경을 둘러보곤 했다. 그녀가 먼저 돌아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하늘 위로 별이 촘촘히 새겨지는 동안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내가 은근슬쩍 주차장으로 방향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와 맞잡은 손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는 히터를 세게 틀어놓고 차를 몰았다. 라디오에선 오래된 음악만이 흘러나왔다. 아침보다 요란스러워진 바람들이 우박처럼 앞 유리를 두들기고 지나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UMP45가 다시 내 손을 붙잡았다. 여전히 그녀의 손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희미해진 게 마음에 걸렸다.
"장갑이라도 갖고 나올걸…."
"네?"
"네 손이 차가운 것 같아서."
"전 괜찮아요."
그녀가 손을 더 꽉 쥐면서 말했다. 기지의 낯익은 불빛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입구에서 한가롭게 서 있던 인형들이 먼 곳에서부터 우리를 알아보고 어설픈 자세로 경례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지휘관."
내가 똑같이 경례를 받아주는 동안 UMP45가 말했다. 정확히 어떤 때였는지 기억이 안 났지만, 한순간이나마 그녀에게서 UMP9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나와 맞잡은 손을 내려놓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맞은편에서 UMP9가 달려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지만,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파티장은 요란 법석했다. 이미 취해버린 지휘관 몇몇이 몸을 비틀거리면서 테이블을 옮겨 다니고 있었다. 나처럼 인형과 동행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테이블엔 커다란 레드 벨벳 컵케이크와 진저 에일, 과일 펀치, 맥주, 그저 그런 위스키가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천장의 스피커에서 흥겨운 댄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 년 전에나 하던 고등학교 졸업 파티가 여기와 비슷할 것 같았다. UMP9는 내 팔에 매달려 가볍게 몸을 흔들면서 컵케이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지휘관, 이것도 정기 행사야?"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내가 술병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저질과 보통 사이의 것들로 생각 없이 취해버리기엔 딱 좋은 물건이었다.
"그럼 왜 전에는 데려오지 않았던 거야?"
그야 이런 분위기는 질색이니까. 나는 괜히 흥을 깰법한 대답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전에도 파티는 숱하게 있었다. 본사에서 주관하지 않는 조촐한 술자리 수준이긴 해도 이 지역에선 제법 인기가 있었다. 초대장은 신용카드 영수증처럼 주기적으로 우편함에 들어왔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UMP45는 지휘실에서 내가 휴지통에 던져넣은 초대장을 보고 왜 기껏 굴러들어온 기회마저 걷어차냐며 타박했었다.
"이런 자리가 무슨 기회가 된다는 거야?"
"아무 데도 안 가는 것보단 낫겠죠. 계속 그렇게 간만 보실 거에요?"
"아니, 그래도 여기에 가봤자 늘어질 때까지 마시기만 할 게 뻔한데…."
"9가 먼저 취해서 고백할지도 모르죠."
나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지만, 그녀는 다음 달 달력을 넘기면서 집요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14일에 빨간색 매직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이때 근사한 분위기를 가지려면 미리 점수 좀 따놓으셔야 한다고요."
결국, 그녀의 말을 따르긴 했지만 UMP9라면 점수는 애초에 매기지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즐겨 마시던 위스키로 간에 시동을 걸면서 UMP9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펀치를 마시면서 처음 만난 인형과 친근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가 술을 못 마시는 건 아니었지만 취한 적은 없었다. 그녀와 바깥 풍경만을 안주 삼아 마시다 보니 금세 취기가 올랐다. 중앙 테이블에 있는 파티의 하이라이트를 즐기기 전까진 적당히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레몬 쿠키와 진저 에일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한 잔, 또 한 잔을 홀짝이다 보니 생각하는 게 점점 귀찮아져 갔다.
"지휘관,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UMP9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과일 향 때문에 입안이 시큰거렸다. 그녀의 양쪽 볼도 단풍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뒤늦게 머릿속에서 짧은 경고음이 울렸다. 겨우 술이나 마시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오는 게 어때?"
"그래야겠어. 같이 나갈래?"
"응! 먼저 나가 있어도 돼?"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나가다 말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올 때 내가 마실 것도 부탁해, 지휘관."
이제 술은 멈춰야 했다. 테이블들이 물 위에 뜬 것처럼 흔들거렸다. 국자로 펀치를 뜨는 동안 싸구려 중국산 모포 같은 주홍빛이 눈에 띄었다. 나는 오렌지 맛이겠거니 생각하며 두 잔을 담아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잡초가 무성한 조그만 언덕 너머로 앙상한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UMP9는 나무 아래 앉아 별 하나 뜨지 않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딸꾹거렸다. 발그스름한 볼이 보기에 좋았다. 그녀는 잔을 받아들자마자 시원하게 들이켜고 나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휘관, 이거 엄청 독한데…."
"취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야."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잔을 입에 갖다 댔다. 한 모금 넘기기 무섭게 목구멍이 타들어 가서 도로 뱉어내야 했다. 내가 몇 번째 테이블에 있었더라? 가운데였나?
"미안, 내가 잘못 떠왔나 봐."
UMP9는 내 사과를 듣지도 못하고 해롱거렸다.
"9, 괜찮아? 물 좀 떠올까?"
"가지마, 지휘관."
그녀가 내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꼼짝없이 그녀에게 내 어깨를 빌려주고 정신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녀는 입가에 침이 고인 채로 횡설수설거렸다. UMP45가 점지한 것과 딱 맞는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태로 듣는 본심은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에게 속삭이듯이 질문했다.
"9, 내가 마음에 들어?"
"물론이지!" 그녀가 소리쳤다.
"그럼…우리 관계에 지금보다 진도를 더 빼도 받아줄 수 있겠어?"
그녀는 돌연 진지한 얼굴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신을 차린 거라면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나는 주머니에 들어 있는 반지를 움켜쥐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건 싫어, 지휘관."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나서 풀밭 위에 쓰러졌다. 멀쩡한 정신으로 말한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내게 주어진 몇 주일간의 준비 기간에 안도하며 그녀가 다시 일어났을 때 이번 일을 몽땅 잊어버리길 간절히 바랐다.
달력을 넘긴 뒤엔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갔다. 14일을 며칠 앞두고 기지 앞으로 인형들의 개인적인 소포들이 몇 상자씩 연달아 들어오곤 했다. 인형들은 뭘 샀냐는 내 질문에 장난스럽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숙소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다 보면 제아무리 입 간수를 잘해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크림 젓는 소리에 아찔한 비명들이 섞여 있었다. 고맙긴 해도 그것들을 일일이 맛볼 생각을 하려니 속이 니글거렸다.
UMP 자매의 소포는 하루 전에 도착했다. 다른 인형들이 실패작 때문에 울상을 짓는 동안 그녀들은 자신 있게 앞치마를 둘러메고 숙소에 틀어박혔다. 만에 하나더라도 그녀들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숙소 앞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는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소동을 짐작할 수 있었다. UMP9가 서툴게 모양을 짜다 보면 언니가 나서서 바로잡아줄 것이다. 그녀는 초콜릿이 서서히 굳어가는 동안 숙소를 돌아다니면서 자기 작품을 자랑하겠지. 정성스럽게 포장을 끝마친 뒤엔 뿌듯한 얼굴로 초콜릿을 품 안에 안고 날짜를 세어가며 부푼 마음을 달랠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휘실에서 밸런타인데이를 맞이했다. 활기찬 인형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내 책상 위에 앞다퉈 각자의 작품을 올려두었다. 모양만 봐도 인형들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났다. 나는 기대에 찬 눈빛을 한 인형들 앞에서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벗겨보았다. 포장지에 알맞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게 절반씩 섞여 있었다. 그것들을 한 입씩 떼어 먹어보는 동안 입안에서 오감이 교차했다. 살살 녹는 부드러움이 가시기도 전에 지독하게 달거나 쓴 맛들이 혀를 점령하는 식이었다. 말 그대로 우정의 초콜릿이었다. 내가 해야 할 말은 당연히 맛있다는 것뿐이었다.
UMP9는 한바탕 소동이 휩쓴 뒤에 찾아왔다. 그녀는 고개만 내밀어서 지휘실을 둘러보았다. 품에는 빨간색 하트 모양의 포장지가 들려 있었다. 얼굴에 수줍은 기색은 없었다.
"자, 지휘관. 이건 내가 만든 거야."
그녀가 초콜릿을 건네면서 말했다. 나는 곧장 끈을 풀고 반듯한 모양의 갈색 하트를 확인했다. 하얀 크림으로 좋아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모양만 그럴싸했던 작품들이 많아서 그것만으론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뒷짐 진 손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는 초콜릿을 한 손으로 집어 들고 과감하게 베어 물었다. 적당한 달콤함이 입안을 감돌았다.
"제법인데? 이 정도면 자주 만들어도 되겠어."
"음…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그녀가 말했다.
하긴 항상 언니의 도움을 받을 순 없겠지. 나는 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내 들고 일어났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동안 너무 놀라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화색한 얼굴로 상자를 받아들었다.
"이건 내가 널 위해 준비한 거야."
"헤헤, 드디어 고백해주는 거야? 정말 오래 기다리고 있었어."
놀랍게도 그녀는 상자를 열어보기도 전에 내용물을 눈치채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입에서 '오래'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내가 너무 뜸을 들인 게 분명했다. 그녀는 자기 손에 반지를 끼워보고 나서 얼굴을 붉혔다.
"알고 있었던 거야?"
"전부 다는 아니야. 반지까지 사놓은 줄은 몰랐거든."
"그래도 용케 내가 고백할 건 알고 있었네."
"예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어. 그리고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그동안 그녀의 기억력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사실상 취기 어린 밤에 이미 고백이 끝나버린 뒤였다. 그렇다고 허탈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나와 비슷한 감정을 품고도 아무 말 없이 기다려준 그녀가 전보다 더 사랑스럽게 보였다.
"지휘관, 이제 우리 진짜 가족인 거지?"
그녀가 물었다. 나는 저녁노을 밑에서 그녀가 했던 기습과 같은 방식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UMP9를 숙소로 돌려보내고 주차장에 들렀다. 트렁크 안에는 반지를 빼놓고 그녀가 예상했을 법한 선물들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쇠뿔을 단숨에 빼버렸으니 더 아끼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지휘관."
등 뒤에서 UMP45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동생과 비슷하게 포근한 옷차림으로 초콜릿을 들고 있었다. 하트 모양이었다. UMP9가 누구 도움을 받았는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없었다.
"조금 전에 9를 보고 왔어요." 그녀가 초콜릿을 내밀면서 말했다. "멋지게 해내셨더라고요? 축하해요."
미소 띤 얼굴 때문에 비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침부터 수없이 받아왔건만 그녀가 수줍게 건네주는 걸 받았을 땐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때때로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직감이 번뜩일 때가 있다. 그녀가 등을 돌리고 걷는 동안 지난날에 놓치고 넘어갔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동안 그녀가 수줍어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처럼 얼굴을 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내 손을 놓지 않던 그녀의 차가운 손이 떠올랐다. 그녀처럼 철저한 사람이 어째서 장갑을 챙기지 않았을까? 손을 떨면서 뿜어내던 하얀 입김, 케이크를 먹으며 지어주던 화사한 미소, 동생이 보고 싶냐고 물어볼 때 어쩐지 씁쓸해하던 목소리…. 나는 그제야 그녀와의 외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받았던 느낌이 어떤 거였는지 깨달았다. UMP9가 내게 입을 맞출 때와 같았다.
"45."
그녀는 내 부름에 다시 한번 어깨너머로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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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18.06.13 10:4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