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의 영원한 주장하면 당연히 말디니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브라질 국민들에게 영원한 주장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요
바로 소크라테스 라고들 합니다
193센치의 큰 키에 마른체격
의사와 축구선수 모두가 직업
80년대 축구를 본적없는 사람들에게는 이정도 특이한 외모와 이색적인 직업경력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를 사랑하는 팬들은 그는 축구선수 보다 이름 그대로 철학가의 삶을 살다간 영웅이다 라고 말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결혼한 소크라테스는 당장 학비와 생활비를 구해야 했기 때문에
대학생 생활과 축구선수 생활을 모두하는 강행군을 시도합니다
보타포구 팀 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그는
57경기 24득점을 기록하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줍니다
이후 코린치안스 팀으로 이적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코린치안스 팀에서 인생 최고도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데
무려 297 경기 출장 172골을 기록하며 도저히 20대 선수라 믿기힘든 업적을 세움니다
그리고 여러차례 민주주의 시위에 참가하고 경기에서 이길때 마다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플랜카드를 들었습니다
젊은시절 소크라테스 에게 축구에서 이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정의와 자유를 외치는 처절한 싸움 이었던 것이였습니다
1980년 펠레 은퇴이후 장기간 부진에 시달리던 브라질은 네델란드 유학파 산타나에게 모든 지휘를 맡기고 부활을 위해
노력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당시 브라질팀은 지코 팔카우 세레조 오스카 세르징오 등 그야말로 80년대 최고의 무적 스쿼드를
형성 하는데
산타나 감독은 그들중 공격 수비 능력을 고루갖춘 소크라테스 에게 주장직을 맡깁니다
지역예선 부터 경기당 3.7골 이라는 거짓말 같은 득점력을 과시하며 브라질은 월드컵 까지 승승장구 하지만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되는 경기에서 로시에게 헤트트릭을 허용하며
월드컵 우승꿈을 접게 됩니다
이후 소크라테스는 모든걸 접고 축구에만 전념하고 싶다며 이탈리아 피오렌티나 팀으로 이적 하는데
소크라테스의 대표팀 동료 세레조 팔카우 지코 등은 소속팀에서 신들린듯 맹활약을 한것에 비해
정작 소크라테스는 1년간 25경기 6득점의 부진한 모습을 보입니다
민주화 운동 실패와 월드컵 우승의 좌절이 자신에게 너무나도 정신적 스트레스로 작용한 것 이었습니다
1986년 산타나 감독은 언론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를 다시 대표팀에 부르며
소크라테스는 반듯이 부활한다 라고 외쳤습니다
산타나 감독의 예언대로 지역예선 부터 한동안 부진했던 모습을 도저히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소크라테스는 다시 전성기의 모습을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월드컵 16강 까지 무난하게 갔던 브라질
하지만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미셀플라티니 를 축으로 매직 스쿼드라 불리는 프랑스팀 이었고
브라질의 약점인 수비 불안은 확실하게 노출 되었으며
갖갖으로 동점까지 따라 갔지만 승부차기 에서 프랑스에게 패배하며 브라질은 또다시 우승을 미루게 됩니다
월드컵이 끝나자 산토스팀으로 이적한 소크라테스는 15경기 5득점에 그쳤고
고향 보타포구 로 돌아온 뒤로는 한경기도 출전못하고 결국 1년 만에 은퇴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의 스타일
소크라테스의 전성기 경기를 본 사람은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다 라고 말합니다
양발을 다 사용하고 장신 인데도 스피드와 개인기가 뛰어나고
놀라울 정도로 시야가 넓고
슛과 패스가 날카로우면서도 정확하고
경기가 안풀릴때 새로운 작전을 생각해 낼줄아는 선수 였습니다
선수로서 장점도 엄청 많고 많은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소화해 내기 때문에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선수 였습니다
은퇴 이후의 삶
소크라테스 선수는 선수생활 중에도 학위를 수여할 정도로 공부도 잘했습니다
의사로서 정형외과와 소화관출혈, 간문맥항진증에 대한 치료능력을 인정 받았고
브라질의 민주주의 가 이루어진 이후 정치관련 칼럼을 쓰는것 일에도 아주 열정적 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브라질 월드컵 관련 칼럼을 쓰면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유치에 크게 일조 합니다
50세에 들어서 잉글랜드 아마추어 팀에서 코치겸 선수로 다시 선수 생활을 시작 하기도 합니다
아이러니 한건
그는 간치료 전문가고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환자를 걱정하는 의사 였지만
술을 좋아하는 성격 만큼은 고치지 못했고
선수 시절이나 은퇴 이후나 여전히 과음이 심했고 그것때문에 결국 패출혈로 57세에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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