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피해자의 나이는 14살 중학교 1학년
담배를 피우던 순경 앞을 지나가자 욕설을 하며 파출소로 데리고 간다.
소지품 검사를 빌미로 가방안에 있던 빵의 출처를 묻고, 학교에서 받았다고 답하자
바른대로 말하라고 욕설과 폭행을 시작한다.
곤봉으로 때려도 답하지 않자, 라이터를 달궈 중요부위에 고문을 이어갔다.
빵을 훔쳤다고 답하자 순경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20~30분 위 모자를 쓴 남자 둘이 오더니
피해자를 탑차에 강제로 밀어 넣는다.
이렇게 납치 감금된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집을 찾아주겠다던 경찰, 형사가
혼자 있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데려갔다는 피해자들의 증언
당시 언론은 그들을 부랑인, 부랑아로 보도했다.
당시 아동이었던 피해자들에게
폭행, 구타, 성폭행 등의 행위로 피해자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지배했다.
심지어 말을 듣지 않고 지속적으로 탈출하려고 했던 피해자에게
약물까지 먹였다는 충격적인 증언
피해자들은 86년도에는 3,200명
가장 많을 때는 4,300명까지도 수용 되었다.
추정 피해자 수는 3만 8천여명
1980년 부산의 인구는 329만명으로
부산 시민 1000명당 11.55명꼴로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셈
그런데
부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는데
경찰은 왜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을까?
눌랍게도 형제복지원들로 잡혀간 사람의 80%는
경찰이 잡아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부랑자,부랑아라는 명목으로
경찰이 직접 갖다 바쳤던 셈
경찰이 이런 일을 한 이유를 알아보자
결국 시민들을 지켜야 할 경찰들은
본인 실적을 높이기 위해
시민들 형제복지원에 바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형제복지원이 경찰에게 뒷돈을 주었다는 의혹과
이를 사무실에서 자주 보았다는
형제복지원 원장 가족의 증언
1980년대 1인당 국민 소득은 약 100만원으로
5백만원은 연간 소득의 5배애 달하는 금액
주택 한 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피해자들은 지금도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형제복지원 원장의 가족들은 그 당시 모은 돈으로
해외에서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해당 사건으로 인해
경찰은 처벌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