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블러드 앤 와인’의 엔딩을 봤습니다. 거의 1년 가까이 저를 흔들어놓은 위쳐 3의, 그리고 게롤트의 여정 역시 막을 내렸습니다.(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말이에요. 제발.)
엔딩의 여운을 느끼면서 차분하게 놓친 것이 있나, 혹은 이제 2회차는 어떤 분기로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루리웹 게시판을 훑어보던 중에 흥미로운 글을 몇 개 읽었습니다.
‘루리웹-3819398019’님이 쓰신 ‘[스포일러] 어째서 시아나를 XX할 수 없는가’라는 글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리자면 무척 흥미로운 글이었고, 부분적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그리고 그 외에도 시아나와 디틀라프, 안나 헨리에타라는 블러드 앤 와인의 주축을 이루는 인물들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걸 보고, 게임의 스토리를 가지고 생각보다 깊은 내용들이 오갈 수도 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하긴 게임의 내용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위쳐 시리즈가 처음은 아닐 겁니다. 바이오쇼크라던가, 더 오래 전으로 가면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 같은 작품들도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부족한 사견으로 몇 자 적어볼까 합니다. 당연히 이어질 내용은 [스포일러]이며, 일단 저는 장로 루트 엔딩만 본 상황입니다. 다른 엔딩에 대해서는 게시판의 글을 참고로 유추했을 뿐이기에, 부족한 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덧붙이자면, 이건 제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고, 결코 다른 분들의 의견에 어깃장을 놓거나, 그 의견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쪽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견제시일 뿐이죠.
첫 확장팩인 ‘하츠 오브 스톤’이 올기어드 폰 에버릭과 군터 오 딤이라는 강렬한 인물들의 대립과 그 사이에 끼어버린 리비아의 게롤트의 고난을 다루었다면, ‘블러드 앤 와인’은 평화로운 투생 공국에 출몰하는 괴물과 그에 얽힌 음모를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비교적 간명한 서사 구조를 가진 ‘하츠 오브 스톤’과는 달리 ‘블러드 앤 와인’은 애초에 표면의 이야기인 ‘투생의 야수’와 그 야수를 조종하는 배후, 그리고 ‘야수의 인질’까지 얽히면서 비교적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시아나는 애초에 디틀라프를 이용하려고 접근했던 걸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블러드 앤 와인의 스토리도 좋았습니다만, 하츠 오브 스톤의 이야기가 더 좋았습니다. 호러 장르의 분위기와 매력적인 캐릭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개개인의 대립이 선명하고 모호한 구석이 없었습니다. 군터 오 딤은 절대적인 악입니다. 그는 소원을 들어준다면서 그 대가로 영혼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올기어드 폰 에버릭은 단순한 피해자일까요? 그 역시 자신의 욕망 때문에 많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군터 오 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역시 선인은 아닙니다. 악과 더 큰 악이라고 볼 수 있겠죠. 하츠 오브 스톤의 매력은, 명확한 선악구도가 아니라 인물들 개개인의 갈등점과 고뇌가 선명한 점입니다. 유저들에게 판단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각 선택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선명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블러드 앤 와인은 다릅니다. 메인 퀘스트의 중심 인물들은 모두 모호한 입장에 있습니다. 네 명의 기사를 무참히 살해한 디틀라프는 악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용당한 불쌍한 영혼일까요? 디틀라프를 속인 시아나는 악일까요? 아니면 그저 학대당한 어린 시절을 보낸 불쌍한 여자일까요? 또, 안나 헨리에타는 현명한 지도자일까요? 아니면 그저 혈육의 정으로 국민을 돌보지 않는 감정적인 폭군일까요? 게롤트는 이 불분명한 인물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 각자의 선택이 의미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무척이나 애매합니다. 또한 선택에 따른 결말 역시 가치를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하츠 오브 스톤에서는 올기어드를 구한다와 구하지 않는다가 의미하는 가치가 명확했지요.)
블러드 앤 와인에서 인물들을 둘러싼 논란, 수많은 비난과 옹호, 감정이입은 이런 모호함을 배경에 두고 있습니다. 누가 옳다고 확신을 가지기도, 그렇다고 틀렸다고 비난을 하기도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가장 나쁜 사람은 누구이고, 우리들의 주인공 리비아의 게롤트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이야기하면, ‘블러드 앤 와인’에서 일어난 사건 자체의 원흉은 명백합니다. ‘시아나’이죠. 작중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그녀의 행동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는 점은 명확합니다. 그녀가 디틀라프를 속여 살인을 지시했고, 디틀라프는 그녀에게 속아 살인을 했습니다. 안나 헨리에타는 야수를 쫒기 위해 게롤트를 불렀고, 게롤트는 디틀라프를 쫒다 레지스에게 사정을 전해 듣고 그를 도우려다 시아나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디틀라프는 배신감에 분노하여 투생을 공격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됩니다. 결국 디틀라프가 죽거나, 시아나가 죽거나, 끝내 안나 헨리에타마저 죽기도 합니다. 이 모든 행동이 시작된 원인이 시아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당연히 현대적인 법의 관점에서 보든, 아니면 중세적 관점에서 보든 시아나의 행동은 극악무도한 범죄입니다.
현대적으로 보면 시아나는 협박, 살인교사에 더불어 국가전복 혐의까지 있습니다. 이 정도는 게이머분들이라면 누구라도 알 겁니다.
하지만 중세적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요? 혹자는 중세적 관점에서는 시아나가 정당하다고 생각될 지도 모릅니다. 정리를 해보도록 합시다. 시아나는 공작가의 맏딸입니다.(번역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안나 헨리에타는 시아나를 언니라고 불렀습니다. 투생은 닐프가드 제국에 속한 공국이기에 왕가라기보다는 공작가, 혹은 공왕가문이라고 칭하는 편이 적절할 듯합니다.) 원칙적으로 보면 투생의 공왕위는 시아나가 계승하는 것(혹은 시아나의 남편)이 원칙입니다. 즉 제 1서열의 왕위계승자라는 것이지요.
헌데 그런 시아나의 입장이 모호해집니다. 태어나는 시기가 하필이면 검은 태양의 날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검은 태양의 날은 위쳐 세계관에서 일종의 저주로 받아들여집니다만, 정말로 저주인지 진위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소설과 게임에 등장한 검은 태양의 날 태생의 인물은 모두 세 명이었는데, 전부 여성이었으며 모두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고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성향을 보였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 시아나는 투생에서 쫒겨납니다.(안나 헨리에타는 도망쳤다고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마도 그녀들의 부모의 묵인 하에서 네 명의 기사들에게 이끌려 투생 밖으로 쫒겨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안나 헨리에타의 오해는 마치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목장’으로 보냈다고 얼버무리는 부모의 태도와 비슷한 것입니다.)
당연히 시아나는 박탈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굴욕에 대해 복수심을 느끼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태연하게 앉아 착한 척 아양을 떠는 동생, 안나 헨리에타에 대해 증오심을 품을 것입니다. 중세유럽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안나 헨리에타의 분노는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합법적인 왕위계승권은 그녀에게 있으며, 그녀가 추방당하고 모욕을 당한 것은 일종의 ‘반역행위’입니다. 그녀의 입장에서 안나 헨리에타와 자신을 추방한 네 명의 기사는 자신이 받아야할 것을 가로챈 찬탈자인 셈입니다.
여기서 그 명분은 앞서 말했던 ‘검은 태양의 저주’입니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 검은 태양의 저주에 대한 진위여부의 불확실함은 위쳐 시리즈의 작가 ‘안제이 사프콥스키’ 옹이 의도한 바로 읽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대두되는 살인범, 혹은 사이코패스의 선천성에 대한 메타포(은유)입니다. 잔인한 살인자는 과연 선천적으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어린 시절 받은 학대와 불행으로 그런 성향을 취하게 된 것일까요? 갑론을박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정답은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사이코패스의 뇌 구조에는 일반인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하고, 반면 통계적으로 잔혹한 살인범은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경우가 많기도 합니다.
시아나는 어떨까요? 축복받아야 할 왕위 계승 제 1순위의 공녀로 태어났지만 저주받은 아이라고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저주따위가 아니라, 보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유에 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시아나와 안나 헨리에타 두 사람의 개인적인 성향과는 상관없이, 누가 왕위에 오르냐는 것에 대해 정치적인 대립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이들에게 시아나의 태생에 대한 루머는 좋은 가십거리였을 것입니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런 가십거리는 잘 사용하면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도 쉽게 넘어트릴 수 있습니다.(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죠.)
어쩌면 정말로 시아나는 저주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디틀라프의 마음을 이용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일들에 대해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더불어 자신을 끌어안은 안나 헨리에타를 죽이고 마는 그녀의 인간성은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영역에 있습니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이 불가능한 영역으로 가게 됩니다.
시아나가 정말 저주받았다면, 저주받은 사람을 왕으로 추대할 수 없으니(아다 공주의 예를 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위쳐1에서 그녀를 다시 인간으로 돌려서 라도비드와 결혼을 시켰어도 그녀의 왕위계승권은 말소됩니다.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었죠. 물론 게임 이전에도 스트레가로 변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다 공주의 계승권은 위태로운 상황이었고요.) 그녀를 추방한 것은 정당합니다. 시아나 개인은 불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행동(살인교사, 반란모의 등)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합당한 이유로 왕위계승권이 박탈당했으니, 그것을 되찾으려는 행위 역시 반역입니다.
하지만 저주가 구실에 불과하다면, 시아나의 행동은 (중세적인 관점에서)정당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부당한 취급을 당했고, 자신의 것을 되찾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뱀파이어의 손을 빌린 것은, 중세의 관점에서는 그녀 나름의 수완을 보여주는 것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겠죠.(물론 그러다 수틀려서 투생의 절반을 불바다로 만든 것은 정당화되지 못하지만 말이죠. 이건 나중에 추가하겠습니다.) 고전적인 낭만서사로 보이기도 하지요. 음모로 인해 왕위를 뺏긴 여자가, 시간을 들여 동료를 얻어 왕위를 되찾기 위해 돌아오는……. 물론 동료라기보다는 속여먹은 거지만 현실세계가 다 그런 법이니까요.
재미있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는 반대라는 겁니다.
뇌나 정신에 문제가 있어서 범죄를 저질렀다면, 즉 판타지에서 저주에 걸린 것이 원인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자유의지로 일으킨 것이 아니니까요. 죄의 근원은 뇌의 이상이나 정신병입니다. 변호사가 그것을 입증하면, 범죄자는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죠.
반대로 정신이 말짱한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면? 아무리 정당한 이유가 있어도 사적 복수는 범죄입니다. 특히 살인이라면 변명의 여지도 없죠. 변호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처를 구함으로써 형량을 줄이는 정도입니다.(진범이 따로 없다는 가정하에서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현대사회와 위쳐에서 그려지는 중세 사회는 엄격한 갭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세계관을 보는 인식이 다르고, 그에 따른 처벌도 다르니까요.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우리의 관점으로, 시아나는 극단적으로 보면 정신나간 범죄자고, 최대한 곱게 보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인물입니다.(개인적인 감정이입을 제외하면 말이죠. 만약 그녀가 물할망구급의 추녀였다면? 남자였다면? ‘하츠 오브 스톤’에서 볼소디의 집을 가져올 때, 게롤트를 속여먹은 그 뺀질이를 어떻게 하셨나요?)
하지만 중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는 저주받은 괴물일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 돌아온 정당한 왕위계승자일지도 모릅니다.(수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세적 관점에서 목적의 달성은 언제나 수단을 정당화합니다.)
한편 네 명의 기사가 그녀에게 가한 학대 역시,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아동학대고 졸렬하고 불명예스러운 짓이지만 중세적 관점에서는 다릅니다. 우리는 이미 위쳐의 세계관을 여행하면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니까요. 스켈리게의 평범한 아낙네가 정부의 아들을 저주했던 것을 기억하나요? 흉악하게 생긴 나무의 정령이 고아들을 구해주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네 명의 기사들은 검은 태양의 저주를 믿었다면(아닐 수도 있지만. 그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시아나를 학대했을 가능성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들의 시점에서 시아나는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이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학대를 하는 게 당연하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저열한 쾌감을 위해서 그런 짓을 했다고만은 볼 수 없게 되는 거죠.
그럼 마지막으로 게롤트의 인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봅시다. 사실 게롤트는 유저들의 선택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도 무척 근대적인 사고관을 가진 인물입니다. 괴물을 잡는 위쳐임에도 인간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괴물은 굳이 죽이지 않고, 대화가 가능한 대상을 상대할 때는 폭력보다 말을 먼저 꺼내죠. 돌연변이 인간인 위쳐라는 입장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북부의 팽배한 이종족 차별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종족 학살을 막다가 한 번 죽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좀 더 정치적이고, 리더십을 드러내는 성격이었다면 아마 엄청난 파급력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 같은 인물처럼 말입니다.(그는 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비롯한 고위층과 커넥션이 있었고, 결국 그로 인해 부패핸 가톨릭을 개혁할 수 있었죠. 알고보면 무척 정치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검은 태양의 저주를 대하는 태도는 일단 소설의 단편 ‘보다 적은 악’에서 만난 렌프리라는 인물의 일화에서 드러납니다. 이미 읽으신 분들이 많아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저주를 긍정하는 마법사에 대해 게롤트는 저주를 허무맹랑한 미신이라고 부정하면서, 그녀가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맥락이 더 원인에 가깝다고 주장하지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롤트는 결국 그녀를 죽입니다만, 그것은 그녀가 저주에 걸렸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녀가 사람들을 학살하려고 했기 때문이죠. 그는 그것을 막아야 했고,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게롤트는 시아나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는 적어도 시아나가 저주에 걸린 괴물이라곤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받았던 수모와 굴욕으로 인해 그녀의 성격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죠.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행동을 정당하다고 말하지도 않을 겁니다. 게롤트가 보기에 뱀파이어인 디틀라프를 속이고 이용한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니까요. 일반적인 중세의 인간은 고위층의 말에 복종하고 그들이 서민을 착취를 하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착취당하는 당사자마저도 말입니다.(마치 노오오력이 부족하니 청춘은 아프다고 말하는 어느 나라하고도 비슷하네요.) 반면 게롤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그는 계급의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 시선을 지키고 있죠.(마치 셜록 홈즈같은 인물이죠. 의뢰주의 신분이 아니라 의뢰 그 자체의 중요성에 더 무게를 두는) 그런 게롤트의 시점에서 시아나는 일단 나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게롤트가 시아나를 처벌할까요? 너 때문에 이 사단이 일어났으니 너를 죽여야겠다. 고 생각할까요? 글쎄요. 게임이니 만큼 각자가 롤플레잉한 게롤트가 다르겠지만, 제 관점에서 게롤트는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게임 상에서 게롤트가 진짜로 분노한 경우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위쳐 3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사생아 주니어를 마주했을 때였죠. 선택지가 있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생아 주니어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즉 게롤트는 자신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은 대상을 대할 때 어지간하면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 사생아 주니어를 상대로도 (다소 개연성이 없지만) 죽이지 않는 선택지가 뜰 정도니까요. 시아나가 사생아 주니어 만큼 나쁜 인물일까요? 디틀라프의 순정(쑻)을 가지고 논 걸 생각하면 개인적으로는 ㅁㅁ도 이런 ㅁㅁ이 없지만, 그렇다고 사생아 주니어랑 비교할 정도는 아니겠죠.
게다가 시아나는 시아나 나름대로의 이유도 있었습니다. 납득할만한 이유였죠. 게롤트는 그녀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처벌해야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게롤트는 자신의 입장을 잘 아는 편입니다. 게임에서도 그럴 기회가 있었죠. DLC로 나왔던 ‘늑대와 고양이가 뛰놀던 곳’이란 퀘스트를 기억하실 겁니다. 가에탕의 행위는 엄밀히 말하면 과잉방어입니다. 그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부당한 공격을 당한 것은 사실이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 마을 사람들을 살해한 것까지는 어떻게 정당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마을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한 것은 지나친 행위였죠. 그나마 한 아이를 살렸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이유였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남자아이였다면 어김없이 죽였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 가에탕을 대할 때 역시 선택지가 뜨는데, 살리려고 했을 때 게롤트는 그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판단할 입장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결국 시아나를 대하는 게롤트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은 게롤트도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게롤트가 시아나를 마주하는 시점에서 그녀는 이미 안나 헨리에타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재판을 기다리고 있죠. 게롤트가 직접 누군가를 처분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닌 겁니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게롤트는 시아나를 보호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단순히 안나 헨리에타에게 명령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시아나를 요구하면서 벌이는 디틀라프의 행동이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다소 서사적인 오류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는데, 어째서 고위 뱀파이어인 디틀라프가 안나 헨리에타가 가둔 시아나를 찾아내지 못하는 걸까요? 왕궁이건 어디건 안개로 변해서 등장하던 인물이잖아요? 물론 안나 헨리에타가 시아나를 동화나라에 가두긴 했습니다만,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목적이 시아나를 데려오는 거면 고위 뱀파이어다운 방법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왜 굳이 투생을 상대로 무력시위를 했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뱀파이어 특유의 문화일지도? 아니면 디틀라프도 좀 제정신이 아니거나…… 왠지 그럴 것 같습니다.)
게롤트 입장에서 지금 상황에서 부당한 폭력에 당면한 첫째 피해자는 투생의 시민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원인은 디틀라프죠. 시아나는 근본적인 원인이긴 합니다만, 하위 뱀파이어들을 모아서 투생을 공격한 것은 디틀라프가 선택한 행위입니다.(그의 자유의지죠. 그는 분명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게롤트라면 그 상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디틀라프를 저지해야 하는 것이지, 시아나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저는 시아나를 디틀라프에게 넘겨준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습니다. 왠지 테러리스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투생이 공격받는 것은 시아나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디틀라프가 저지른 일인데 왜 그 책임을 시아나가 지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더군요. 물론 시아나가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디틀라프의 정신나간 짓이 시아나의 책임같지는 않으니까요. 디틀라프한테 단단히 문제가 있는 거지요.
게롤트가 시아나를 용서하느냐, 용서하지 않느냐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실 게롤트가 그걸 결정할 문제도 아니고 말입니다. 어찌보면 게롤트에게 있어서 시아나는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계급의 바깥에 존재하는 그에게 있어서는 시아나의 목숨이든, 디틀라프의 목숨이든, 아니면 투생 항구에서 구걸을 하다 뱀파이어에게 물려 죽은 이름 모를 거지의 목숨이든 그 무게가 다르다고 여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좀 과하게 말하면, 시아나가 벌여온 모든 짓은 게롤트의 시점에서 보면 어린 아이 투정같아 보일지도 모르겠죠. 그 투정에 희생된 사람이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투정부리는 아이의 머리통에 도끼를 찍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이상이 시아나라는 인물의 죄와 정당성에 대한 제 사견이었습니다. 일하는 중에 틈틈이 쓰다보니 분량이 너무 길어진 것 같네요. 다 읽으시는 분이 계시긴 할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건 어디까지나 제 사견이고 상상의 범주에 지나지 않으므로,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또 롤플레잉 게임이니 만큼 각자가 플레이한 게롤트에는 많고 적고간에 차이가 있을테고요. 혹시 다른 생각이나 관점, 아니면 보충하고 싶으신 부분이 있다면 같이 이야기해봐도 재밌을 것 같네요.
ps. 막상 이렇게 쓰고 보니 엔딩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생각이 드네요. 세 가지 상황이 사실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가능합니다. 시간이 된다면 다음에는 그걸로 이야기를 해보고 싶군요.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