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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C]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아버지 '민 리', 그가 전하는 25년 개발 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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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5.08.19 (05:00:00)
[기사 본문]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아버지’라고 하면 떠오르는 개발자 ‘민 리’. 게임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타이틀을 개발한 그는 카운터 스트라이크 이후에도 여러 프로젝트를 옮겨다니면서 새로운 시도들을 전하기도 했다. 1977년생으로 적지 않은 나이에도 전 세계를 오가며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그는, 이번 데브컴 2025 현장에서 자신이 걸어온 25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독일 쾰른에서 진행된 데브컴 2025의 해당 강연은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아버지 ‘민 리’가 걸어온 길이자, 그간 스스로의 경험으로 얻은 조직 구성원에 따른 변화들을 정리한 것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개인사이기도 하지만, 강연자는 개인 개발에 밸브로 그리고 다시 한국과 캐나다로. 각국에서 일을 하면서 얻었던 경험을 전달하는 한편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설명했다.
#0. 강연자가 걸어온 길 - PC에서 모바일 그리고 현재까지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민 리 개발자는 그동안 많은 회사들에서 재직하며 게임을 개발해 왔다. 커리어의 첫 시작은 역시 카운터 스트라이크 였다. 이후에 그는 밸브로 이직해서 카운터 스트라이크 시리즈를 개발하다가 퇴사 이후 픽스코리아라는 대한민국 회사에서 게임 개발에 착수한다. 그리고 다시 회사를 옮겨 페이스펀치 스튜디오에서 러스트 개발에 참여한 바 있고 이후에는 펄어비스에서 신규 프로젝트 개발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현재는 인디 개발사에서 ‘알파 리스폰스’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본격적인 설명에 앞서 강연자는 자신의 행적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이 중에서 언급을 한 것이 2015년에 발매한 레이싱 타이틀이다. 2015년에 모바일 타이틀을 만드는 것을 시도해본 강연자는 2012년 다수의 개발사가 모바일 타이틀로 수익을 얻는 것을 보고 맥스 오버 드라이브라는 타이틀을 만들게 된다.
이는 니드포스피드와 트위스티드 메탈을 합친 것과 같은 게임이었다. 총을 들고 운전하는 게임으로 구성된 해당 타이틀을 만든 민 리 강연자는 해당 게임을 구글 플레이 스토어에 올려두면 사람들이 볼 것이라 생각했으나, 본인 스스로 현재 시점에서는 ‘바보같은 생각이었다’라고 정리했다. 광고나 홍보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타이틀은 약 200회 다운로드, 수익 20달러라는 성적만을 거뒀다. 이후 모바일 타이틀을 개발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강연자는 현재까지도 모바일 타이틀을 만들지 않고 있다.
#1.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시작 그리고 밸브로
민 리라는 이름을 알린 첫 번째 타이틀은 역시 ‘카운터 스트라이크’다. 1998년 6월에 카운터 스트라이크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강연자는 초기에는 레인보우 식스와 퀘이크를 결합한 타이틀을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후 약 6개월 동안 게임의 프로토타입을 완성했고 회사의 홈페이지를 열어 게임의 맵을 만들어줄 사람을 모집하게 된다.
여기서 맵과 홈페이지를 만들어줄 사람을 구한 강연자는 약 1년 동안 함께 작업을 진행했고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본격적으로 선보이게 된다. 첫 버전 이후 게임의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사용자 수가 성장하는 결과를 마주했다. 이후 매달 새로운 버전을 선보인 카운터 스트라이크는 1999년 11월에 네 번째 베타 버전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밴쿠버의 현지 게임회사에서 바킹 도그 스튜디오를 인수했고 이후에 ‘글로벌 오퍼레이션’이라는 게임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접근을 시작했다. 카운터 스트라이크에서 보여준 결과물을 좋아하는데 함께 일을 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보고 멋지다고 생각한 강연자는 여기에 합류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작업에 몰두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밸브에서 연락이 오게 된다. 21살이 민 리에게는 조금 당혹스러운 제안이었다. 여가 시간에 해당 프로젝트를 만들었던 민 리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이메일 교환을 하면서 밸브 측은 해당 프로젝트를 인수하고 싶고 함께 일할 기회를 제공하며,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는다. 심지어 필요한 자원-인적 자원을 포함해서-도 제공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 즈음 민 리는 ‘이건 하프라이프의 무료 모드인데 어떻게 돈을 벌려고 생각하는 거지? 무료로 다운로드 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결국 좋은 거래라고 생각했던 민 리와 클리프는 거래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이 생각한 꿈의 회사인 밸브와 함께 하게 된다. 추후에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패키지로 팔겠다는 계획을 전달받은 두 사람은 ‘이걸 팔려고 하는 건가? 무료로 다운로드해서 쓸 수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프라이프를 하지 않지만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두 사람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이었나’라는 소회를 남겼다고 전했다. 두 사람 기준으로는 PC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프라이프는 역대 최고의 게임이었으니, 당연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하프라이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단독으로 팔겠다는 생각에 놀라움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이후 밸브에서 일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 강연자는 이전 프로젝트인 글로벌 오퍼레이션즈와는 작별을 하게 된다. 이후 글로벌 오퍼레이션즈는 성공적으로 출시를 했고 좋은 게임이었으나,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성공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강연자는 이를 두고 카운터 스트라이크가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를 따라잡으려는 그 어떤 시도도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을 남겼다.
밸브와 함께 작업을 하게 된 민 리 강연자는 밸브의 구조가 수평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프로젝트에는 시니어 디자이너들이 있고 그 아래에는 모든 개발자들이 각각의 역할을 담당해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이는 공동체적인 개발 분위기였으며, 개개인이 프로젝트에 많은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의견을 개진함에 있어서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지점이 생기면 선임 개발자들이 나서서 결정을 내렸고 이후에는 프로젝트가 큰 갈등 없이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 아래에서 밸브는 높은 완성도의 게임을 선보일 수 있었고 자체 운영을 통해 외부 압력 없이 게임을 라이브 서비스로 운영한다. 다른 회사에서는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연자는 이처럼 게임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수 조 달러에 이르는 투자가 필요하기에 다른 회사들이 쉽게 따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후 개발을 지속하던 강연자는 2006년까지 밸브에 재직했으며, 회사를 떠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강연자에게 있어서 이 때의 경험은 매우 인상이 깊은 것이기도 했다.
회사 내에서 에어소프트건을 가지고 놀다가 회사 이메일로 ‘누가 사무실에 BB탄을 버리고 갔다’는 메일을 받고 모르쇠를 한다거나. 밸브 사무실 근처에 회사가 임시로 빌린 아파트에서 출퇴근을 하다가 직접 방을 구하라고 하자,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이야기 / 밸브 사무실 부엌에서 오븐을 이용해 식사를 데우다가 사내 식당을 태워먹을 뻔하고 부엌 출입 금지를 당한 이야기 / 그럼에도 7개월 정도 출입 금지를 당했다가 배가 고파 피자를 몰래 데워먹고서 치즈가 오븐에 눌러붙어 다시 출입 금지를 먹고 다시 출입하면 해고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에피소드 등을 전달했다.
#2. 한국으로 - 택티컬 인터벤션 제작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밸브를 떠난 강연자는 이후에 택티컬 인터벤션이라는 타이틀의 제작에 착수한다. 해당 프로젝트를 약 2년 동안 홀로 개발한 강연자는 제작 과정에서 너무 느리게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도움을 구하는 와중에 한국에 있는 회사와 연결되어 한국행을 택하게 된다. 당시 해당 회사는 민 리를 한국에 있는 큰 회사들에게 소개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민 리는 한국행을 택하게 됐다.
이후 약 1년 반 동안 꽤 많은 미팅을 통해 다양한 회사들을 만나게 된다. 넥슨과 엔씨소프트 그리고 스마일게이트, CJ EN, 넷마블과 네오위즈 등은 물론, 텐센트와 퍼펙트 월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회사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비즈니스는 성사되지 못했고 퍼블리싱 계약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시점에서 강연자는 이미 한국에서 두 해를 보낸 상태였다. 서로 유대감이 생겼고 가족과 같은 느낌으로 변해가던 시점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을 두고 돌아갈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회사 대표는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설득하며 게임 개발을 이어나갔다. 게임의 완성까지 말이다.
이후 7년 동안 강연자는 다섯 명의 개발팀으로 프로젝트의 완성을 위해 작업에 착수했다. 다섯 명으로는 거대한 프로젝트였고 많은 난관들이 있었다. 강연자는 이 시기를 두고 ‘스스로의 경력 중에서 가장 암흑기였다’라고 회고했다. 제작을 하면서도 고작 다섯 명으로 카운터 스트라이크에 맞먹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작업을 하고 있었기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료들이 있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게임을 완성하기 위해서 한국에 같이 왔었고 최저임금 수준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이 받았던 임금은 스타벅스 종업원 보다도 적은 수준이었다. 카운터 스트라이크 제작자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진행했던 동료들이었기에 적어도 프로젝트를 끝내자는 마음에서 7년 간의 제작을 진행한 것이다.
여기서 강연자는 인력 부족 이외에도 회사의 관리 구조가 더 큰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당시의 회사는 가장 위에 대표가 있고 아주 적은 개발팀을 두고 있었다. 그 사이에 게임 개발 경험이 없는 프로젝트 매니저들이 자리해 단순 마케팅 목적으로 프로젝트를 관리했다. 개발 범위나 필요한 작업량 등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게다가 강연자는 격주마다 항상 회의에 참여하라고 요구를 받았고 그 때마다 작업이 얼마나 걸릴지를 설명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게 됐다.
그리고 대표는 사업가였기 때문에 창의적인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투자를 받기 위해서 은행원들과의 미팅을 주선하기도 했는데, 회사 규모를 더 크게 보이기 위해서 가족들을 초정하고 팀원들과 함께 일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물론, 이는 강연자에게 언급하지 않았으며 은행원들이 투자를 위해서 사무실을 방문한 날에 모르는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들을 보게 됐다고 회상했다.
투자자를 유치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회사는 컨벤션을 개최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정부 투자를 받은 캐릭터 박람회였는데, 박람회 당일날 인형탈을 입을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강연자게에 ‘저기, 이 캐릭터 중 하나가 되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라는 질문을 했고 결국 강연자는 마시마로 탈을 뒤집어쓰고 박람회에 참석하게 된다.
이런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던 민 리였으나, 마스코트가 되어서 아이들과 노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행사 기간 중 투표를 통해 최고의 마스코트를 뽑는 과정에서 민 리가 탈을 썼던 마시마로가 최고의 마스코트로 선정이 됐다. 이를 두고 강연자는 그 회사에서 일한 기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언급했다.
이후에도 게임을 개발했던 민 리와 동료들은 2013년에 게임을 출시하게 됐다. 하지만 게임은 엉망인 상태였고 버그도 많았기에 스팀에서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비용은 회수할 수 없었고 게임을 실패했으며 강연자의 마음 속에 깊은 실망감을 남겼다. 7년 간의 시간 투자가 무의미해진 것이며, 이제 게임 개발을 그만 하고 싶을 정도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당 프로젝트를 통해서 강연자는 한정된 환경에서 멀티 플레이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실패의 지름길이라는 교훈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택티컬 인터벤션은 7년 동안 개발하면서 아무런 외부 플레이 피드백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기능들이 제대로 구현되어 플레이어들이 좋아하는지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협력 과정에서 탈출 전략을 포함한 조항을 마련해야 한다고 전했다.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때에 아무 조건 없이 프로젝트에서 탈출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과정이 명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해당 회사에서는 이런 것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3. 페이스펀치 스튜디오로 - 러스트의 개발에 합류하다
이후 2014년 민 리는 게리 모드로 유명한 게리 뉴먼이 설립한 페이스펀치 스튜디오에 합류한다. 당시 페이스펀치 스튜디오는 러스트를 제작 중인 상태였다. 그는 민 리가 작업한 결과물을 마음에 들어 했으며, 사용된 기술을 자신들의 게임에 적용해줄 수 있냐는 제안을 전했다. 몇년 전 민 리가 게리 뉴먼을 고용해서 작업을 진행했지만, 이제는 게리 뉴먼이 본인고 함께 일을 하자는 말을 전한 것이다.
이렇게 러스트 프로젝트에 합류한 민 리는 이 과정에서 스튜디오가 정말 잘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페이스펀치 스튜디오는 밸브와 유사한 형태였으며, 상사와 리드 디자이너가 있고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가장 위에 있는 게리 뉴먼이 실무에 적극적인 상사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대표들이 개발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것과 달리, 게리 뉴먼은 개발에 참여해 때때로 인용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상사가 현장에 뛰어들어서 함께 개발을 하는 것은 강연자에게 있어서 영감을 주는 행위였으며, 상사의 결정을 존중하는 요인이 됐다.
또한, 페이스펀치 스튜디오는 원격으로 근무를 했기 때문에 협업을 신중하게 진행해야만 했다. 각자가 자신의 작업을 독립적으로 완료할 수 있도록 완성도가 있는 결과물과 전체적으로 프로젝트가 완성되기 위한 전략적인 계획이 필요한 상태였다.
이렇게 2014년 출시된 러스트는 소규모로 시작해서 점차적으로 성장하는 결과를 달성했다. 이는 강연자의 시선에서는 독특하고 탄탄한 아이디어를 가진 게임이 기반이 되는 플레이어들을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4. 다시 한국, 펄어비스로 - 플랜 8의 개발로
러스트 프로젝트를 마친 이후 강연자는 2018년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펄어비스에서 민 리 개발자를 영입하겠다는 의도를 전했으나, 강연자는 당시에 페이스펀치에 속해있던 상태였기에 고민을 하게 된다. 하지만 펄어비스의 꾸준한 영입 시도와 조건으로 인해서 펄어비스로 옮기는 결정을 내렸다.
펄어비스는 꽤 큰 기업이었기 때문에 강연자가 근무한 회사 중에서 가장 좋은 환경을 자랑했다. 직원 수 또한 1천 명 가량으로 많은 편이었고 전통적인 개발사에서 볼 수 있는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공식적인 조직 구조 아래에서 개발 프로세스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도움을 받는 조직 구조였다.
이전과 다른 점은 프로젝트 매니저들이 개발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개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특정 작업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강연자에게는 한결 쉬웠으며, 결정에 신뢰를 두기는 것도 용이했다.
펄어비스에서 플랜 8을 제작하던 강연자는 해당 프로젝트를 회고하면서 ‘지금까지 작업한 것 중 가장 뛰어난 그래픽을 만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아티스트들이 작업하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았고 놀라움을 받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2년 전, 고향 생각이 간절했던 강연자는 펄어비스를 떠나서 자신의 고향 캐나다 행을 택하게 된다. 가족이 있는 장소로 돌아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5. 고향, 캐나다로 - ‘알파 리스폰스’의 개발에 합류 그리고 교훈들
펄어비스를 떠난 이후 강연자는 캐나다의 개발자들에게 연락을 받게 되어 프로젝트를 확인한 다음 합류를 하게 된다. 현재 알파 리스폰스는 총 12명의 개발팀으로 구성되어 있고 언리얼 엔진을 이용해 제작 중인 상태다. 개발자 구성원들이 AAA 타이틀 개발 경험이 있었기에 강연자에게 있어서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고 평했다.
알파 리스폰스튼 빠른 템포의 슈팅 게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난 2024년 11월 얼리 액세스로 출시된 상태다. 해당 타이틀은 대규모 비선형 플레이를 특징으로 둔다. 넓은 필드에서 전투가 진행되며, 플레이어들은 각 지역에서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이동하고 전투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현재 강연자는 게임 내 모든 환경에서 흥미로운 플레이를 만들 수 있는 AI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오픈 필드를 활용한 타이틀인 만큼, 메모리 사용량과 같은 최적화 측면을 해결하고 비교적 낮은 사양의 PC에서도 준수한 비주얼의 플레이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도 배운 것이 있다. 얼리 액세스 시점에서 퍼블리셔를 찾는 것이 어렵다는 점 때문이다. 알파 리스폰스는 얼리 액세스 이후 퍼블리셔를 구하기 시작했으나, 퍼블리셔는 얼리 액세스 단계에서는 함께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전했다. 이미 얼리 액세스가 진행되었기에 게임을 마케팅할 수 있는 기회가 마땅치 않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강연자는 퍼블리셔를 찾고 있다면, 얼리 액세스 단계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고 전했다. 게임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기 전에 마케팅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리고 개발 과정에서는 타겟이 되는 플레이어 층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다고 강조했다. 이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캠페인을 진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직접 하기 어렵다면 경험이 풍부한 회사에게 아웃소싱을 하는 방법이 추천된다.
또한 인플루언서와의 협업에도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거대한 팔로워를 가진 종합 게임 인플루언서의 방송을 보는 시청자 수는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 하는 사람의 수와 비교하면 낮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했다. 큰 규모의 시청자층을 타겟팅 하는 데에 돈을 투자하는 것은 일종의 낭비에 가깝다는 의미다. 따라서 본인이 제작 중인 게임과 같은 장르를 플레이 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유용하게 다가올 수 있으며, 단순히 팔로워 수로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하지 않는 것을 추천했다.
마지막으로 강연자는 ‘현재 게임 산업이 조금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게임 산업이 위기를 극복하고 회복될 것이라 생각한다’며, 산업 전반이 겪고 있는 어려운 시기를 모두 함께 극복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모든 노력들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강연을 마쳤다.
독일 쾰른에서 진행된 데브컴 2025의 해당 강연은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아버지 ‘민 리’가 걸어온 길이자, 그간 스스로의 경험으로 얻은 조직 구성원에 따른 변화들을 정리한 것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개인사이기도 하지만, 강연자는 개인 개발에 밸브로 그리고 다시 한국과 캐나다로. 각국에서 일을 하면서 얻었던 경험을 전달하는 한편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설명했다.
#0. 강연자가 걸어온 길 - PC에서 모바일 그리고 현재까지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민 리 개발자는 그동안 많은 회사들에서 재직하며 게임을 개발해 왔다. 커리어의 첫 시작은 역시 카운터 스트라이크 였다. 이후에 그는 밸브로 이직해서 카운터 스트라이크 시리즈를 개발하다가 퇴사 이후 픽스코리아라는 대한민국 회사에서 게임 개발에 착수한다. 그리고 다시 회사를 옮겨 페이스펀치 스튜디오에서 러스트 개발에 참여한 바 있고 이후에는 펄어비스에서 신규 프로젝트 개발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현재는 인디 개발사에서 ‘알파 리스폰스’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본격적인 설명에 앞서 강연자는 자신의 행적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이 중에서 언급을 한 것이 2015년에 발매한 레이싱 타이틀이다. 2015년에 모바일 타이틀을 만드는 것을 시도해본 강연자는 2012년 다수의 개발사가 모바일 타이틀로 수익을 얻는 것을 보고 맥스 오버 드라이브라는 타이틀을 만들게 된다.
이는 니드포스피드와 트위스티드 메탈을 합친 것과 같은 게임이었다. 총을 들고 운전하는 게임으로 구성된 해당 타이틀을 만든 민 리 강연자는 해당 게임을 구글 플레이 스토어에 올려두면 사람들이 볼 것이라 생각했으나, 본인 스스로 현재 시점에서는 ‘바보같은 생각이었다’라고 정리했다. 광고나 홍보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타이틀은 약 200회 다운로드, 수익 20달러라는 성적만을 거뒀다. 이후 모바일 타이틀을 개발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강연자는 현재까지도 모바일 타이틀을 만들지 않고 있다.
#1.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시작 그리고 밸브로
민 리라는 이름을 알린 첫 번째 타이틀은 역시 ‘카운터 스트라이크’다. 1998년 6월에 카운터 스트라이크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강연자는 초기에는 레인보우 식스와 퀘이크를 결합한 타이틀을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후 약 6개월 동안 게임의 프로토타입을 완성했고 회사의 홈페이지를 열어 게임의 맵을 만들어줄 사람을 모집하게 된다.
여기서 맵과 홈페이지를 만들어줄 사람을 구한 강연자는 약 1년 동안 함께 작업을 진행했고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본격적으로 선보이게 된다. 첫 버전 이후 게임의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사용자 수가 성장하는 결과를 마주했다. 이후 매달 새로운 버전을 선보인 카운터 스트라이크는 1999년 11월에 네 번째 베타 버전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밴쿠버의 현지 게임회사에서 바킹 도그 스튜디오를 인수했고 이후에 ‘글로벌 오퍼레이션’이라는 게임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접근을 시작했다. 카운터 스트라이크에서 보여준 결과물을 좋아하는데 함께 일을 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보고 멋지다고 생각한 강연자는 여기에 합류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작업에 몰두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밸브에서 연락이 오게 된다. 21살이 민 리에게는 조금 당혹스러운 제안이었다. 여가 시간에 해당 프로젝트를 만들었던 민 리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이메일 교환을 하면서 밸브 측은 해당 프로젝트를 인수하고 싶고 함께 일할 기회를 제공하며,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는다. 심지어 필요한 자원-인적 자원을 포함해서-도 제공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 즈음 민 리는 ‘이건 하프라이프의 무료 모드인데 어떻게 돈을 벌려고 생각하는 거지? 무료로 다운로드 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결국 좋은 거래라고 생각했던 민 리와 클리프는 거래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이 생각한 꿈의 회사인 밸브와 함께 하게 된다. 추후에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패키지로 팔겠다는 계획을 전달받은 두 사람은 ‘이걸 팔려고 하는 건가? 무료로 다운로드해서 쓸 수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프라이프를 하지 않지만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두 사람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이었나’라는 소회를 남겼다고 전했다. 두 사람 기준으로는 PC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프라이프는 역대 최고의 게임이었으니, 당연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하프라이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단독으로 팔겠다는 생각에 놀라움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이후 밸브에서 일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 강연자는 이전 프로젝트인 글로벌 오퍼레이션즈와는 작별을 하게 된다. 이후 글로벌 오퍼레이션즈는 성공적으로 출시를 했고 좋은 게임이었으나,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성공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강연자는 이를 두고 카운터 스트라이크가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를 따라잡으려는 그 어떤 시도도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을 남겼다.
밸브와 함께 작업을 하게 된 민 리 강연자는 밸브의 구조가 수평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프로젝트에는 시니어 디자이너들이 있고 그 아래에는 모든 개발자들이 각각의 역할을 담당해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이는 공동체적인 개발 분위기였으며, 개개인이 프로젝트에 많은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의견을 개진함에 있어서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지점이 생기면 선임 개발자들이 나서서 결정을 내렸고 이후에는 프로젝트가 큰 갈등 없이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 아래에서 밸브는 높은 완성도의 게임을 선보일 수 있었고 자체 운영을 통해 외부 압력 없이 게임을 라이브 서비스로 운영한다. 다른 회사에서는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연자는 이처럼 게임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수 조 달러에 이르는 투자가 필요하기에 다른 회사들이 쉽게 따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후 개발을 지속하던 강연자는 2006년까지 밸브에 재직했으며, 회사를 떠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강연자에게 있어서 이 때의 경험은 매우 인상이 깊은 것이기도 했다.
회사 내에서 에어소프트건을 가지고 놀다가 회사 이메일로 ‘누가 사무실에 BB탄을 버리고 갔다’는 메일을 받고 모르쇠를 한다거나. 밸브 사무실 근처에 회사가 임시로 빌린 아파트에서 출퇴근을 하다가 직접 방을 구하라고 하자,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이야기 / 밸브 사무실 부엌에서 오븐을 이용해 식사를 데우다가 사내 식당을 태워먹을 뻔하고 부엌 출입 금지를 당한 이야기 / 그럼에도 7개월 정도 출입 금지를 당했다가 배가 고파 피자를 몰래 데워먹고서 치즈가 오븐에 눌러붙어 다시 출입 금지를 먹고 다시 출입하면 해고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에피소드 등을 전달했다.
#2. 한국으로 - 택티컬 인터벤션 제작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밸브를 떠난 강연자는 이후에 택티컬 인터벤션이라는 타이틀의 제작에 착수한다. 해당 프로젝트를 약 2년 동안 홀로 개발한 강연자는 제작 과정에서 너무 느리게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도움을 구하는 와중에 한국에 있는 회사와 연결되어 한국행을 택하게 된다. 당시 해당 회사는 민 리를 한국에 있는 큰 회사들에게 소개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민 리는 한국행을 택하게 됐다.
이후 약 1년 반 동안 꽤 많은 미팅을 통해 다양한 회사들을 만나게 된다. 넥슨과 엔씨소프트 그리고 스마일게이트, CJ EN, 넷마블과 네오위즈 등은 물론, 텐센트와 퍼펙트 월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회사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비즈니스는 성사되지 못했고 퍼블리싱 계약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시점에서 강연자는 이미 한국에서 두 해를 보낸 상태였다. 서로 유대감이 생겼고 가족과 같은 느낌으로 변해가던 시점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을 두고 돌아갈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회사 대표는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설득하며 게임 개발을 이어나갔다. 게임의 완성까지 말이다.
이후 7년 동안 강연자는 다섯 명의 개발팀으로 프로젝트의 완성을 위해 작업에 착수했다. 다섯 명으로는 거대한 프로젝트였고 많은 난관들이 있었다. 강연자는 이 시기를 두고 ‘스스로의 경력 중에서 가장 암흑기였다’라고 회고했다. 제작을 하면서도 고작 다섯 명으로 카운터 스트라이크에 맞먹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작업을 하고 있었기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료들이 있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게임을 완성하기 위해서 한국에 같이 왔었고 최저임금 수준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이 받았던 임금은 스타벅스 종업원 보다도 적은 수준이었다. 카운터 스트라이크 제작자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진행했던 동료들이었기에 적어도 프로젝트를 끝내자는 마음에서 7년 간의 제작을 진행한 것이다.
여기서 강연자는 인력 부족 이외에도 회사의 관리 구조가 더 큰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당시의 회사는 가장 위에 대표가 있고 아주 적은 개발팀을 두고 있었다. 그 사이에 게임 개발 경험이 없는 프로젝트 매니저들이 자리해 단순 마케팅 목적으로 프로젝트를 관리했다. 개발 범위나 필요한 작업량 등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게다가 강연자는 격주마다 항상 회의에 참여하라고 요구를 받았고 그 때마다 작업이 얼마나 걸릴지를 설명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게 됐다.
그리고 대표는 사업가였기 때문에 창의적인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투자를 받기 위해서 은행원들과의 미팅을 주선하기도 했는데, 회사 규모를 더 크게 보이기 위해서 가족들을 초정하고 팀원들과 함께 일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물론, 이는 강연자에게 언급하지 않았으며 은행원들이 투자를 위해서 사무실을 방문한 날에 모르는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들을 보게 됐다고 회상했다.
투자자를 유치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회사는 컨벤션을 개최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정부 투자를 받은 캐릭터 박람회였는데, 박람회 당일날 인형탈을 입을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강연자게에 ‘저기, 이 캐릭터 중 하나가 되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라는 질문을 했고 결국 강연자는 마시마로 탈을 뒤집어쓰고 박람회에 참석하게 된다.
이런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던 민 리였으나, 마스코트가 되어서 아이들과 노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행사 기간 중 투표를 통해 최고의 마스코트를 뽑는 과정에서 민 리가 탈을 썼던 마시마로가 최고의 마스코트로 선정이 됐다. 이를 두고 강연자는 그 회사에서 일한 기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고 언급했다.
이후에도 게임을 개발했던 민 리와 동료들은 2013년에 게임을 출시하게 됐다. 하지만 게임은 엉망인 상태였고 버그도 많았기에 스팀에서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비용은 회수할 수 없었고 게임을 실패했으며 강연자의 마음 속에 깊은 실망감을 남겼다. 7년 간의 시간 투자가 무의미해진 것이며, 이제 게임 개발을 그만 하고 싶을 정도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당 프로젝트를 통해서 강연자는 한정된 환경에서 멀티 플레이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실패의 지름길이라는 교훈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택티컬 인터벤션은 7년 동안 개발하면서 아무런 외부 플레이 피드백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기능들이 제대로 구현되어 플레이어들이 좋아하는지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협력 과정에서 탈출 전략을 포함한 조항을 마련해야 한다고 전했다.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때에 아무 조건 없이 프로젝트에서 탈출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과정이 명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해당 회사에서는 이런 것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3. 페이스펀치 스튜디오로 - 러스트의 개발에 합류하다
이후 2014년 민 리는 게리 모드로 유명한 게리 뉴먼이 설립한 페이스펀치 스튜디오에 합류한다. 당시 페이스펀치 스튜디오는 러스트를 제작 중인 상태였다. 그는 민 리가 작업한 결과물을 마음에 들어 했으며, 사용된 기술을 자신들의 게임에 적용해줄 수 있냐는 제안을 전했다. 몇년 전 민 리가 게리 뉴먼을 고용해서 작업을 진행했지만, 이제는 게리 뉴먼이 본인고 함께 일을 하자는 말을 전한 것이다.
이렇게 러스트 프로젝트에 합류한 민 리는 이 과정에서 스튜디오가 정말 잘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페이스펀치 스튜디오는 밸브와 유사한 형태였으며, 상사와 리드 디자이너가 있고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가장 위에 있는 게리 뉴먼이 실무에 적극적인 상사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대표들이 개발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것과 달리, 게리 뉴먼은 개발에 참여해 때때로 인용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상사가 현장에 뛰어들어서 함께 개발을 하는 것은 강연자에게 있어서 영감을 주는 행위였으며, 상사의 결정을 존중하는 요인이 됐다.
또한, 페이스펀치 스튜디오는 원격으로 근무를 했기 때문에 협업을 신중하게 진행해야만 했다. 각자가 자신의 작업을 독립적으로 완료할 수 있도록 완성도가 있는 결과물과 전체적으로 프로젝트가 완성되기 위한 전략적인 계획이 필요한 상태였다.
이렇게 2014년 출시된 러스트는 소규모로 시작해서 점차적으로 성장하는 결과를 달성했다. 이는 강연자의 시선에서는 독특하고 탄탄한 아이디어를 가진 게임이 기반이 되는 플레이어들을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4. 다시 한국, 펄어비스로 - 플랜 8의 개발로
러스트 프로젝트를 마친 이후 강연자는 2018년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펄어비스에서 민 리 개발자를 영입하겠다는 의도를 전했으나, 강연자는 당시에 페이스펀치에 속해있던 상태였기에 고민을 하게 된다. 하지만 펄어비스의 꾸준한 영입 시도와 조건으로 인해서 펄어비스로 옮기는 결정을 내렸다.
펄어비스는 꽤 큰 기업이었기 때문에 강연자가 근무한 회사 중에서 가장 좋은 환경을 자랑했다. 직원 수 또한 1천 명 가량으로 많은 편이었고 전통적인 개발사에서 볼 수 있는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공식적인 조직 구조 아래에서 개발 프로세스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도움을 받는 조직 구조였다.
이전과 다른 점은 프로젝트 매니저들이 개발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개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특정 작업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강연자에게는 한결 쉬웠으며, 결정에 신뢰를 두기는 것도 용이했다.
펄어비스에서 플랜 8을 제작하던 강연자는 해당 프로젝트를 회고하면서 ‘지금까지 작업한 것 중 가장 뛰어난 그래픽을 만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아티스트들이 작업하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았고 놀라움을 받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2년 전, 고향 생각이 간절했던 강연자는 펄어비스를 떠나서 자신의 고향 캐나다 행을 택하게 된다. 가족이 있는 장소로 돌아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5. 고향, 캐나다로 - ‘알파 리스폰스’의 개발에 합류 그리고 교훈들
펄어비스를 떠난 이후 강연자는 캐나다의 개발자들에게 연락을 받게 되어 프로젝트를 확인한 다음 합류를 하게 된다. 현재 알파 리스폰스는 총 12명의 개발팀으로 구성되어 있고 언리얼 엔진을 이용해 제작 중인 상태다. 개발자 구성원들이 AAA 타이틀 개발 경험이 있었기에 강연자에게 있어서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고 평했다.
알파 리스폰스튼 빠른 템포의 슈팅 게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난 2024년 11월 얼리 액세스로 출시된 상태다. 해당 타이틀은 대규모 비선형 플레이를 특징으로 둔다. 넓은 필드에서 전투가 진행되며, 플레이어들은 각 지역에서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이동하고 전투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현재 강연자는 게임 내 모든 환경에서 흥미로운 플레이를 만들 수 있는 AI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오픈 필드를 활용한 타이틀인 만큼, 메모리 사용량과 같은 최적화 측면을 해결하고 비교적 낮은 사양의 PC에서도 준수한 비주얼의 플레이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도 배운 것이 있다. 얼리 액세스 시점에서 퍼블리셔를 찾는 것이 어렵다는 점 때문이다. 알파 리스폰스는 얼리 액세스 이후 퍼블리셔를 구하기 시작했으나, 퍼블리셔는 얼리 액세스 단계에서는 함께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전했다. 이미 얼리 액세스가 진행되었기에 게임을 마케팅할 수 있는 기회가 마땅치 않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강연자는 퍼블리셔를 찾고 있다면, 얼리 액세스 단계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고 전했다. 게임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기 전에 마케팅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리고 개발 과정에서는 타겟이 되는 플레이어 층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다고 강조했다. 이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캠페인을 진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직접 하기 어렵다면 경험이 풍부한 회사에게 아웃소싱을 하는 방법이 추천된다.
또한 인플루언서와의 협업에도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거대한 팔로워를 가진 종합 게임 인플루언서의 방송을 보는 시청자 수는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 하는 사람의 수와 비교하면 낮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했다. 큰 규모의 시청자층을 타겟팅 하는 데에 돈을 투자하는 것은 일종의 낭비에 가깝다는 의미다. 따라서 본인이 제작 중인 게임과 같은 장르를 플레이 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유용하게 다가올 수 있으며, 단순히 팔로워 수로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하지 않는 것을 추천했다.
마지막으로 강연자는 ‘현재 게임 산업이 조금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게임 산업이 위기를 극복하고 회복될 것이라 생각한다’며, 산업 전반이 겪고 있는 어려운 시기를 모두 함께 극복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모든 노력들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강연을 마쳤다.
| 정필권 기자 mustang@ruliweb.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