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통신칩 제조업체 퀄컴이 휴대전화 제조사 등에 부당 거래와 계약을 강요했다는 등의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가 부과한 1조원대 과징금은 정당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4일 서울고법 행정7부(부장판사 노태악)는 퀄컴 본사 등이 공정위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등 취소 소송 선고기일을 열고 2017년 공정위가 퀄컴에 내린 일부 시정명령을 취소하고, 나머지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공정위가 부과한 역대 최대인 약 1조300억원의 과징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사실상 공정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재판부는 △경쟁 모뎀칩셋 제조사에게 퀄컴이 보유한 이동통신 표준필수특허에 대한 라이선스 요청을 거절하거나 제한한 것 △모뎀칩셋 공급계약과 특허 라이선스 계약을 연계해 휴대전화 제조사와 계약을 체결한 것에 대한 퀄컴의 시장지배적 남용 행위를 인정했다. 타당성 없는 조건을 제시하거나 부당하게 사업활동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다만 휴대전화 제조사에 끼워팔기 식으로 특허권 계약을 요구하거나, 휴대전화 판매가격 일정 비율을 ‘실시료’ 등으로 받은 부분에 대해선 불이익한 거래를 강제하거나 경쟁을 제한한 행위가 아니라고 봤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총 10개의 시정명령 가운데 2개 명령을 제외한 나머지는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퀄컴 독점공급 횡포… 시장지배력 남용 인정
다국적 통신업체 퀄컴에 1조원대 과징금을 부과했던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날 서울고등법원이 과징금 부과가 정당했다는 판단에 일단 한숨을 돌렸다.
공정위 관계자는 4일 퀄컴에 부과된 사상 최대 규모 1조원대 과징금이 정당하다는 법원 판결에 대해 “전세계 ‘이동통신 표준필수특허(SEP)’ 라이선스 시장과 모뎀 칩셋 시장에서의 퀄컴의 시장지배력 남용행위를 우리 법원이 인정한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다만 퀄컴의 대법원 상고 가능성이 작지 않은 만큼 상황을 지켜본다는 입장이다. 공정위는 이날 보도참고자료를 통해 “판결문 내용을 분석해 향후 진행될 대법원 상고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동시에 시정명령 이행 상황도 점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정위는 2017년 1월20일 퀄컴 등이 자신의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해 경쟁 모뎀 칩셋 사업자의 사업 활동을 방해한 행위 등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약 1조311억원을 부과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휴대전화 칩셋 제조·판매에 필수적인 ‘SEP’를 보유한 퀄컴은 삼성·인텔 등 경쟁 모뎀 칩셋 제조사들의 요청에도 SEP 계약 체결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시장지배력을 강화했다. 대신 칩셋 공급과 특허 계약을 연계해 일방적으로 자사에 유리한 내용의 부당 계약을 체결했다. 퀄컴은 자사의 칩셋 관련 특허권을 일괄적으로 제공하는 대가로 휴대전화 제조사가 보유한 이동통신 관련 필수특허도 무차별적으로 끌어모은 것으로 조사됐다.
공정위는 모두 7차례 전원회의를 거쳐 이 사안을 심층적으로 검토했다. 특히 심의 과정에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업체뿐 아니라 애플·인텔·엔비디아(이상 미국), 미디어텍(대만), 화웨이(중국), 에릭슨(스웨덴) 등 세계 각국 ICT(정보통신기술) 기업들도 참여해 의견을 냈다.
퀄컴은 공정위 결정에 불복해 곧바로 2017년 2월 21일 서울고법에 공정위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날 판결에서 퀄컴의 불복 청구가 상당 부분 기각됐다.
국내 휴대전화 업계 역시 법원의 판단을 지지하는 분위기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퀄컴이 개발한 칩에 기술이 집적돼 있고 고부가가치인 것은 인정하지만 이동통신용 모뎀칩을 독점 공급하면서 횡포가 심했다”며 “이번 판단은 공정하고 당연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비슷한 일들이 다른 나라에서도 이뤄지고 있는 것을 보면 공정위가 일을 잘했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앞서 지난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의 미 연방지방법원 루시 코 판사는 퀄컴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과도한 특허 로열티를 받고 시장 경쟁을 저해하고 있다며 반독점 위반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업계는 퀄컴의 시장지위가 갑작스럽게 낮아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유지혜 기자, 세종=박영준·우상규 기자 kee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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