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일
서기 양반, 이 집이 구십 년 된 집이에요 이런 집이 동네
에 세 집 남았어 한 집은 주동현씨 집이고 한 집은 박래원씨
집인데 그이가 참 딱해 아들 이름이 상호인데 이민 가더니
소식이 끊겼어 걔가 어려서는 참 말 잘 듣고 똑똑했는데 내
자식은 어떻게 되냐고? 쟤가 내 큰아들인데 사구년 음 칠월
보름 생이야 이놈은 내 증손주야 작년 가을에 봤지 귤도 좀
들어 난 시어서 잘 못 먹어 젊어서 먹어야지 늙으면 맛도 없
지 뭐 젊어서도 맛나고 늙어서도 맛난 게 있는데 그게 담배
야 담배, 담배는 이 나이 먹어도 똑같긴 한데 재작년부터 기
침이 끓어서 요즘은 그것도 못 피우지 참다 참다 힘들다 싶
으면 불은 안 붙이고 물고만 있어 그런데 서기 양반은 죽을
날만 받아놓고 있는 노인네가 뭐 예쁘다고 자꾸 보러 온대
구청에서 직원이 나와 치매 노인의 정도를 확인해 간병인
도 파견하고 지원도 한다 치매를 앓는 명자네 할머니는 매
번 직원이 나오기만 하면 정신이 돌아온다 아들을 아버지
라, 며느리를 엄마라 부르기를 그만두고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고 며느리를 며느리라 부르는 것이다 오래전 사복을 입
고 온 군인들에게 속아 남편의 숨은 거처를 알려주었다가
혼자가 된 그녀였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문학동네시인선 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