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개와 비와 나
여자가 키우는 개는 사람 나이로 팔순을 넘겼다
짖는 일보다 앓는 일이 잦다
아직 간신히 마흔을 넘기지 않은 여자는
내가 오르거나 벗기려 할 때마다 숫처녀예욧,
죽어버릴 거예욧, 어쩌구 하면서 허리를 비틀곤
하는데
한눈으론 언제나 구석의 개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팔순 넘도록 총각을 떼지 못한 개에게
사람으로서 차마 보여주지 못할 꼴을 보일 뻔했다
는 듯
황급히 허리띠를 조이는 것이다
개는 그래도 못 미더워 뜬눈으로 코를 골고
나는 어떻게든 마흔 넘기기 전에 이 숫처녀를
죽여버릴 순 없을까 싶어 끙끙 앓는 것이다
팔순 넘긴 개와 아직 마흔을 넘기지 않은 여자 사
이에서
마흔도 넘기고 숫총각도 아닌 내가 베풀 수 있는
일이란
솔직히 그냥 꾹 참지만은 않는 일,이라고 믿는 나는
어떻게든 정확하고 신속하게 해치워서 여자를 죽
이고
또 개에게 사람으로서 차마 보여주지 못할 꼴을
꼭 보여주고 말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 것인데
아, 이 여자는 왜 이토록 살고 싶어 하는가
개는 왜 자꾸만 깨어나서 빗소리에 귀를 갖다 대
는가
나는 이제 무엇을 베풀어서 나의 믿음을 실천해야
하는가
어떻게든 이별
류근, 문학과지성 시인선 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