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0416
19-1편(대단원(1)):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9722
19-2편(대단원(2)):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96935
19-3편(대단원(3)):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96944
19-4편(대단원(4)):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96951
19-5편(대단원(完)):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96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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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끝나면 다시 일상이 돌아온다.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봄, 해수면 위로 부상한 오르카의 열린 선창(船窓)으로 화창하고도 노곤한 봄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봄바람이 솔솔 불어와 괜히 가슴 설레게 만든다. 정말 낮잠 자기 최고의 날씨다.
그러니까 프니르가 스카이나이츠 방의 소파에서 축 늘어져 자고 있어도 이번엔 이해해줘야 하는 것이다. 너무 평온하고 따뜻하단 말이다!
그러나 그리폰은 별로 그런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 바보가 또 세상 모르게 드러누워선....”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그리폰은 프니르가“에헤헤...사령과아아안~” 하고 잠꼬대하면서 – 도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거지 - 껴안고 부비부비하던 원형쿠션을 빼앗아 그대로 제비에게 내리쳤다. 푸닥푸닥. Wake up, Girl!
“으악! 어푸! 누구얏!”
“그리폰입니다, 대령님”
“전대장 깨우는 방식 중에서 최악이네! 아아-! 스카이나이츠의 군기는 어디로 간거야!”
“그럼 좀 전대장답게 굴든가. 침 질질흘리면서 배 긁고 자는데 위엄이 살겠어?”
“아하하...봄날씨가 너무 좋잖아.”
“그러다 또 살찐다? 줄넘기 다시 하고 싶어?”
에고, 하고 목을 움츠리는 전대장과 쯧, 하고 혀를 차면서도 쿠션을 돌려주는 그리폰의 모습은 지휘관(대리)와 부하라기보다는 서로 타박하는 절친한 친구사이인 십대 소녀들처럼 보였다.
“음, 다른 애들은 어디 갔어?”
“린티는 실피드랑 놀러 나갔고, 하르페는 신곡 만든다고 나갔어. 또 마키나랑 같이 틀어박혀 있겠지. 레스벨이야 뭐 늘상 그렇듯이 어디서 덕질 중인 모양이고, 블하는....어디 있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지금 스카이나이츠 방에 남아있는 건 제비와 그리폰 둘뿐이란 얘기였다. 사실은 그것 때문에 그리폰이 무례를 무릅쓰고 슬레이프니르 대령을 깨운 거기도 했다. 다른 애들이 있는데서 물어보면 괜히 부끄러우니까.
“저기..전대장, 아니, 리더”
“응?”
아이돌을 할 때는, 아이돌로서의 스카이나이츠일 때 제비는 리더다. 호칭이 바뀐 것에 의아해서 제비가 돌아보자 거기에는 시선을 피하며 그리고 뺨을 약간 붉히고 우물쭈물하는 그리폰이 있었다. 어서 말해보라는 프니르의 시선에 결국 그녀는 마지못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저기....다, 다음 공연은 언제 해?”
제비의 눈이 커졌다. 그리폰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어서다. 그 누구보다도 아이돌 하는 것에 불만스럽던, 언제나 아이돌에 부루퉁해하던 그리폰이 다음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무대에 오를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제비는 기뻐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참을 수가 없어졌다.
“흐으응~뭐야, 너도 기대하고 있었구나?”
“시...시끄러!”
“어때, 아이돌, 재밌지? 응? 하고 싶지? 응?”
“으윽....”
은근히 옆구리를 툭툭 찌르는 듯한 제비의 추궁에 그리폰은 괜히 틱틱대면서 얼굴을 더 빨갛게 물들였다. 그렇게 솔직하지 못한 그녀, 암, 그리폰다운 그리폰을 보며 제비는 씩 웃으며 답했다.
“걱정마! 프로듀서에게 얘기해서 요안나 아일랜드 순회공연이라도 할 거니까!”
“그거 엄청 피곤하게 들리는데”
“우리의 이야기는, 아이돌나이츠는, 끝나지 않아!”
태양 만세! 하는 자세로 휘황찬란하게 두 팔을 내뻗고 장엄하게 외치는 바보 제비를 보고 그리폰은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이다. 이걸로 그냥 끝이 아니구나그리고 제비는 여전히 바보구나. 그리고 아이돌을 진심으로 바라는, 그리고 기대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새삼 소스라쳤다.
다시 말해보자. 떠들썩한 축제가 끝나면 일상이 되돌아온다. 그러나 축제 후의 일상은 축제 전의 일상과는 조금 다른, 뭔가 새로운 설렘을 품고 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이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대든, 새롭게 더 나아진 자기 자신에 대한 흥분이든.
아이돌이 그리폰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는 그리폰 자신도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가 바뀐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리폰은 속으로만 – 제비에게 모여주면 자존심 상하니깐 - 미소지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걸로 봐서, 그 변화가 나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마치, 겨울이 지나고 온 봄날의 햇살처럼 말이다.
...
이제는 꽤 유명한 아이돌이 된 린트블룸이지만, 그녀가 실피드가 카페테리아에서 케이크를 먹으며 담소하는 걸 보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오르카가 아무리 커봤자 결국은 크기가 정해져 있고 갈 곳도 명확한 잠수함이고, 소완네 카페테리아는 한 곳이니까. 그러니까 스프리건이 숨어서 파파라치 짓을 할 곳도 정해져 있었다. 어찌 보면 오르카는 파파라치들의 천국인지도 모른다. 다 갈 곳이 뻔한 데가 오르카니까.
“으히히. 이번엔 무슨 특종을 잡을까~”
들키지 않게 카페의 대형 화분 뒤에 숨어서 – 카페 카운터에서 커피를 내리던 아우로라 위치에서는 보였기에 그녀는 얘가 또 여기서 뭘 하나 했다 - 둘의 대화를 엿들으려는 스프리건이 중얼거렸다. 오르카 아이돌 프로젝트는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아이돌만큼 조회수를 늘리기 좋은 가십거리도 달리 없다. 어쩌다 무심코 꺼낸 발언을 잡아 루머나 스캔들로 비화시키면 그날로 ‘오늘의 오르카’의 흥행은 따논 당상이다.
그렇게 기대감에 찬 스프리건의 뒤로 누군가가 살며시 다가갔다. 그리고 셔터를 누르는 데 열중하는 그녀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스프리건 씨”
“으힉!”
“놀라는 거 보니까 떳떳하지 않다는 건 아나 보네요”
“아, 놀래라. 블랙 하운드구나”
처음에는 놀랐지만 그것이 블하란 걸 알아차린 스프리건은 내심 절반 정도 안도했다. 얘는 착해 빠졌으니까. 대충 변명하고 넘어가면 괜찮을 것이다.
“음, 들어봐, 블하야. 언론인에게는 언론의 사명이란 것이 있어”
“흐음.”
“린티가 뒤가 구린 게 없다면 내가 좀 찍어도 상관없잖아? 다음 번에는 조심할 테니까 이번엔 그냥 넘어가자. 서로 얼굴 붉히면 피차 너도 불편하고 좋을 거 없잖아. 그런 걸 바라진 않지?”
맞는 말이다. 언제나 뒤에서 조용히 남들을 받쳐주고 배려해주는 착한 블하의 성정에 그런 것은 맞지 않는다. 하지만...
“안 그래도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찾아다녔어요”
어, 이건 좀 의외인데. 비교적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편인 블하답지 않아 스프리건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폰이 찾아오는 것보다는 제 쪽이 더 낫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콘서트가 끝나고 나서 며칠 동안 그리폰이 사형집행인 같은 표정을 하고 스프리건을 찾아다닌 건 이미 오르카 내에 꽤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괄괄한 성격을 – 당장에라도 스프리건의 뚜껑에 대전차 공대지 미사일 때려박을 기세인 – 만나는 것보다는 부드럽고 조용한 –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만만한’ - 블하가 더 낫다. 그렇게 생각하며 어떻게든 스무스하게 이 유순한 검은 개를 구슬려 넘어가려던 스프리건은, 블하의 눈동자가 강직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그러니까, 스프리건 씨...”
소녀에서 어른이 되는 것. 그것이 블랙 하운드가 아이돌을 하면서 바랐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이돌이 정말로 그녀를 한 걸음 더 성장시켜 주었다면, 그녀를 조금 더 어른으로 만들어 주었다면, 좀 더 적극적이고 당당해져도 될 것이다. 한 발짝, 더, 용기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도 되리라. 후우, 하고 그녀는 심호흡했다. 할 수 있어, 블하. 용기를 가져. 린티를 위해서,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해서야. 스프리건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되고 불편해질지도 몰라. 하지만,
언제나 얌전하던 소녀는, 항상 고분고분하던 유순한 아이는,
있는 힘을 다해 크게 소리쳤다.
“파파라치 짓 좀 그만 하세요!!!!”
카페 전체를 가득 메울 듯이 울려퍼지는 그 외침에 카페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리를 향했다. 변장하고 린티를 훔쳐보던 스프리건과 그 앞에 선 블하를 향해서.
“에? 블하? 여기서 뭐해?”
린티와 실피드의 시선도 말이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자 스프리건은 당황했고 블하의 얼굴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역시 익숙하지 않다. 부담스럽다. 이렇게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건.
하지만 처음은 아니잖아. 이미 무대에서도 한 번 경험해 본 거잖아.
“스프리건? 뭐야? 너 그 카메라 뭐야? 야! 그거 안 치워?”
"히이익"
곧이어 실피드의 날선 고함이 날아왔다. 스프리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순식간에 카페는 난장판이 되었다. 이 사태의 원인제공자가 된 블하는 괜히 미안해졌다. 그러나, 누군가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는 블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어”
아우로라였다. 싱긋 웃는.
“쟤 언제까지 저러나 했지. 자, 코코아 서비스야. 긴장 풀어.”
약간 황망하게 코코아를 받아든 그녀의 코에 달콤한 내음이 감돌았다. 그제야 그녀는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성장했다는 것을.
용기를 가지라는 것을, 혹은 용기를 가져도 된다는 것을.
가끔은, 당당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이돌 한 게 헛되진 않았다. 블하는 미소지었다.
...
“저기, 마키나”
마키나의 음향실에서 하르페가 부르자 마키나가 돌아보았다.
“그 날 우리의 노래가 정말로 울림을 주었을까?”
“적어도 음정은 정확했어요. 멋진 공연이었죠.”
“고마워. 하지만 그것만으론 불충분해”
노래는, 아니, 예술이란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 그래서 그들이 가장 희구하는 것을 채워준다. 가장 치열하고 잔혹한 전쟁터에서 사람들은 평화를 갈구한다. 증오와 파괴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찾는다.
그러면, 그녀들의 노래가 오르카의 사령관이, 그리고 바이오로이드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었을까? 하르페는 자문해보았다. 돌이켜보았다. 그 날의 공연을. 한점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후회는 없지만, 더 강한 욕심이 피어올랐다. 그 날 모인 그 모두의 마음에 울림을 주고 싶다고.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고.
사령관부터 브라우니까지, 모두에게 기쁨을, 위로를, 평안을, 그리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그들이 원하는 것, 그들이 갈구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을까? 그건, 책만 읽어서는 알 수 없다. 직접 해 봐야 알리라. 그리고 해 보려면, 더더욱 노력해야 하리라. 논리적 결론에 다다른 금발 책벌레는 읽던 화성학 첵을 내려놓고 미소지었다.
“다음 번에는 더 잘할거야”
그리고서 그녀는 마키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화음과 음색, 아니 나아가 오감(五感)을 조율하는 자, 마키나는 그런 눈빛을 잘 알았다. 한 번 무대의 열기를, 그 환희를 맛본 자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만의 소리를, 우리만이 할 수 있는 노래를 들려줄 거야”
멸망전의 소리들, 그 옛 노래들도 아름답지만, 들려주고 싶다. 그녀들만의 소리를. 마키나가 가만히 자신의 드론 오케스트라를 내려놓았다.
“신곡을 작곡하게요? 작곡은 결코 쉽지 않을 거에요”
“상관없어. 완전히 새로운 걸 보여주겠어. 그래서 이번엔, 우리 시대의 노래로 모두를 감동시킬 거야. 기쁘게 해줄 거야.”
마키나는 마주 웃어주었다. 사실은 바로 그것이 과거의 그녀가 낙원에서 바라던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바이오로이드들을 환각으로 홀리던 그 때의 그녀보다는, 지금 스카이나이츠의 방식이 훨씬 낫다. 마키나는 하르페이아를 도와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
“모모, 뭐하고 있어?”
사령관실에 쏟아져 들어오는 봄날씨가 좋다. 데뷔 콘서트가 끝나자 프로듀서와 매니저도 훨씬 홀가분해지고 중압감이 한결 사라졌다.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일상이 돌아온 건 아이돌 당사자인 스카이나이츠들만이 아니었다.
“레스벨 씨와 톡하고 있어요.”
패널을 손가락으로 날렵하게 두드리면서 모모가 답했다. 아무래도 흐레스벨그는 아이돌을 일종의 또다른 유형의 마법소녀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뭐 아주 틀린 생각도 아닌 것 같아 – 무대 위에서만큼은 실제로 천하무적의 마법소녀니까 – 사령관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효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다음 콘서트 때는 자기도 이거에 끼고 싶다는데.”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레스벨은 그런 곳에 재능도 경험도 있으니까 말이다. 겨울 축제 때 카엔과 제로의 연극을 주관한 게 바로 그녀 아니었던가. 그러니 정말로 어쩌면 다음 콘서트 때는 – 언제 어디서 할지 아직 정하진 않았지만 – 레스벨을 끼워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사령관은 다른 상념에 빠져들었다. 그 동안 아이돌들을 뒷바라지하느라 바빠서 잠시 잊고 있던 것, 눈코 뜰 새 없이 공연을 준비하느라 바빠서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바로 사령관 그 자신의 이야기가.
그가 프로듀서 노릇에, 본업에 무리가 갈 정도로 몰입했던 이유에 대하여.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타박을 받아가면서까지 이,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그렇게나 집중했던 이유에 대하여.
스스로도 비합리적이란 걸 알았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 이유에 답하려면, 먼저 다음의 물음에 답해야 하리라.
바이오로이드는 자신이 태어난 용도 이외의 것이 될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모듈을 바꿔 낀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러한 외적인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를 가르는 지점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용도 없이 태어난다. 갓 태어난 인간은 무용(無用), 곧 무쓸모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목적을 찾고, 훈련과 노력으로 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자신의 ‘쓸모’를 갖춰 나간다. 모듈만 바꿔 끼면 되는 바이오로이드에 비해 정말 쓸데없이 귀찮고 힘든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기에 스스로의 길을 스스로가 정한다. 스스로 자기 삶의 목적을 정하고, 스스로 그 길을 걸어나가고, 때로는 스스로 그 길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 인간들에게 주변 환경이나 사회의 압박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떤 대가를 치루든 적어도 선택은 그들 자신의 몫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다름없는 바이오로이드들은, 그것이 가능한가?
사령관은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그 순간만큼은 오르카에서 가장 아름답게, 찬란하게 빛나던 소녀들에게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물론 멸망 전 스카이나이츠 기종들이 대민 홍보를 위해 아이돌 노릇을 했던 기록은 있다. 하지만 오르카의 스카이나이츠들에게는 대민홍보를 할 민간인들도 없고, 사령관이 먼저 그걸 하라고 명령한 적도 없다. 그녀들은, – 정확히는 슬레이프니르가 –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로, 자기들만의 이유로 아이돌을 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녀들은 스스로 그녀들의 길을 찾았다. 슬레이프니르가 아이돌을 하겠다고 사령관을 찾아왔을 때, 사령관은 정말로 기뻤다. 바이오로이드는, 그저 로봇이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그녀들은 아이돌 모듈 없이 제로베이스에서 이 무모한 도전을 시작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마지막에는 아이돌 모듈을 받을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그리고 아이돌 모듈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은 오롯이 그녀 자신들의 의지와 노력 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들이 거기까지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 그 자체가 사령관에게는 더할 수 없는 보상이었다.
아이돌은 빛난다. 반짝반짝. 그렇게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은 보기 좋다. 동경하게 되니까. 오르카에서 모두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사령관이 누군가를 동경하는 기분에 빠지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다.
‘동경의 대상이 되는 자가, 다른 누군가를 동경한다라’
어쩐지 조금 전 언급된 흐레스벨그가 떠올랐다. 이제는 팬들의 우상이 되었지만, 또한 여전히 모모를 우상으로 경배하는 그녀가. 어쩌면 자기도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사령관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유능하니 뭐니 추켜세워도 결국 그 역시 일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오르카의 구원자이자 메시아라는 자리는 일개 인간인 그에게는 짐스러웠다. 다들 사령관이 인류를 부흥시켜 주길 원한다. 오르카 저항군을 구원해 주길 바란다. 그녀들의 그 모든 동경과 기대가 무거운 중압갑으로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몇 개월간 그는 지쳤다. 미친 듯이 노력해서 사상자는 없게 하고 있지만,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그의 심신은 점차 마모되어 갔다. 결국은 그도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마음이 닳아 가니 희망도 자꾸만 닳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모듈이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다. 갓 태어난 바이오로이드라도 적절한 모듈을 장착한다면 뭐든지 척척 잘 해낼 수 있다.
하지만, 철충이나 별의 아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모듈은 없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령관은 오롯이 그의 힘만으로, 그의 노력만으로 그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해내야 한다. 암담하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이, 그리고 바이오로이드도, 모듈 없이 성장할 수 있다면. 스스로의 의지로 일어서, 스스로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면.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는 다르지 않다. 인간이 자신의 길, 자신의 쓸모를 스스로 찾아갈 수 있다면, 바이오로이드들도 그러하리라. 바이오로이드가 모듈 없이 무언가를 끝내 이루어 낼 수 있다면, 인간인 자신 역시 그러하리라.
사령관은 바로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이돌 프로젝트를 통해 그걸 증명하고 싶었다. 앞으로도 계속될 그의 삶에 희망을 붙잡을 밧줄을 던져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가 이 일에 집착하듯이 달려든 이유였다. 스카이나이츠들에게 아이돌이 하나의 밧줄이었듯이, 사령관에게는 스카이나이츠가 하나의 밧줄이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 위한. 그리폰을 설득했던 그 첫날에 그녀에게 해주었던 사령관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 자신을 위한 이야기인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엿한 아이돌이 되어 무대 위에서 당당히 그 자태를 펼치는 소녀들을 보면서, 우습지만 사령관은 바이오로이드들인 그녀들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경건한 느낌마저 받았다.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성장한 것은 스카이나이츠들만이 아니었다. 사령관 자신도 그녀들로 인해 성장했다. 그것만으로도 사령관은 만족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기까지,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따라와 준 하늘기사들이 고마웠다.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뭉쳐서, 마지막까지 밧줄을 붙잡고, 부서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스러지지 않고 결국 해내준, 강인한 그녀들이 고마웠다. 최후까지 단념하지 않은 그녀들이 프로듀서를 구했다. 어쩌면, 그 날 무대에서 말없는 감사 인사를 전해야 했던 건 그리폰이 아니라 그였을지도 모른다.
“읏차.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아무래도 상념에 빠져 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그는 기지개를 펴며 집무를 보던 책상에서 일어났다.
다들 모여 있을 것이다. 프니르, 리피, 블하, 하르페, 레스벨, 린티. 다들 자기 일을 하다가도 약속이나 한 듯이 한 자리에 모여 있을 것이다. 거기서 프로듀서와 매니저를 기다리고 있겠지.
아이돌이 무대에 오르려면, 아름답게 빛나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대의 뒤편에서 열일하는 이들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비록 눈에 띄지 않지만, 결코 주목받지도 관심받지도 못하지만, 그런 이들이 없다면 공연은 시작되지 않는다. 데뷔공연 때도 둘이 음지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지 않았더라면 그런 매끄러운 진행은 불가능했으리라.
“그 날 고생했어, 모모”
“뭘요. 프로듀서도요”
모모가 방긋 웃으며 일어나 서류를 챙겼다. 아이돌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는다. 아이돌은 쉬지 않는다. 다음 공연 일정을, 신곡을, 그리고 새 안무와 이벤트들을 준비해야지.
“출근하실 시간이네요, 사령관님, 아니, ‘프로듀서’.”
“아아, 오늘도 시작해 볼까”
둘은 발걸음을 옮겼다. 연습실을 향해, 소녀들이 꿈을 향해 다같이 밧줄을 잡고 고군분투하고 있을 그곳을 향해.
아무도 없는 사령관실에 봄바람만이 살랑살랑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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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출처에 대한 이야기
1) 삽입된 곡들:
- 첫번째 곡은 매쉬업(Mashup)입니다. "Ben Miller"가 "American Authors"의 "Best Day of My Life"(2014)와 "Imagine Dragons"의 "Top of the World" (2012)를 리믹스한 곡입니다. 흥겨우니 전체 글을 읽으시면서 들으셔도 좋습니다. 두 곡의 원곡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Y66j_BUCBMY / https://www.youtube.com/watch?v=w5tWYmIOWGk )
- 두번째 곡은 "죠죠의 기묘한 모험: 황금의 바람"의 OST인 "갱 댄스(Gang Dance)" (2018) 입니다. "그랑카트" 님이 추천해 주셨습니다. 사실 이 곡이 삽입된 이야기는 생각해둔 게 아닌데, 이 분이 음악을 추천해 주시는 바람에 하나 새로 써 넣었습니다(...)
- 세번째 곡은 한국의 랩퍼 "다이나믹 듀오(Dynamic Duo)"의 "AEAO" (2015)입니다. "Mental Rider"님이 추천하시려다 말았다고 했는데, 어차피 마지막인데 넣죠 뭐 ㅎㅎㅎ
- 네번쪠 곡은 "Oh The Larceny"의 "This is it" (2019)입니다. 사실, 이 노래는 제가 이 소설 시작한다고 예고했던 게시글 (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80323)에 넣었던 바로 그 곡입니다. 가장 마지막 이야기는 가장 처음 시작한 노래로 끝맺어야죠. ㅎㅎㅎ 그렇습니다. 이제, 정말로, 저 글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장장 4개월 넘던 대장정이 끝난 겁니다.
2) 삽입된 두 그림은 모두 그리폰 장인님 (Yong2님)의 그림입니다
- 첫번째 그림 출처: https://twitter.com/Yong2_22/status/1339019746683994115
- 두번쨰 그림 출처: https://twitter.com/Yong2_22/status/1330938134129852418
1. 설정에 대한 이야기
1) 모듈에 대한 설정 및 바이오로이드와 모듈에 대한 관계는 대체로 공식 설정입니다만, 에필로그는 제가 아직 모듈 관련 설정을 전부 알지는 못하는 1년 전에 구상되었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2) 마키나의 드론 이름이 오케스트라더군요. 저도 이거 쓰면서 꺼라위키 찾아보고 알았습니다.
3) 마키나에 대한 서술은 겨울 이벤트인 낙원으로의 초대를 의미합니다.
4) 흐레스벨그가 카엔과 제로의 연극을 감독했다는 것 역시 겨울 이벤트 낙원으로의 초대의 공식 내용입니다.
2. 본편에 대한 이야기
1) 중간에 언급된 "Wake up, girl!"은 아이마스와 러브라이브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한 비운의 아이돌 프로젝트 WUG의 패러디(?)입니다.
2) 그리폰의 줄넘기 이야기는 16편에 나와 있는 개그 에피소드입니다.
3) 사령관이 아이돌 프로젝트를 물심양면 지원해 준 이유가 바로 에필로그에서 밝혀집니다. 그간 소설 전체에 걸쳐 가끔 언급되었지만(예를 들어, 11-3편이나 15-4편에서요), 마지막 완결 날 때까지 밝혀지지 않았죠? 사령관이 왜 이렇게 열심인지, 자기 본래 업무에 지장이 갈 정도까지 도와주는 이유에 대해서요. 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 사령관이 그리폰에게 해 준 밧줄 이야기는 1편을 말합니다.
4) 결국, 다들(사령관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성장했습니다. 기나긴 이야기가 끝났으면 다들 뭔가 남는 게 있어야겠죠.
3. 잡담
1) 이제 정말로 다 끝났습니다. 곁가지 이야기는...나중에 소설 반응 좋으면 좀 늦게 올리려고요. 어쩌면 공식 이벤트 이후에요.
2) 제 소설을 가지고 2차창작을 하시거나 퍼가셔도 상관없습니다. 출처만 맑히고 알려만 주시면 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이 창작자들에게는 언제나 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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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하고 끝낼리는 없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아이돌나이츠 콘서트에 곁가지로 껴서 한곡 부르는 사령관 팬픽을 한번 써볼까하네요. 화려한 연출과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엮는 느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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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소설은 언제든지 활용하셔도 됩니다. ㅎㅎㅎ 출처만 밝히고 알려만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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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레이칸상! 도무데스요 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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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어째서 당신이 리더인 아이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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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ㅡ 모듈 설정을 잘 몰라서 생긴 치명적인 설정구멍이군요 부끄럽습니다ㅜ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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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하고 끝낼리는 없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아이돌나이츠 콘서트에 곁가지로 껴서 한곡 부르는 사령관 팬픽을 한번 써볼까하네요. 화려한 연출과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엮는 느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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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소설은 언제든지 활용하셔도 됩니다. ㅎㅎㅎ 출처만 밝히고 알려만 주셔요 | 21.04.02 18: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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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레이칸상! 도무데스요 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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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어째서 당신이 리더인 아이돌이다! | 21.04.02 18: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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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자와 시호와 아마미 하루카도 구분못한 저는 패션씹덕입니다 흑흑 | 21.04.03 00: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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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ㅡ 모듈 설정을 잘 몰라서 생긴 치명적인 설정구멍이군요 부끄럽습니다ㅜㅜㅜㅜㅜㅜ | 21.04.02 18:5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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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이드에 비해 효율이 떨어진다했으니 바이오로이드만 남은 상황에서 인간인 사령관이 모듈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갖는정도야 큰 문제는 아닐듯싶습니다. 사령관이 모듈사용을 얼마나 잘 할수있냐가 문제겠지만 솔직히 사령관 활약보면 전술모듈이라든가 행정모듈 사용안하면 몸이 남아나지를 못할듯요. 모듈 도움없이 일일히 계산해야한다는거니. 물론 사령관이 모듈을 사용하고있다는건 제 추측일 뿐입니다. 정력강화도 모듈로 이뤄질수있는가가 궁금하긴한데(모듈이 여성의 흥분부위나 체위에 대해 익숙한 활동을 하도록 도와준다든지?) 거꾸로 생각해보니 여성 바이오로이드를 이용해 성상납 시켰던 멸망전 생각하면 만들었을거같... | 21.04.02 18:5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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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큰 주제인 태어난 존재의 가치 무용과 모듈의 효율성 차이같은거 생각하면 사령관이 저렇게 말하는것에 설정문제를 삼을건 없어보이네요. 딱히 본문을 수정해야할거같지는 않습니다. | 21.04.02 18:5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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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듈이 암만 좋아도 사령관이 생각하는 별의아이나 철충 문제를 해결해줄 모듈같은건 애초에 존재하지않을테니까요. 본문 곱씹어도 수정할 부분은 없어보이네요. 다만, 바이오로이드의 경우 언어모듈같이 기본적인 모듈이 없으면 애초에 의사소통이라든가 학습자체가 말도안되게 비효율적으로 바뀔테니 작업모듈과 별개로 필수적인 모듈자체는 있겠지만요. 이것도 주제와 크게 관련없고 작업모듈 한정해서 표현한거로 볼수있으니 설정에 부담가지실 필요는 없을거같습니다. 사실 gm도 아니고 제가 이래저래 설정 논하는게 쓸데없는 소리긴하지만요. | 21.04.02 19: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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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다행이지만요 ㅎㅎㅎ | 21.04.02 19: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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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으셨다니 그래도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 | 21.04.02 23: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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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건 -> 아닌것을 | 21.04.03 08: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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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는 맵게 괴롭힐 겁니다.히히 | 21.04.03 10: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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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추종자
언제나 빠짐없이 또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댓글 달아주시는것 좋아해요! 저 관심종자인걸요 앗 헤으응 | 21.04.04 15:4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