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구덩이 속의 세 B급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16)
2편: 구덩이 속의 네 B급(上)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47)
3편: 구덩이 속의 네 B급(下)(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48)
4편: 구덩이 속의 네 B급, AGS 하나(上)(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559)
5편: 구덩이 속의 네 B급, AGS 하나(下)(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560)
6편: 구덩이 속의 네 B급, AGS하나, 그리고 철충 한 마리(上)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607)
7편: 구덩이 속의 네 B급, AGS하나, 그리고 철충 한 마리(下)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6608)
전편: 다시, 구덩이 속의 네 B급(上)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6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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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리콘은 흙무더기 속에서 일어났다. 온 몸이 흙투성이였다. 사방이 어두웠다. 숨이 막혔다.
“누구 살아 계신 분 있나요? 죽었으면 좀 알려주세요...”
으으으 소리를 내며 샌드걸이 저편 한쪽 구석에서 돌무더기를 헤치고 나왔다.
“다행히 살아있습니다. 천만다행이군요”
“418번은....”
그 때, 레프리콘은 흙더미 속에서 튀어나와 있는 브라우니의 팔을 발견했다. 허공에서 힘없이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 그 손을 보자 레프리콘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418, 418, 안 돼요”
그녀는 달려가 그 팔을 붙잡고 오열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죽어버리는 게 어딨어요....”
“상병.”
“그렇게, 그렇게 애썼는데, 여기서, 이렇게...”
“상병.”
“미안해요, 418, 정말 미안해요. 그동안 갈궈서 미안해요”
“저기, 상병.”
“여기서, 흑, 이렇게...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 더 잘해줄걸...”
“저 안 죽었지 말임다”
후두둑, 소리와 함께 흙더미를 무너뜨리면서, 먼지와 흙으로 더 이상 지저분한 몰골이 될 수가 없는 브라우니가 굴러나왔다. 브라우니가 아니라 거의 두더지 꼴이었다.
“쿨럭쿨럭, 으웩, 입에 흙 들어갔슴다”
레프리콘은 모래가 묻은 혀를 내뺴믈고 퉤퉤거리는 브라우니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샌드걸은 그런 레프리콘 - 먼지투성이 얼굴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우스운 꼴이 된 - 을 약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그러게 좀 확인하고 슬퍼하지 그랬습니까”
때아닌 개그를 연출한 둘을 내버려두고 샌드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쿠아는 어디 있죠?”
“나 여기 있어”
어둠 속에서 아쿠아가 걸어나왔다. 그녀도 똑같이 흙투성이에, 안 그래도 오래되어 해진 옷이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넷 중에선 상태가 제일 양호해 보였다. 샌드걸은 안도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우리 넷 모두 살아남았군요.”
“오래가진 못할 거 같지만 말임다”
운이 좋다면 좋다고 해야 할까. 그녀들은 흙모래 속에 파묻히는 대신, 무너져내린 바위들이 절묘하게 맞물려 생겨난 자그마한 공간 안에 버려졌다. 다시, 그녀들은 처음에 이 지하로 떨어졌을 때와 똑같이 차갑고 어두운 구덩이 속에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때보다 상황이 더 나빴다. 그 때는 어디서 공기가 통하는 곳이라도 있었고, 아쿠아가 그녀들을 인도한 지하 공동으로 향하는 틈새도 있었지만, 여긴 누가 봐도 아무데도 갈 곳 없는 어둡고 밀폐된 구덩이였다. 그나마 다리 뻗고 기댈 공간이라도 있던 처음의 구덩이보다 좁기까지 해서 네 바이오로이드들은 옹기종기 모여 쭈그려 앉아야 했다. 그리고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들의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바위를 바라보았다.
겨우 이 구덩이를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샌드걸은 다가가 그 바위에 손을 갖다 댔다. 마치 그러면 그 바위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처음에 그녀들이 떨어졌던 구덩이에서 브라우니가 했던 것과 그렇게 다르지도 않은 행동이라 그녀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이제야 저 바보를 조금 이해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지. 돌아보자 브라우니는 약간 묘한 표정으로 샌드걸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죠, 일병.”
“아까 전에 말임다, 저흴 왜 구하셨슴까?”
“네?”
“그거 말임다. 날아가는 거. 그거 혼자 타고 가셨으면 틀림없이 중위님 혼자서라도 여길 빠져나가셨을 검다.”
브라우니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들 땜에 그게 느려진 거 아님까.”
“그런데요?”
“왜 저흴 버리고 가시지 않으셨슴까?”
샌드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브라우니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의견이었기에 레프리콘은 혹시 저거 철충이 아닐까고 순간 의심했다. 지하의 어둠은 지능을 상승시키는 것인가. 결국, 샌드걸은, 마지못해 - 하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 눈앞의 상대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기하지 말라고 했던 건 일병 아니었던가요.”
브라우니는 피식 웃었다.
“그게 바보짓이라도 말임까?”
샌드걸도 마주 웃어주었다.
“이번에는 제 판단력이 좀 부족했단 걸 인정하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무런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야, 두 바이오로이드는 화해했다. 아직 삔 발목이 여전히 아팠는지, 브라우니는 주저앉았다. 그리고 레프리콘 품에 안긴 채 앉아 있는 아쿠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도 이제 불만 없슴다”
“불만이 없다뇨?”
“저흰 할 만큼 했슴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지 않슴까. 비록 못 나갔지만, 속은 시원함다”
그 브라우니조차 더 이상 여한이 없을 만큼, 모든 힘을, 발버둥을 쳐볼 만큼 쳐봤다는 얘기다. 하기야 이 구덩이 좀 빠져나가 보겠다고 B급 넷이서 거대한 옛 대피소를 뒤지고, 녹슨 AGS를 다시 일으켰으며, 막강한 토터스에 맞서 이겨냈지 않은가. 여기서 뭘 더 해보란 말인가. 브라우니는 이걸로 노래를 하나 만들어도 될 법하다고 생각했다. 꽤 괜찮은 무용담이 될 거고, 네오딤에게도 가르쳐 줘볼 만하리라. 그래봤자 그녀들도 그녀들의 이야기도, 모든 것이 이 어둠 속에서 잊혀져 버린다는 것은 허망하지만.
“뭐, 어쨌든 중위님 말이 맞긴 했던 모양임다. 해봤는데 안 됐지 말임다”
언제나 그렇게 의지에 넘치던 브라우니가 마침내, 끝내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비록 그것이 자기 자신과 어느 정도 닮은 모습임에도, 샌드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정말로 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의 앞을 가로막은 저 바위를 부술 수도 치울 수도 없으니깐...
“아쿠아에게 미안할 뿐임다. 여기서 내보내 주겠다고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결말이 이렇게 되어버렸슴다”
“뭐....됐어.”
레프리콘의 품 속에서 아쿠아가 작게 속삭였다.
“어차피 그 시설에서 오래 버티진 못했을 거야.”
아쿠아는 레프리콘의 품에서 빠져나와 샌드걸과 브라우니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짧게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고...언니들이랑 만날 수 있어서 즐거웠어. 톰이 이 자리에 없는 건 슬프지만.”
흙투성이 얼굴에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처량했지만, 그녀는 싱긋 웃었다.
“난 이미 백 년 넘게 살았어. 하늘이란 걸 못 보게 된 건 좀 아쉽지만, 적어도 마지막은 외롭지 않네 뭐”
그 의연한 태도가 오히려 세 바이오로이드의 가슴을 더 메이게 만들었다. 샌드걸은 머리를 감싸쥐고 아쿠아를 꼬옥 안아 주었다. 예정된 최후를 받아들이자 오히려 절망은 담담함으로 바뀌어 갔다. 저 지하 통로에서부터 계속되었던 긴장이 풀리고 초연함이 찾아오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욕구가 솟아올랐다.
“담배가 피우고 싶군요.”
“어, 하나 드림까?”
샌드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네? 담배가 있었습니까?”
“잠만 기다려보시지 말임다.....아, 여깄다. 안 흘렸네”
브라우니는 양말 속에서 낡고 찌그러진 오래된 담뱃갑을 꺼냈다. 도대체 거기에 왜 담배가 들어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담배가 마려웠다.
“아까 연료 가지러 갔을 때 연료실에 하나 떨어져 있었슴다. 멸망 전에도 연료실에서 담배 태우려던 미1친놈은 있었던 모양이지 말임다”
모르긴 몰라도 그 ‘미1친놈’의 등짝은 무사하지 못했을 터다. 오래되고 해져서 과연 담배향이 남아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브라우니에게서 담뱃갑을 받아든 샌드걸은 라이터를 찾았...
‘아, 맞다’
그녀의 라이터는 조금 전에 저 지하에서 유실되었다. 토터스를 잡기 위해 브라우니가 던진 게 그거였으니까. 결국 그녀는 처음에 지하로 떨어졌을 때는 라이터가 있고 담배가 없었지만, 정작 여기서는 담배가 생기자 라이터가 없는 상황에 처해버렸다. 어느 경우든,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는 점은 같았다.
“....됐습니다. 어차피 마지막인데 금연이란 것 한번 해보죠.”
그리고 어차피 라이터가 있었어도 담배를 피우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녀들이 그렇게 빠져나가고 싶어한 저 지하에서 도망쳐서 도착한 이 흙구덩이는, 그래도 어딘가 공기가 통하는 구석은 있던 저 심연보다 더 나빴다. 밀폐된 것이다. 안 그래도 그녀들이 이 안에서 질식해 죽는 것은 시간 문제인데, 구태여 담배를 피워서 그 시간을 앞당길 필요는 없을 터였다. 샌드걸은 그래도 죽기 전에 금연을 성공하고 죽으면 B급 인생에 업적은 하나 남기고 죽는 것 아니겠냐고 스스로 합리화했다....길어봤자 수 시간 동안 금연하는 거겠지만, 동시에 ‘죽을 때까지’ 금연하는 거니까 또 말은 되지 않는가.
허탈한 표정으로 브라우니와 아쿠아 옆에 쪼그려 앉은 샌드걸을 보자니, 그래서 모두가 좌절감에 빠져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을 보자니 저 지하에서 느껴졌던 무력감이 레프리콘의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결국, B급은 B급일 뿐인가. 우린, 해도 안 되는 건가.
여기까지 왔는데.
발버둥쳐도 의미 없는 짓이었던 걸까.
이젠 우리에게 더 이상 남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우린 정말 그저 헛짓거리를 하다 헛되이 죽는 걸까.
숨이 점점 가빠오는 것 같다. 아마 공기가 떨어져 가는 것이겠지. 질식사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산소 부족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것은 편한 죽음이 아니다. 레프리콘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자신의 경기관총을 바라보았다. 차라리...차라리 이걸로 마지막을 빠르고 편하게 끝내는 것이 더 나을지도...
그러나 여기 갇힌 세 군용 바이오로이드에게는 더 이상 남은 탄약이 없었다. 그건 지하에서 다 소모했다. 편히 죽기 위한 최후의 수단마저도 이제 그녀들에겐 없는 것이다. 부질없다는 것은 잘 알지만, 레프리콘은 마지막으로, 원망을 담아, 그녀들을 가로막은 암석의 벽, 그녀들과 바깥 세상을 가로막은 단 하나의, 그러나 난공불락의 성채를 걷어찼다.
쯔어억
바위에 금이 가자 네 바이오로이드의 얼굴에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쯔저저적 -소리와 함께 그 금이 균열을 이루며 바위에 퍼져나가자 레프리콘은 황망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경악과 놀람에 가득찬 나머지 세 바이오로이드의 표정 - 사실 레프리콘 본인의 표정도 그다지 다르진 않았다 - 이 그녀를 마주했다. 발길질 한 번으로 저 큰 바위를 깨부쉈다고?
“상병님, 혹시 타이런트셨슴까?”
레프리콘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바위가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박살나 붕괴되는 바위의 파편 사이로 신선한 공기가 훅 끼쳤다. 아아, 얼마나 그리운 맑은 공기인가. 앞으로는 오르카에서 1일 1환기를 꼭 할 거다. 잠수중이래도 말이다. 얼마나 맡아보고 싶어했던 바깥 공기의 내음이던가....아직 깨진 바위 냄새와...화약 냄새가 섞여 있긴 하지만....
....어라, 그런데 이거, 어쩐지 익숙한 화약 냄새네.
“야! 피닉스 대령 납셨다! 실종자들 살아있냐!”
“대령, 그렇게 무식하게 땅에다 포탄을 쏴대면 살 놈도 죽었을 거야.”
“하지만 바위를 부숴야 했는걸요”
“...중장비 부를 때까지 기다릴 순 없었어?”
“그랬다간 우리 애들 지루해서 죽어요”
지루해서 죽진 않았겠지만, 실제로 죽을 뻔하긴 했다.
오랫동안 어둠에 적응해서 바위가 깨지고 무너진 통로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느지막한 햇살조차 네 바이오로이드들에겐 정오의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마냥 눈이 부셨다. 아마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 때문에 눈이 부신 걸 꺼다. 절대 눈물이 흘러서 눈앞이 부얘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눈이 멀도록 부시게 쏟아지는 빛줄기 사이로, 트윈테일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그보다는 단정한 롱헤어의 실루엣도.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수많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만큼 수많은 산 자들의, 살아 숨쉬며 움직이는 자들의 그림자가, 살아서 조잘대는 자들의 목소리가, 살아 있는 자들의 몸짓이, 그녀들 앞을 가득 메웠다. 쏟아지는 햇살로 인한 역광에 그녀들의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순식간에 죽음만이 도사리던 구덩이에 햇살과 함께 생기가 가득 들어찼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마 햇살을 받아 얼굴이 달아올라 그런 걸 꺼다. 절대, 절대로 얼굴에 눈물이 흘러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상병님”
“네...네, 뭐죠 418?”
“아까 저한테 뭐라 그러셨슴까? 저한테 미안하다고 안 하셨슴까?”
“그, 그런 적 없어요!”
“헤헤, 앞으로 저한테 더 잘해주시는 거지 말임다? 안 갈군다고 하셨지 말임다?”
“시, 시끄러워요!”
마침내, 그녀들은 귀환했다.
<계속: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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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글과 추천은 큰 힘을 줍니다!
도배가 될까봐 하루에 둘씩 올렸는데 읽으시는 데 혹 불편하시진 않았는진 모르겠네요.
내일 마지막 에필로그로 찾아뵙겠습니다. 가능하다면 후기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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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어리는 직접 등장하진 않습니다만... | 20.10.20 11: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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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0.20 11:0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