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구덩이 속의 세 B급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16)
2편: 구덩이 속의 네 B급(上)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47)
전편: 구덩이 속의 네 B급(下)(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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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네 바이오로이드는 이 지하 공동에서 가장 밝은 공간인 재배지로 돌아왔다. 사실 굳이 거기에 들를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쿠아가 들르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그녀들은 잠시 거기에 머무르며 숨을 고르기로 했다.
“거, 조금만 생각하면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다들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지 모르겠슴다”
아까 전부터 브라우니가 자꾸 능글거려서 레프리콘은 병영부조리가 심각하려 마려웠다. 브라우니는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상병님도 말임다, 조금 더‘생각’이란 걸 하고 사시지 말임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브라우니에게, 그 오르카 최고의 바보에게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걸로 핀잔을 듣다니, 쥐구멍이 필요하다. 조온나게 큰 쥐구멍이. 어, 따지고 보면 여기도 일종의 쥐구멍이잖아? 레프리콘은 갑자기 잠시나마 지상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졌다.
하지만 어쩄든 브라우니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아쿠아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대피소를 나갈 수가 없다. 그녀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고, 이곳을 지킬 의무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침입한 사악무도한 범죄자 바이오로이드들’이 ‘비열하게도’ 불쌍한 아쿠아를 ‘납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건 아쿠아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무력한’ 아쿠아는 결코 자기가 원해서 임무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사악한 바이오로이드의 악랄한 범죄에 의해 ‘타의로, 그리고 강제로’ 대피소를 나간 것이 된다.
물론 지금이 멸망 전이었다면 그 즉시 사방에서 정부 혹은 기업의 시티가드가 달려오고 몽구스 팀이 몰려오고 무장한 AGS들이 출동해서 감히 인간님들의 ‘재산’을 강탈한 이 무모한 세 B급들을 순식간에 벌집으로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멸망 후의 세계에서는 그녀들을 잡으러 올 정부도, 기업도, 천인공노할 바이오로이드들의 범죄에 경악하여 항의할 인간도 없다. 아니, 딱 한 명 있긴 하다. 오르카에 말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인간인 사령관은 바로 그렇기에 아쿠아에게 명령하여 그녀의 속박을 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명령권자이기도 하다. LRL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그녀들이 할 일은 아쿠아를 ‘납치’해서 대피소 바깥으로 탈출한 다음, 사령관에게 부탁하여 아쿠아에게 주어진 임무를 해제하는 것이다.
“아아, 이쯤 되면 저도 차기 분대장감 아님까? 다음 진급 때 중대장님께 말 좀 잘 해주셔야 하지 말임다?”
“......”
그래서 그녀는 부하의 놀림에 대꾸하는 대신에 밭에 들어가 식물들에게 말을 거는 아쿠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레아, 다프네, 드리아드 언니들”
아쿠아는 속삭이며 감자와 콩의 잎을 어루만졌다.
“아쿠아는 이제 떠나. 그동안 나 먹여 살려 줘서 고마웠어”
식물들이 바이오로이드의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다. 그러나 아쿠아에게는 의미가 각별한 작물들이다. 남들 보기엔 콩과 감자에게 이름까지 붙여가면서 말을 거는 것이 우스워 보일지 몰라도, 백 년도 넘는 시간 동안 이 아이를 이 심연 속에서 살아남게 해 준 존재들이다. 세 바이오로이드가 오기 전 이 아이의 곁에 있어 준 유일한 살아 숨쉬는 것들이다. 이 지하 속에서 그녀 외에 살아 있고, 살아 보겠다며 함께 발버둥치던 유일한 생명체들, 토미 워커가 꺼진 이후 아쿠아가 이들을 유일한 말상대 삼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외롭고 고독한 지하에서 그녀가 미치지 않기 위해, 마지막 정신줄을 붙잡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언니들만 남겨놓고 떠나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이게 내 마지막 기회야”
"......"
당연한 말이지만 식물이 대꾸해줄 리는 없다. 그것들에게는 떠나는 아쿠아에게 섭섭해할 감정도 그녀를 원망할 지능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파리에 이마를 대며 수십년간의 유일한 친구들에게 마지막 심정을 토로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식물들은 최고의 말상대일 것이다. 가만히 들어 주기만 하니까.
“근데 불안해. 언니들, 나, 무서워. 나갈 수 있을까? 바깥 세상은 어떨까? 바깥엔 더 이상 인간님들이 없대. 그럼 나, 나가서 뭘 하면 되지...?”
"......"
이 지하 볼트를 빠져나간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다면 거짓말이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꿈을 꿀 때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하늘이라는 것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석양이라는 것이 정말 그렇게 예쁠까. 구름이라는 건 정말 그렇게 몽실몽실한 게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는 걸까. 태양이란 건 정말 가장 밝은 전구보다 더 밝을까. 농업용 모듈에 저장된 지식(기상 관련)으로만 알고 있는 것들,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것들. 바깥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아쿠아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견고한 대피소는 그녀의 보금자리인 동시에 가장 튼튼한 감옥이기도 했고, 인간님들의 명령은 그녀를 단 한 발짝도 대피소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포기하고 있었다. 이곳이 그녀의 직장이라고, 이곳이 그녀의 운명이라고, 이것이 그녀의 삶이라고. 여기에 행복이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저 위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언니들이 그녀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한다. 여기서 나가게 해 주겠다고, 바깥으로 데려다 준다고 말이다. 기쁘지만, 그러나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기회에 두렵지 않다면 그것 역시 거짓말일 것이다. 언젠가 무너질 대피소 아래에서 최후를 기다리던 아이에게 갑자기 행운이 찾아온다면, 그 난데없는 행운이 너무 지나칠 정도로 쉬운 장밋빛 이야기를 속삭인다면, 당연히 의심스럽고, 또한 두렵기 마련이다. 풀잎들에게 말을 거는 아쿠아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떨렸다.
“언니들, 나, 나, 살 수 있겠지...? 나갈 수 있겠지?”
“.....”
“응? 나, 나가서 행복할 수 있겠지? 내가, 아쿠아가 할 일들이 있겠지? 응, 그럴 거야. 나, 난, 난...”
아무 말도 없는 - 당연히 식물은 입이 없다 - 식물들의 줄기에 속삭이며, 아쿠아는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욕망을 마침내 꺼내놓았다.
“.....살아남을거야. 살아남아서, 행복해질 거야. 꼭...”
식물들만큼이나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프리콘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비행장비의 볼트를 조이는 샌드걸을 바라보았다. 아쿠아가 작물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사이, 그녀는 자재창고를 샅샅이 뒤지며 파손된 자신의 비행장치를 수리할 만한 도구와 물자가 없는지 찾아다녔다. 겸사겸사 혹시 보존된 담배가 있는지도. 결과는 그다지 고무적이지 못한 것 같았지만. 레프리콘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음, 별 성과가 없군요. 교체할 수 있을 만한 규격에 맞는 부품도 얼마 없고, 성한 것도 얼마 없어요. 아마도 오래되어서 쓸만하게 남은 것이 없는 거겠지요.”
“수리가 잘 안 됩니까?”
“네, 더구나 전 그렘린이나 포츈 같은 전문 정비사도 아니니까요. 으음, 부스터 두 개 중 하나는 어떻게든 수리해 볼 수 있을 거 같은데...다른 하나는 무리입니다. 작동하게 만든 부스터 하나도 출력 조절이 안 되니, 이걸로 비행은 힘들겠군요”
“그럼 그건 여기 두고 가실 건가요?”
“아니오. 부스터 안에는 연료가 소량 남아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쓸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레프리콘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아쿠아가 밭에서 나왔다. 그녀는 아쉬운 듯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그 동안 이 깊고 어두운 지하를 한구석이나마 희미하게나마 밝혀 온 이곳의 불도 영영 꺼지리라. 아쿠아를 지금까지 살아있게 해준 콩 다프네도, 감자 드리아드도 어둠 속에서 시들어 가리라.
“언니들, 이제 가 볼게. 미안...”
아쿠아는 작게 뇌까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일부러 쾌활하게 웃으며 세 바이오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자, 악랄한 범죄자 납치범 언니들, 그러면 이제 가 볼까?”
브라우니가 씩 옷고서는 아쿠아를 안아들었다.
“그럼 아쿠아, 지금부터 당신은 저희 인질이지 말임다”
“음, 어, 비명이라도 질러야 하나? 반항하는 척이라도 해야 좀 그럴듯하지 않아?”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게 뭔 상관임까”
“그건 그래. 히힛”
이윽고 네 바이오로이드는 잠들어 있는 소형 토미 워커 앞에 섰다. ‘소형’이라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원본 토미 워커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보통의 바이오로이드보다는 훨씬 컸다. 레프리콘은 브라우니의 도움을 받아, 수십 년 동안 방치되어 있던 전력선을 토미워커에 연결했다.
“연결했어요!”
“알았어. 거기 있는 배전판을 다 끄고 톰이랑 이어진 선만 살려. 그리고 발전기 출력을 최대로 올려. 브라우니 언니는 톰에게 연료는 다 채웠어?”
AGS는 전력으로도 움직이지만, 구형 하이브리드 AGS인 이 물건의 내부 발전기를 돌리고 부속 장비를 가동시키려면 연료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전력이 태부족한 지금, 이번 이후로 이 AGS에게 추가 전력을 보급해 줄 기회는 없다. 이 이후로는 남은 축전지와 내장된 발전기를 통해 연료를 자체적으로 전력으로 전환시키는 방법 밖엔 수단이 없다.
“아까 연료실에 남아 있는 건 다 채웠슴다. 그게 담까?”
“...그래. 이제 더 없어. 언니는 이게 축전지 다 가져온거야?”
“네. 이게 남아 있던 전부입니다.”
샌드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한가득 안고 온 축전지를 급조한 수레에 실었다. 전력선을 통한 충전이 다 끝나고, 토미 워커를 주차장으로 이동시키게 되면 이제 이 축전지와 연료외에는 여분의 전력 충전 수단이 없다. 이것이 이 지하에 남은 최후의 에너지 전부다. 이것이, 마지막 불씨다.
“좋아, 그럼...”
아쿠아는 약간 초조한지 손가락을 꼬며 입술을 꼬물였다. 수십년 만에 잠든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이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데 제대로 움직일까? 수십년 동안 정지한 메모리가 제대로 복구될까? 톰이....나를 기억할까? 그녀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차단기 올리고 전원 연결해.”
우웅 - 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사방이 어두워켰다. 치칙, 픽 - 소리와 함께 안 그래도 어둑어둑하던 조명들이 더더욱 까무룩해지더니 두어 번 깜빡 깜빡 하던 것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꺼졌다. 식물들이 자라게 해 주던 재배시설의 불빛도 푹 꺼지며 사방이 깊고 깊은 암흑 천지에 잠겼다. 오로지 느낄 수 있는 감각이라고는 어둠 속에서 서로 잃어버릴까 봐 손을 맞잡은 네 바이오로이드의 온기와, 미친 듯이 둔중한 소음을 울리며 돌아가는, 오래되어 마모되기 직전인 발전기 터빈의 소리, 그리고 거기서 오는 낮은 진동 뿐이었다. 넷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게 정말 마지막 남은 전력인데. 혹시 이 AGS, 고장나서 영영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우리 모두가 공연히 헛수고한 건 아니겠지. 최대 출력으로 마지막 모든 힘을 쏟아내는 저 발전기, 중간에 망가지진 않겠지. 충전 제대로 되고 있는 거겠지, 일이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밀폐된 공간, 그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갇혀 있다는 걸 느끼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절망이 마치 독버섯처럼 스멀스멀 코어를 타고 기어오르는 법이다.
덜컹,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이 흐르고 - 어두워서 더욱더 억겁 년처럼 느껴졌던 건지, 아니면 정말 시간이 꽤 흐른 건지 - 터빈이 멈추는 소리가 났다. 최대 출력으로 한계까지 돌아가던 수력발전기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탈이 난 것 같았다. 레프리콘과 샌드걸은 사전에 토미 워커가 충전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계산했고 실제로 토미 워커의 흙먼지투성이 하부 콘솔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충전계는 다행히 전력이 만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계기판에 오류가 난 게 아니라면 이제 더 이상 전력을 채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 일어나라, 일어나라, 발전기도 고장났으니 더는 뒤가 없다. 제발....
띠링~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극한의 어둠 속에서 조그만 헤드라이트 불빛이 들어왔다.
“토미 워커 light, 가동. 지게차 기능, 기중기 기능, 굴삭기 및 불도저 기능 가능. 볼트 A1003 특별 사양으로 드릴 모듈 장착.”
“꺄아악! 됐다!! 움직인! 드아아아!!”
레프리콘과 브라우니는 서로 얼싸안고 기뻐서 거의 비명 같은 환호를 지르며 빙글빙글 돌았다. 샌드걸은 브라우니는 몰라도 레프리콘 당신마저 그렇게 감정적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 - 어차피 어두워서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 을 지었고, 아쿠아는 쌓인 돌조각과 흙먼지를 털어내며 육중하게 일어서는 토미 워커 앞으로 머뭇머뭇 다가갔다.
“저...토...톰...? 나...자, 작물 재배기기..,아쿠안데...기억나? ”
토미 워커는 아쿠아 앞에서 침묵을 지켰다. AGS는 얼굴도 표정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토미 워커의 녹색 헤드라이트만 간신히 보이는 상황이었기에 그녀들은 이 로봇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명찰 바코드 인식. 말단 작물재배 기기-농업용수 공급용 장비, 바이오로이드 아쿠아B401호.”
“‘말단’? 아까 꽤 직위 높다고 하지 않으셨...”
“브라우니! 눈치!”
아쿠아가 고개를 떨구자 레프리콘은 조금 전까지 가슴 맞대고 기뻐하던 브라우니의 등짝을 스매시했다. 그렇구나. 메모리가 지워졌나 보구나. 하긴 가동을 정지하고 수십 년이나 지났으니...아쿠아는 조금이나마 기대한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난, 뭘 기대하고...
“....자칭 ‘최고 농업 담당관’. 용케도 아직 살아있음. 그간 ‘행복’은 찾았는지?”
아쿠아의 머리가 광속으로 다시 솟구쳤다.
“톰? 나...나 기억해?”
“소속이 다른 AGS를 제멋대로 부하 취급. 지치지도 않고 불필요한 대화 시도하는 미친 바이오로이드. 맨날 행복 타령.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음.”
말 자체는 어째 나이트앤젤 저리가라 할 독설처럼 들렸지만, 샌드걸은, 전혀 근거는 없지만, 어둠 저편에서 토미 워커가 씨익 웃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니, AGS는 웃을 수 없다. 그러니 아마 그녀의 착각일 것이다. 어쩌면 아쿠아가 너무 기뻐서 방방 뛰는 것 때문에 괜히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톰! 톰! 반가워! 보고 싶었어! 이게 얼마 만이야!”
“41년 3개월 17일 5시간 20분 33초만임. 주변의 새 바이오로이드 감지. 신원 확인 불가. 새 ‘부하’인가?”
“어....응! 맞아! 내 부하들!”
브라우니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네? 아니 아쿠아 그게 무슨 소림까!”
“아, 음음, 미안, 허세 좀 부려보고 싶었어. 어, 톰, 그러니까. 이 언니들은 내 납치범이야.”
이번엔 토미 워커 측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것도 샌드걸의 상상이다. AGS는 표정을 지을 수 없다니깐. 그러나 그녀는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토미워커의 헤드라이트에서 수십 개의 물음표가 떠오른 것 같다는 착각을 느꼈다. 하기야 뭐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상상은 자유 아닌가.
“저기, 아쿠아, 조금 추가 설명을 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안 그러면 토미워커가 진짜로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아, 음음, 그렇지. 그러니까 말이지....”
아쿠아가 자신의 상황을 톰에게 설명하는 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딱히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는 AGS가 그 설명을 이해했다는 제스처를 취하진 않았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AGS답게 그, 아니 그것은 아쿠아의 기나긴 설명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해함. 최고 농업 담당관, 대피소A1003에서 철수 희망. 철수 권한 획득 실패. 대안으로 로리콘 아동유괴범 고용. 철수 작업에 본 개체 필요.”
“으, 응, 로리콘도 고용한 것도 아니지만...아무튼...도와 줄 수 있어?”
다시 한 번, 네 바이오로이드는 AGS의 눈치를 보았다. 따지고 보면 대놓고 범죄를 저지를 것을 선언하고 거기에 동참할 것을 종용하는 모양새다. 아쿠아는 어쨌든 이 대피소의 소유 재산이고 - 그 대피소의 주인인 인간들은 오래 전에 다 죽었지만 - 그걸 약취하는 것은 인간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도둑질이다. 엄연한 범죄다. 어찌 보면 인간에게 봉사하는 AGS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안하무인의 노예들에게 드릴을 휘두르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일단 이 대피소 소속도 아닌 이 ‘톰’이 인간도 아닌 바이오로이드의 요청을 들어 줘야만 할 의무도 없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톰이 드디어 입을, 아, 아니 스피커를 열었다.
“최고 농업 담당관, 이제야 겨우 나갈 의사 표명. 해당 의사결정까지 소요된 기간, 측정 불가. 결론: 바이오로이드는 능지가 낮음.”
“엑! 그게 무슨 소리야!”
빽뺵거리는 아쿠아만을 제외한 세 바이오로이드는 서로 마주보았다. 원본 토미 워커는 무미건조하고 무감정한 대형 건설로봇이다. 감정이 없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단순한 건설로봇이니까, 굳이 정교한 감정 모듈을 설치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까 전부터 느끼던 거지만, 셋이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이 ‘톰’은 원본과 달리 의외로 꽤...아니 상당히 감정 표현이 풍부해 보였다. 그래서 그 샌드걸조차 이 AGS의 예상외의 반응에 약간 떠듬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표현이 꽤 신랄하군요. 혹시 우릴 돕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최고 농업 담당관. 지난 기간 중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생산적인 대화 무한 반복. 본 개체의 시간낭비 막대. 해당 과정 중 바이오로이드의 화법과 사고방식 학습. 도무지 쓸데없음.”
그러나 여기서 톰은 약간 뜸을 들였다. 웬지 몰라도 샌드걸은 AGS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얼굴을 붉혔을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최고 농업 담당관. 이 지하에서 본 개체에게 유일하게 긍정 피드백을 해줌. 기쁨, 즐거움, 안도감 반응 제공. 본 개체에 유효한 보상. 유효한 피드백 제공자에게 협조 제공은 골든 워커즈의 마케팅 전략.”
네 바이오로이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톰은 뒤이어 퉁명스럽게 - 이 역시 착각일 것이다. 토미 워커 AGS는 말투에 기복이나 억양 따위 없다 -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납치범으로 인식하는 경우. 범죄 행위. 도울 수 없음. 따라서 현 시간부로 해당 바이오로이드 개체들을 최고 농업 담당관 예하의 부하 개체들로 인식. 인식표: ‘노예’”
“.....저기, 다른 표현은 없었습니까?”
“어린아이 - 백 살 넘었지만 어린아이임. 아무튼 어린아이임- 를 납치하는 페도필리아 이상성욕자들. 노예란 표현도 아까움.”
“그러니까 그거 아닌데요....”
“상병님, 지금 저 AGS 우리 놀리는 거 아님까?”
“오해. 본 개체는 감정 모듈이 없음. 하. 하. 하.”
“아무리 봐도 감정 만땅인 것 같슴다!”
어쩐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을 데려가려 온 도둑놈 같은 예비 사윗감에게 장인어른 될 영감이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역시 샌드걸의 착각일 터이다. 결혼이란 게 이 땅에서 사라진 지 백 년이 넘었다. 아니, 장인어른이고 사위고 그 역할을 해 줄 인간도 이제 없다. 그리고 애초에 여성형 바이오로이드인 그녀들은 ‘남의 딸 뺏으러 간 사위’가 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방도도 없다.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좀 더 고찰해보기도 전에, 톰은 그 거체를 일으키며 딱딱하게 말했다.
“전력 낭비할 시간, 없음. 이동.”
쿵, 쿵. 원본 토미 워커보다 절반 정도의 무게라고 해도 이백 톤은 가뿐히 나가는 무게다. 오랜 세월 동안 몸체에 쌓인 흙과 돌부스러기를 털어내며 톰이 발걸음을 옮기자 육중한 울림과 함께 땅이 울렸다. 안 그래도 불안정하다고 아쿠아가 걱정한 이 지하 공동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아쿠아는, 다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이제는 어둠에 휩싸여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오랜 터전을 되돌아보았다. 저 어둠에 휩싸인 저편 어딘가에, 백여 년 동안 그녀를 먹여살려 준 재배시설과, 백여 년 동안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가꾼 그 모든 것들, 그녀가 살아온 그 모든 증거들이 있으리라.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버렸다. 마지막 가능성을 위해.
이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순 없다.
“최고 농업 담당관, 안 감?”
톰의 재촉에 아쿠아는 자신의 손을 잡은 레프리콘을 잠시 바라본 후, 몸을 돌렸다.
“그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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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서 일하느라 늦었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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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조금 더 길어집니다 | 20.10.17 23: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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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미(혹은 예능감)있는 AGS를 표현해보고 싶었는데 잘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ㅎㅎ | 20.10.18 01:0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