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구덩이 속의 세 B급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16)
2편: 구덩이 속의 네 B급(上)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47)
3편: 구덩이 속의 네 B급(下)(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448)
4편: 구덩이 속의 네 B급, AGS 하나(上)(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559)
5편: 구덩이 속의 네 B급, AGS 하나(下)(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560)
전편: 구덩이 속의 네 B급, AGS하나, 그리고 철충 한 마리(上) (https://bbs.ruliweb.com/game/84992/read/76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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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뒤로 밀려나던 톰이 드디어 자신이 파던 막다른 벽에 다다랐다. 토터스는 어쩐지 톰을 깡그리 박살낼 생각까지는 없어 보였고, 그래서 톰은 샌드걸과 아쿠아에게 의외로 토터스를 상대로 분전하며 꽤나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톰이 휘두르는 콘크리트 뭉둥이가 꽤나 아팠는지, 놈은 쉽게 접근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톰이 반항하게 내버려 둘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금이 가던 그 몽둥이가 토터스의 외장 장갑보다 먼저 부러지자, 더 이상 토터스로부터 톰을, 그리고 톰이 지켜주던 두 바이오로이드를 지켜 줄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때였다. 토터스가 움찔했다. 놈의 후방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샌드걸은 레프리콘이 섬광을 일으키며 그녀의 경기관총을 쏘아대는 것을 발견했다. 아까 전에도 그랬다시피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잠시 토터스의 시선을 끌어낼 수는 있었다.
“지금입니다! 418번, 빨리!”
요란한 총성과 함께 레프리콘이 토터스의 주의를 끄는 사이, 그녀의 사격으로 엄호를 받으며 브라우니가 돌진했다. 그러나 그녀는 토터스를 향해 사격하는 대신 놈의 다리에 매달려 낑낑대면서 놈의 위로 기어 올라갔다. 별로 아프진 않지만 요란한 총소리와 몸에 부딫히는 총탄은 거슬렸는지, 토터스는 관심을 레프리콘에게 돌리느라 한동안 브라우니를 신경쓰지 못했다.
“빨리 올라가요, 418번! 오래는 시선 못 끕니다!”
“그러면 저랑 상병님이랑 역할 바꾸지 말임다!”
“키는 그 쪽이 더 크잖아요!”
“4cm차임다! 그리고 키 크면 등산 잘 한다고 누가 그럼까?”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올라가겠지요!”
토터스의 덩치에 시야가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샌드걸은 저 브라우니가 드디어 미쳤나고 생각했다. 브라우니란 게 바보인 건 원래 오르카 안에 유명했지만, 미치기까지 했던가? 그러나 샌드걸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브라우니는, 뭐 무거운 거라도 들고 있는지 토터스의 움직임에 따라 불안하게 위태롭게 비틀거리고 휘청거렸음에도, 마침내 토터스의 등 위에 다다랐다.
“후방주의다, 새꺄”
패배자가 돌아왔다. 실패자가 돌아왔다. 버려진 자가 돌아왔다. 복수심에 불타서.
놈의 후방, 등 위에서, 마치 고산준봉의 정상에 다다른 위대한 등반가마냥, 그녀는 득의만면한 표정을 짓고 거칠게 내뱉었다.
“안녕, 오랜만이다, 이 씹1새1끼야”
모든 브라우니는 군인이다. 브라우니는 군인으로 태어났고 적으로 규정된 자를 죽이기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그녀들은 B급이고 레벨이고 힘의 강약이고와 상관없이, 적 앞에서 그 누구보다 잔인해진다. 어둠 속에조차 서늘하게 빛나는 그 표정만큼은 이게 평소의 그 쾌활한 오르카 바보가 맞나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악귀 같이 일그러진 그 얼굴로 어둠 속에서 토터스의 후방 장갑에 난 균열과 깨지고 파손되어 떨어져 나간 장갑재를 더듬어 찾았다. 토터스는 팔을 뻗어 브라우니를 떨쳐내려 했지만, 파손된 놈의 관절부는 자신의 머리 위를 털어내는 것을 불가능케 했다. 대신 놈은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댔지만, 브라우니는 요동치는 놈의 등 위에서 손가락에 피가 맺히도록 악착같이 붙잡고 버텨냈다.
“어이쿠, 쿠, 좀 가만 있어 봐. 아, 찾았다.”
노출된 놈의 상처 위로 브라우니의 소총이 불을 뿜었다. 그건 정녕 효과가 있었다. 세 바이오로이드가 아무리 화망을 퍼부어도 꿈쩍도 않던 놈이, 장갑이 깨지고 떨어져 나간 틈새 사이에 드러난 야들야들한 속살에 총알이 박히자 작게나마 움찔거린 것이다. 브라우니의 자그마한 소총 사격만으로 놈을 치명상에 빠뜨리는 것은 무리였지만, 놈은 그것이 따갑고 불쾌했는지 등에 매달린 브라우니를 떨쳐내려 날뛰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마치 로데오 경기를 하는 카우보이, 아니 카우걸처럼 그 위에서 심하게 휘청거렸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브라우니는 더더욱 흥분하고 또한 더더욱 즐거워 보였다.
“헤헤, 우리 개1새1끼, 여기가 민감해? 여기가 지스팟이야? 이 누나가 더 화끈하게 해줄게♥”
토터스가 브라우니를 떨어뜨리려고 방방 뛰며 몸을 돌리자, 그제야, 샌드걸은 브라우니가 왜 그렇게 올라가는 것을 힘겨워 했는지,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렇게 위태위태하게 떨어질락 말락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톰에게 채워주려고 준비한 연료통이었다. 그녀는 그것의 뚜껑을 따고 그대로 놈의 머리 위에 들이부었다.
토터스의 온 몸을 타고 연료가 줄줄줄 흘러내렸다. 연료를 흠뻑 뒤집어 쓴 놈의 몸에서 기름이 방울져 떨어졌다. 브라우니가 아낌없이 쏟아부은 가연성 연료는 놈의 장갑재의 부서지고 파손된 그 갈라진 틈을 따라 흘렀고, 놈의 떨어져 나가고 깨져나간 장갑의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휘발성 기름 냄새가 훅 끼쳤다.
“아주 그냥 흠뻑 젖었구만? 흥분했냐?”
그리고 그녀는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뭔가를 꺼냈다.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샌드걸은 그게 뭔지 잘 알아볼 수 있었다. 안드바리가 보급해 준, 발할라의 마크가 새겨진, 자신이 가장 아끼는 금속제 지포(zippo)식 라이터를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지금 브라우니가 뭔 짓을 하려는지도 깨달았다. 아주 제대로 미친 짓이다. 목숨 따위는 내다버린. 그녀는 다급하게 톰에게 소리쳤다.
“톰! 선풍기를 켜십시오! 지금 당장! 최대 출력으로!!”
“이유. 모르겠음. 여기, 안 더움. 그리고, 전력. 불충분. 그거 쓰면 금방 바닥날 것”
“당신은 몰라도 바이오로이드는 유독가스에 질식한다고요! 아쿠아 죽이고 싶습니까?”
“어, 어, 뭐야? 나 죽어? 죽는 거야?”
아쿠아를 언급하자 톰은 군소리 없이 선풍기를 켰다. 동시에 기관총을 갈기던 레프리콘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뛰어내려요, 418번, 어서!”
착, 브라우니가 라이터에 불을 댕겼다. 그녀는 예의 그 악귀 같은 표정으로 마지막 선고를 내뱉었다.
“벌써 헤어질 시간이네. 지옥에서 조뺑이나 쳐라.”
그녀는 손에 든 라이터를, 그대로 토터스의 등으로 툭, 떨어뜨렸다. 라이터가 자신의 손을 떠난 그와 동시에, 그녀는 토터스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동시에, 경기관총을 쏘아대던 레프리콘이 토터스를 향해 약진했다.
“신뢰의 도야아악!!! 상병니이이임!”
“이야아아아!!”
푸확! 떨어지는 브라우니의 등 뒤로 거의 폭발에 가까운 기세로 불길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거대한 불기둥이 되어버린 토터스를 향해, 레프리콘은 날뛰는 놈의 발에 짓밟힐 위험을 무릅쓰고 놈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몸을 날려 떨어지는 그녀의 분대원을 받아내었다....온몸으로.
우당탕!
“꺄악!”
“으아이고! 좀 제대로 못 받슴까!”
“투덜댈 시간 있으면 빨리 뒤로 빠져요! 깔려 죽고 싶어요?”
두 스틸라인 병사는 황급히 서로를 잡아끌고 뒹굴며, 미친 듯이 악을 쓰며 타오르는 토터스의 난동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놈의 무게는 500톤이 넘는다. 불길에 휩싸인 놈의 발에 채이거나 밟혔다간 그냥 아픈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쿵! 하고 방금 그녀들이 있던 자리에 타오르는 놈의 발이 떨어지자 레프리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여기! 빨리 이리로 넘어오십시오!”
우우웅 소리와 함께 엄청나게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톰이 작동시킨 선풍기는 드디어 최대 회전수에 다다라 자그마한 돌멩이나 자갈 따위는 날려버릴 정도의 강풍을 일으켰다. 그것은 불타오르는 토터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검고 매캐한 연기를 그녀들이 있는 반대쪽, 그러니까 저 어둠 저편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 불길에 휩싸인, 붉게 환하게 물든 배경으로 두 스틸라인 병사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토터스가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온갖 발광을 하는 사이, 레프리콘과 브라우니는 바람을 헤치고 토터스의 발길질을 피해 가며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간신히 다른 두 바이오로이드에게 닿을 수 있었다. 레프리콘은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붉은 - 꽤나 그슬린 - 머리칼을 휘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야말로 불타는 지옥도에 빠져 허우적대는 불의 거인이 거기에 있었다.
“헤헤헤, 자아알 탄다”
검댕과 연기로 범벅이 된 브라우니가 코를 쓱 닦으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바로 뛰어내리긴 했지만, 그녀도 열기를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는지 몸 군데군데에 - 예를 들어 연료가 묻었던 손가락이나 다리에, - 화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적이 타오르는 고통을 보는 즐거움에 비하면 얼마든지 견딜 만한 것인 듯했다.
놈의 깨어진 장갑 틈 사이로 스며든 연료는 그대로 타오르며 놈의 금속성 살을 태우고, 놈의 부서진 장갑을 타고 흐르던 연료의 물줄기는 그대로 불줄기가 되어 놈의 연약한 부분을 타고 내려가며 타올랐다. 투둑, 특, 세 군용 바이로로이드가 아무리 쏘아도 부서지지 않던 그 강철의 장갑이, 열기로 부풀어오르고 기괴한 냄새를 풍기며 녹아내리는 놈의 살점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외계에서 온 강철의 괴물을, 광폭한 화마(火魔)가 잠식하며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화마는 놈을 태우면서 유독할 것임이 명백한 시커면 연기 - 지하의 어둠에 가려서 잘 분간이 가지를 않는 -을 토해내었지만, 톰의 선풍기가 일으킨 바람은 그것을 저 어둠 저편으로 날려보냈다.
“지하 채굴용 AGS들은 으레 작업 중 나오는 분진을 처리하기 위한 대형 선풍기가 있지요. 그걸 어떻게 짐작했습니까?”
“네? 몰랐는데요. 그렇습니까?”
“.......”
샌드걸은 당신들 방금 우리 모두를 이 밀폐된 지하에서 유독가스에 질식시켜 죽일 뻔했다고 소리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대신 그녀는 발버둥치며 날뛰다가 톰, 그러니까 그녀들 쪽으로 다가오려는 불타는 괴수를 향해 기관총을 장전했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합시다”
그건, 그녀들에게 ‘다음’이 있을 거라는 희망찬 이야기였기에 레프리콘은 싱긋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병사 바이오로이드 역시 장교를 따라 기관총과 소총을 고쳐 잡았다.
“우우, 손가락 부었슴다. 방아쇠 당기기 힘듬다”
“살아 돌아가면 연대장님께 포상휴가 달라고 건의해줄 테니까 쏴요, 418!”
“그건 포상휴가 없어도 그렇게 할 검다”
다시 한 번, 세 바이오로이드의 총포가 동시에 화망을 퍼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불길은 놈의 살을 태우고 녹여 장갑재를 떨어뜨렸고, 놈에게는 더 이상 바이오로이드들을 절망케 하던 그 두꺼운 장갑이 없었다. 열기로 녹아내리고 으스러진 놈의 연약한 속살에 박히는 총탄들은 이번에는 확실히 놈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게 분명했다. 불길 속에서, 그리고 무자비한 총탄의 소나기 속에서 허우적대는 놈을 보자 연민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아마 너도 여길 나가고 싶었겠지. 너도 살고 싶었겠지.
그러게 이 지하에서 왜 공격을 했는지. 인간도 없는 여기에서까지 서로 싸워야만 했을까.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감상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녀들은 불덩이가 된 토터스가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쓰러뜨리려고 모든 화망을 집중했다.
“다가오지 마! 얌전히 혼자 뒈지라고! 우린 살 거다!”
지하를 가득 울려서 귀청이 먹먹해질 정도의 - 나중에 오르카에 돌아가면 아마 반드시 청각검사를 받아봐야 할 거다 - 소음과 함께 총탄들이 놈의 몸에 속절없이 박혔다. 꺼져가는 불길이 놈의 흉측한 몰골을 그대로 드러내어 주었다. 장갑 사이로 흘러들어간 연료를 따라 타오른 불길은 놈의 장갑을 부수고 그 안의 끔찍한 형체를 드러냈다. 자욱한 연기를 뭉게뭉게 피워올리며 역겨운 냄새를 풀풀 풍기는 그것은 말 그대로 죽어가는 흉믈 그것이었다. 마침내 놈은 누적되는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그녀들의 발치 앞을 몇 미터 남겨두고 심하게 휘청거렸다.
“으아아아- 피하십쇼, 중위님!”
세 바이오로이드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그게 그녀들의 사격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비틀거리던 놈은 그녀들의 집중 사격을 받고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듯 온몸을 뒤틀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놈은 그대로 균형을 잃고 그녀들의 발 앞에 쓰러졌다. 쿵. 온몸에서 매캐한 매연을 자욱히 뿜으며, 숯덩이가 된 철충은 마치 썩은 나무토막마냥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우, 우리, 정말 놈을 잡은 겁니까?”
틱, 틱, 레프리콘은 확인사살을 위해 방아쇠를 당겨 보았지만 더 이상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샌드걸도 브라우니도 그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총알이 다 떨어진 것이다. 뭐, 미동도 하지 않는 놈의 상태로 보아 추가 사격이 필요해 보이진 않았지만.
“하, 하, 아하하, 중대 애들에게 말해줘도 아무도 안 믿을 검다! B급 셋이서 이놈 잡은 거 믿겨지심까?”
“바이오로이드 브라우니. 톰을 잊지 말 것. 너네는 따까리.”
“이놈에게 불지른 건 점다”
그녀들, 아, 그리고 톰은 토터스를 사살했다. 드디어 한참 전 저 위에서부터 시작된 놈과의 기나긴 악연이 끝난 것이다. 레프리콘과 브라우니는 그만 긴장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하아, 하아, 해냈군요. 우리 결국 해냈어요...”
온 몸이 그슬리고 지하의 어둠만큼이나 시커멓게 변한 두 스틸라인 병사들에게 샌드걸이 비틀비틀 다가갔다.
“당신들 자1살 희망자입니까?”
“그럴 리가요.”
“까닥하면 당신들도 타죽을 수 있었습니다. 깔려 죽었을 수도 있고요. 죽고 싶은 게 아니면 그런 미친 짓을 왜 합니까?”
레프리콘과 브라우니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서만큼은 둘의 생각이 일치했다.
“어...스틸라인이라서요?”
그녀들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임이 확실했지만, 샌드걸은 처음 이 구덩이에 떨어졌을 때 브라우니의 말이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눈앞에 도래했을지라도, 마지막까지 굴하지 않고 서서 죽는 것.
모두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절망하고 포기할 때, 바보같이, 미1친놈 같이, 그 죽음 앞에 서서 정면으로 맞서는 것,
기나긴 인류 역사 동안 수많은 생명을 헛된 개죽음 속에 몰아넣었지만, 비열한 위선자들에게 수없이 악용당했지만, 수많은 인간을 광기와 독선에 몰아넣었지만, 차마 눈 뜨고 못 볼 실수와 아집, 그리고 죄악의 발로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또한 동시에, 유구한 역사 동안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키고, 위대한 영웅을 낳고, 불멸의 업적을 남기며,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 무수한 타인의 생명을 구해 오기도 한, 바로 그것.
인간의 한 단면.
샌드걸은 스틸라인이 대표하는 바로 그 인류의 한 단면이 과연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지금은 평가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토터스를 잡았다는 것이니까. 그래, 그 강력한 철충 군단의 토터스를 지금 저렇게 쓰러져 꿈틀거리는 꼴로 만들어 놓은...꿈틀?
토터스의 불타올라 부서진 머리 부분이 꿈틀거리더니 파삭, 하고 꺠어졌다. 거기서 튀어나온 철충 기생체가 튀어올라 아쿠아에게 달려든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쿠아!”
세 바이오로이드는 황급히 사격을 하려 했지만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들은 탄약이 바닥났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아차.
당황한 표정을 지은 무방비의 아쿠아에게, 철충 기생체가 특유의 괴상한 소음을 내뿜으며 돌진했....
으직.
기생체 최후의 발악은 톰의 육중한 다리 아래서 짓뭉개지고 말았다. 톰은 철충이 가루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듯 놈을 밟은 그대로 땅바닥에 그 발을 비볐다.
“이게 철충? 역겨워. 쓰레기 같은 짓만 가득하잖아. 이 벌레 제정신인가?”
“....도대체 그런 말투는 어디서 학습한 겁니까?”
“최고 농업 담당관.”
“나 아냐!”
떄아닌 모함(?)에 아쿠아가 항의했지만 톰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어쨌든 철충 기생체의 위협마저 사라지자 언제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며 염세적인 샌드걸도 이제야 마음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후우...어쨌든...이제 작업을 재개하면 되겠군요. 톰, 연료 필요합니까? 전력은요?”
“연료, 필요없음. 전력, 필요없음. 방금 전 행위를 마지막으로 모든 연료 소모. 팔만 겨우 가동.”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연료를 다 썼는데 필요없다뇨.”
문득, 샌드걸은 톰의 헤드라이트가 유난히 붉고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것도 나의 착각인가? 그러나 톰이 자신의 뒤편을 가리키며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말을 잇느라 그녀는 더 생각을 잇지 못했다.
“작업 중 틈새 발견. 틈새, 지속됨. 점점 넓어짐. 추가로 넓혀 놓았음. 노예들, 통과 가능. 초음파 스캔 결과 앞쪽에 빈 공간 발견. 바람 나오는 것 감지. 추측. 아마 바깥.”
“그럼 추가 작업이 필요 없다는 겁니까?”
“아님. 지반 여전히 불안정. 틈새 좁음. 나가는 데 고생 필요. 행운 필요. 잘 해내길 바람”
“그럼 계속 작업해야죠. 잘 해내길 바란다뇨, 그게 무슨....”
말이 너무 빨라 순간 못 알아들을 뻔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샌드걸은 톰이 기생체를 짓밟은 다리가 정체불명의 금속성 물질, 마치 검은 곰팡이와 비슷한 물질로 뒤덮여 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저 바깥에서 철충들을 상대해 온 세 바이오로이드들은 그 금속성 곰팡이 같은 물질이 뭔지 너무나 잘 알았다.
“오, 안 돼”
그제야 그녀들은 왜 토터스가 고집스럽게, 우악스럽게 톰에게 다가가려고 그렇게나 발악했는지 꺠달았다. 왜 톰을 한 방에 고철로 만들려 들지 않았는지도.
1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AGS인 톰은 철충 감염에 취약하다.
이 통로에 나타났던 처음부터, 놈은 부서지고 고장나 있던 원래의 몸을 버리고 톰을 침식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놈은 방금 그걸 성공했다.
톰은 자기에게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철충이 자신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에 설명을 마저 끝마치기 위해 톰의 음성 재생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본 개체, 더 이상 도움 제공 불가. 일할 수 없음. 동행 불가. 깊은 유감.”
“토, 톰?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아쿠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최고 농업 담당관을 데리고 나갈 것. 빨리. 어서.”
그건 브라우니조차도 이해할 수 있을 상황이었다. 아니, 이해를 못 하는 건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쿠아뿐이었다. 브라우니는 아쿠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 브라우니를 보고 톰이 뒷말을 이었다.
“노예들. 아쿠아를, 잘 부탁함.”
톰의 헤드라이트가 더더욱 심하게 떨렸다. 톰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철충의 징그러운 물질, 아마도 놈의 금속성 체조직, 신경조직, 외피 조직일 것들이 마치 곰팡이처럼 톰의 동체를 뒤덮어 갔다. 지금 톰은 마지막까지 침식에 저항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곧 한계에 다다를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지금 총도 없는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고 톰도 그걸 알았다. 점점 감염되어가는 톰의 코어는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찾았다. 톰은 아쿠아를, 오랜 세월 동안 그와 함께 했던 동료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혹은 그것은, 딸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표정 같기도 했다. 아니다. 이번에도 샌드걸의 착각일 것이다. AGS는 표정을 지을 수 없다.
“아쿠아. 꼭. 행복을, 찾기 바람.”
그리고 톰은 난폭하게 터널의 벽면을 후려쳤다. 터널을 지탱하고 있던 바위들이 쩌적, 하고 금이 갔지만 톰은 멈추지 않았다. 쩌-억 하고 불길하리만큼 커다란 소리와 함께, 톰이 가리켰던 바위의 틈새가 더 넓어졌다. 틀림없이 지반을 불안정하게 하는 행위임이 분명했지만, 톰에겐 시간이 없었다, 그는 미친 듯이 통로의 벽과, 통로를 지탱하는 바위들을 후려쳤다. 결국 바위들이 부서지더니, 바위들이 지탱하던 지하의 육중한 천장들, 바위와 잡석으로 가득찬 그 심연의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톰! 톰! 안 돼!”
작별 인사를 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샌드걸은, 레프리콘은, 그리고 발버둥치는 아쿠아의 허리를 나꿔챈 브라우니는 무너지는 갱도, 아니 갱도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좁은 바위 사이의 틈새로 냅다 뛰어들었다. 그리고 내달렸다.
우르르, 와르르. 쏟아지는 흙과 돌덩이의 폭포 속에서, 톰의 헤드라이트가 마지막으로 깜빡였다.
“행복해지길.”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타이런트에나 비교될 만한 크기의 바위들이, 그 무게를 가늠할 수도 없을 무수한 대자연의 뼈대들이, 대지의 분노들이, 무정하게, 그리고 사정없이 톰을 덮쳤다.
<계속: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76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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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반도 넘어서 종막으로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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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아를 언급하자 군말 없이 선풍기를 켜는 거도 그렇고, 항상 최고 농업 담당관이라고 부르다가 마지막에 바이오로이드라는 접두사도 떼고 아쿠아라고 불러주는 데서 톰이 아쿠아를 각별히 신경썼다는 걸 표현하고자 했는데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군요
(IP보기클릭)211.44.***.***
음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그것도 좋은 해석이고. 역시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의 해석에 맡겨도 재밌는 거 같습니다.
(IP보기클릭)221.154.***.***
(IP보기클릭)211.44.***.***
B급 주제에 겁없는 게 열혈 자코 같아서 귀엽지 않습니까 | 20.10.18 19:09 | |
(IP보기클릭)58.227.***.***
(IP보기클릭)211.44.***.***
아쿠아를 언급하자 군말 없이 선풍기를 켜는 거도 그렇고, 항상 최고 농업 담당관이라고 부르다가 마지막에 바이오로이드라는 접두사도 떼고 아쿠아라고 불러주는 데서 톰이 아쿠아를 각별히 신경썼다는 걸 표현하고자 했는데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군요 | 20.10.18 19: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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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 부분 토미워커가 철충에 잠식당하면서 본인의 사고가 힘들어져 단순해지다보니 직위같이 어려운 명칭을 기억 못하고 부르기 쉬운쪽으로만 떠올릴수있어 바뀐거라 생각했는데 감정을 담아 일부러 그렇게 불러준거였군요. | 20.10.18 22:11 | |
(IP보기클릭)211.44.***.***
음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그것도 좋은 해석이고. 역시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의 해석에 맡겨도 재밌는 거 같습니다. | 20.10.18 22:5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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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부분에서 약간 애먹었답니다 ㅎㅎ;; | 20.10.18 22:5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