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으시시한 괴담을 들어봤을 겁니다. 특히나 학교에 관련된 괴담이 유독 많지요. 우리학교 부지는 일제시대 공동묘지라네, 자정이면 음악실의 피아노가 작곡을 하네, 옥상에서 번지한 여학우는 밤마다 부킹한다네...등등. 그리고,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게 학교에 관련된 괴담을 모두 알게되면 너도 죽을 거야라는 말. 돌이켜보면 유치하지만, 괴담의 매력은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듣고 있는 청중도 괴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며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언제든 우리앞에 되살아날 수 있다고 말하는 여운이야말로 괴담의 매력인 듯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그런 괴담은 어지간한 학교라면 으레 있는 것임을 알게됩니다. 이 학교, 저 학교 없는데가 없다보니 피끓는 열혈학우들은 서로 자기네가 원조라며 다투기도 합니다. 더 철이 들면서는 그런 괴담들을 사실무근의 가쉽거리로 쉽게 단정해 버립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전부 다 가짜일까? 내가 다닌 학교가 가짜라면 진짜는 어디에 있는 걸까? 하나의 괴담이 만들어지고 입을 통해 퍼진 것이라면, 그렇게 나의 모교에까지 전해져 온 것이라면... 그 꼭대기에는 혹 진짜가 있는게 아닐까?
일본의 어느 촌동네. 구석진 곳에 위치한데다 마을사람들도 이상하게 외부인과의 접촉을 꺼려해 그 마을을 둘러싼 갖가지 기괴한 소문이 생겨난다. 그리고, 괴담을 좋아하는 한 소년이 이 마을을 방문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을인근 숲속에서 괴의식을 훔쳐보던 소년은 곧 그들에게 발각당하고 총을 쏘며 달려오는 경찰관에게 쫓기게 된다. 죽기살기로 내달리던 소년은 주차된 트럭을 몰고 도망치려다 뜻하지 않게 쫓아오던 경찰관을 치어버리고... 그 순간,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귀를 찢는 사이렌소리. 그리고, 죽은 줄만 알았던 경찰관이 일어나 소년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정신을 차린 소년이 깨어난 곳은 천당도, 그렇다고 지옥도 아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소년은 살아있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육지로 거슬러 온 핏빛 바닷물이 바닥에 홍건하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직은 뭐가뭔지 알 수 없다. ]
사이렌은 여러 면에서 대단히 독특하며 참신하다. 그것들 각자를 평가하기 이전에 그런 시도자체는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필자 역시 높게 사고 있다. 또한 그런 독창적인 요소들은 이 게임이 지향하는 바와도 잘 맞아 떨어지고, 그런 점들이 어울려 만들어낸 게임성 역시 지금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재미를 선사한다.
[ 어딘지 익숙하게 보이는 게임의 등장인물 ]
우선, 게임에 등장하는 각 인물들이 마치 실제사람같은 느낌을 준다. 폴리곤으로는 표현해내기 힘든 정교하고 자연스러운 표정연기를 하는데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보면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을 여럿 만날 것같이 평범하면서도 개성적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느낌을 내기위해 실제배우가 연기를 하고 그 배우의 사진을 캐릭터에게 입혔다. 해서 정말로 존재했던 이야기나 다큐를 보는 것처럼 이야기가 대단히 사실적으로 와닿고 게임플레이를 통해 느끼는 공포또한 가깝게 느껴진다. 여러가지 표정들은 물론 표정이 바뀌어가는 과정이나 입모양까지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붙여서 모축구게임과는 다른 자연스러움도 겸비하고 있다. 하지만, 사진을 박아놓은터라 인물들의 입체감이 부족하며 사진과 폴리곤, 2D와 3D가 만나다보니 어색한 부분도 적잖게 발견된다.
[ 사진갖다붙이기의 원조는 이 게임 ]
이 게임의 컨셉은 바로 '진짜처럼'이 아닐까. 그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모든 인물을 실사처리하고 그 외 문서나 팜플렛같은 곳에도 실사가 많이 쓰였다. 차량이나 밥통같은 현대적(?)인 물건들도 실사못지 않게 정교하고 내부메뉴와 폰트도 대단히 깔끔하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그래픽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FPS를 연상시키는 풀쪼가리나 길인지 언덕인지도 구분안되는 흙덩어리들은 봐주기 민망하고, 그 외 캐릭터들의 몸뚱아리를 비롯해 마주치게 되는 대부분의 사물들도 질감이 살지 않고 짙눌린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모든 조악한 부분들마저 분위기고조에 한몫하는데다 전체적으로 대단히 어울려버리고 있어 별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 어째 양촌리스럽다. 혹 응삼아자씨가 나오는 건 아닐까 ]
무엇보다 필드디자인이 대단히 사실적이다. 언덕배기부터 강줄기, 오두막집 하나하나 허투로 만들어내지 않고 있을법한 장소에 자연스럽게 놓여져 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필드디자인을 위해 촬영지답사과정을 거쳤다 한다. 지도에 현재위치가 표시되지 않아도 무리없는 게임진행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런 사실성때문이다. 무턱대고 돌아다니지 않는 이상, 아니면 몬스터에게 쫓겨 앞뒤 잴 것없이 내달리지 않는 이상 길을 잃어 헤매게 되지 않는다. 또한, 같은 필드가 여러차례 중복되어 나중에는 집앞 슈퍼라도 가듯이 구태여 지도를 보지 않아도 막힘이 없다.
[ 맵화면. 낯선 곳에서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가는 기분이 든다 ]
필드의 세심한 디자인과 사실성도 놀랍지만, 시골마을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예리한 분이라면 바이오 하자드 이후, 호러 어드벤쳐게임의 주무대는 언제나 건물내부였음이 떠오를 것이다. 좀비가 길을 막고 있어도 반드시 그곳을 지나쳐야 하고, 좀비가 때로 덤벼도 도망칠 곳이 마땅치 않고, 사방이 벽이다보니 갖혀있다는 느낌도 들어 공포감이 쉬이 조성되는데다 어드벤쳐라는 장르의 특성상 제한된 루트를 제공하는 건물내부가 최적이었다. 사이렌에서도 몇몇 필드는 건물내부지만 대개는 뻥뚫린 광장이 주무대다.
광장이 무대다보니 벽이 없어 이동루트의 제약을 위해 몬스터를 강화시켰다. 몇몇 몬스터는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들이 작정하고 지키는 몇몇 루트는 지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방이 뻥 뚫려 있으니 몬스터의 눈을 피하기도 어렵다. 그들의 눈과 귀를 속이기 위해, 급한 마음에도 살금살금 걸어야 하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라이트를 킬 수가 없다. 바로 사일런트 힐의 라디오와 라이트처럼... 감지하기 위해 켜야하고 살아남기 위해 꺼야 한다. 피해가기 위해 몸을 숙여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 달려야 한다. 아, 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멋드러진 장치인가.
[ 밀실에서 광장으로... ]
실사같은 그래픽과 더불어 사이렌을 대표하는 큰 특징은 스테이지 구성방식이다. 한 명의 주인공이 출현해 이야기를 시작해서 마무리짓는 일반적인 방식을 탈피, 여러 명이 인물이 출현해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그 각자의 이야기를 통해 유저는 전체이야기를 파악해 나가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옴니버스식.
*옴니버스(omnibus): 영화·연극 등의 한 형식.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몇 개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를 늘어놓아 한 편의 작품으로 만든 것.
[ 에피소드 링크 네비게이터. 이야기구조와 분기에 따른 진행을 알 수 있다.]
옴니버스식이라고 해도 하나의 이야기를 끝내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에피소드는 대단히 어지럽게 얽혀 있다. 갑돌이로 마을회관에 들어가고 나니, 을순이가 마을에 도착하고, 병팔이가 갱도에서 탈출하더니, 정숙이가 폐가에서 헤메는 스테이지가 나오는 식이다. 이렇다할 오프닝이나 설정에 대한 사전설명도 없어 처음하면 게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전지,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왜 저 사람말을 들어야하고 저기로 도망가야 하는건지, 이유는 몰라도 시키는 대로 안하면 죽기때문에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그렇게 게임을 어느 정도 진행하고 나야 전체적인 구도가 서서히 그려지기 시작한다. 매 에피소드를 통해 아주 제한적이고 단편적인 정보만을 얻게 되므로, 뭔지는 몰라도 왠지 흥미진진해서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거기다 각자의 이야기가 전혀 별개의 단편이 아니라 상호연관되어 있다. 게임도중에 마주치거나 하는 것은 물론, 하나의 인물이 해놓은 어떤 일이 다음 인물(혹은 자신)의 이후진행에 영향을 미/친다. 걸어가다 만원짜리 한장을 길바닥에 떨어뜨렸다고 치자. 돈을 잃은 사람마음이야 오죽할까마는 춥고 배고파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던 거러지가 우연히 그 돈을 손에 쥐게 되어 밥한끼와 묵을 장소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렌의 분기는 그런 다른 인물들의 사전행동(만원권 분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당연히, 그 다른 인물을 플레이하는 것도 유저인지라 하나의 인물을 플레이하면서도 다른 인물들의 과정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고, 열리지 않는 에피소드를 위해 분기가 있는 스테이지라면 각각의 방법으로 적어도 두번은 플레이해야 한다.
[ 어떻게 종료하는냐에 따라 이야기가 갈라지며 분기발생에도 조건이 따른다. ]
얼핏 대단히 고차원적인 퍼즐같지만 실상 그렇게까지 대단하진 않다. 잃어버린 만원짜리가 거러지 배를 채울지, 똥강아지 입에 씹힐지 어떻게 미리 안단 말인가. 그리고, 대개의 분기는 사전에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아예 열리지가 않으므로 앞 에피소드의 과정을 미루어 지금의 에피소드를 해결할 일도 없다. 분기를 여는 사전행동들은 일종의 숨겨진(그리고,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요소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따라서, 일단 스테이지가 시작되면 주어진 과제해결뿐 아니라 구석구석 두루두루 오지랖 넓게 돌아다녀야 한다.
매 에피소드는 지극히 간단하고 짧다. 반복플레이와 망설임이 없다면, 그리고 해법을 알아냈다면 10분이면 클리어하고도 담배 한개비를 재털이로 보내버릴 수 있을 정도다. 이야기가 벌어지는 마을을 총 10개 정도의 구역으로 나뉘었고, 그 중 하나의 구역이 에피소드가 벌어지는 장소가 된다. 에피소드마다 주어지는 일(종료조건)들도 분명하고 단순한 것이 많다.(대개는 해당구역의 탈출) 다만,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라도 시작지역과 탈출지역, 시인의 위치등이 달라 이미 와봤던 곳이라해도 새로운 곳과 다를 바 없고, 종료조건이 단순하더라도 그 과정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는 짧지만 20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전체 에피소드는 방대하고, 때에 따라선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러번 플레이를 해야 하는터라 볼륨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 응삼 아자씨 ] [ 일용엄니 ] [ 얘는.. 동구밖 거러지 ]
최초 사이렌이 울린 뒤, 대개의 마을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몬스터로 변해 버린다. 그런 마을 사람들을 사이렌에선 시인(屍人, shibito)이라 부른다. 여자꼬실때 쓰는 시가 아니라 주검, 송장을 뜻하는 시다. 즉, dead alive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다른 게임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좀비와 별 다를 것도 없어뵈지만, 좀비가 아니라 굳이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몇가지 분명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시인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 하기사 이미 죽은 것들이니 죽을리 만무하다. 죽지않는 대상에 대한 공포는 화이트데이나 클락타워같은 호러게임을 통해 이미 여러차례 검증된 바 있다. 자신을 해하려는 대상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보다 월등하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귀신을 무서워하는 이유중 하나도 바로 거기 있지 않은가. 그렇다해서 사이렌의 인물들이 도망만 다니는 것은 아니다. 무기를 들면 그들과 맞붙어 싸울 수 있다. 하지만, 시인들은 잠깐 쓰러져 의식을 잃을 뿐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일어나 플레이어를 찾아 헤맨다. 또한 시인들은 살아있을때의 지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어 땅거지 좀비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영리하다. 그들은 영리하게도 사주경계가 용이한 높은 곳에 올라 그곳을 지나쳐야 하는 플레이어를 기다리거나 플레이어가 열어놓은 방문을 의아해하며 조사하기도 한다. 몇몇 시인들은 살아있을때처럼 잡초를 캐거나 부서진 방문을 고치기도 한다.
[ 시인은 죽지 않는다. 다만 아파할 뿐이다. ]
그리고, 시인은 진화한다. 진화라고 하니 거창하지만, 게임후반부에 으레 등장하는 상위 클래스의 몬스터에 다름아니다. 하위클래스라 할 수 있는 응삼이 아저씨의 목따기도 적응이 안되는 마당에 진화된 시인이라니... 이 놈들이 얼마나 껄끄러울지는 상상에 맡긴다.
몬스터를 죽일 수가 없으니 피해가야만 한다. 따라서 게임플레이의 주는 잠입이다. 잠입을 위해선 적의 눈을 피하고 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불가결한 법인데, 사이렌은 뷰재킹이란 시스템을 들고 나왔다. 요상하게도 마을사람들은 그들의 독특한 토속신앙때문인지 다른 이의 눈을 빌어 쓸 수 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시켜 대상에 집중하면 대상이 보고 있는 것을 마치 자신이 보는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 이런 뷰재킹으로 상대의 시야를 훔쳐 봄으로서 대상의 위치와 앞으로의 행동을 어림짐작하고 대상과 나와의 위치관계를 알게 된다. 잠시 멈춰서서 뷰재킹모드로 전환하면 TV가 고장난 듯 지지직거리고, 이 상태에서 주파수 맞추듯 스틱을 조심스레 움직이다 보면 해당필드에 있는 인간들(살았거나 죽었거나에 관계없이)의 시야가 희미하게 잡힌다. 스틱의 위치에 따라 대상이 바뀌는 탓에 어떤게 누구껀지 조금 혼란스럽고, 뷰재킹모드일때도 실시간으로 대상들이 움직이므로 약간 난이도가 있다. 그리고, 시인들에게 발각되면 짧은 시간 나를 발각한 시인의 시야로 전환된다.
뷰재킹모드는 참신함도 참신함이지만, 공포감조성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하다. 상상해보라. 시끄러운 잡음사이로 어렴풋하게 보이는 수많은 화면들. 하나, 둘, 셋... 다섯... 도대체 여긴 왜 이렇게 괴물들이 많은거야. 그것들 중 일부는 무언가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그래, 분명 나를 찾고 있겠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며 때로 괴성도 지른다. 각자의 손에는 투박한 무기가 들려져 있고 때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한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불빛. 혹시 나..?. 들키는건가? 이대로 다가오면 어떡하지. 제발 돌아가라, 제발...
또한, 뷰재킹모드는 숨겨진 아이템의 위치나 문제해결의 힌트를 알려주기도 한다. 시인들도 아주 생각이 없지는 않아서 어떤 물건이 제법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감시하나보다. 어쨌거나, 뷰재킹모드는 그런 식으로 게임안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시인이 무엇을 하려하는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압권은 사운드 ]
하지만, 뷰재킹모드를 원활하게 사용하긴 어렵다. 뷰재킹모드시에는 플레이어를 조작할 수 없으므로 무방비상태가 되고 따라서 안전하고 은밀한 곳에 숨은 뒤가 아니면 쓸 생각을 말아야 한다. 시점을 내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보는 곳만을 봐야 하므로 사전에 위치를 파악해두지 않으면 별 도움이 안된다. 주파수(특정인의 시야) 맞추기도 까다로워 단축버튼을 지원하는데, 지정해둔 주파수라 해도 장시간 방치하거나 갑작스러운 행동변화를 보이면 놓쳐버린다. 시스템자체의 난이도가 높고 제약도 이래저래 많다보니 대개는 상대의 위치를 대충 짐작하거나, 혹은 위치를 미리 알아 둔 상태에서 행동패턴이나 빈틈을 노리는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쓰인다.(그 정도면 충분한건가)
이쯤에서 사이렌의 장르를 집고 넘어가자. 이 게임의 장르는 호러 어드벤쳐이다. 어드벤쳐게임의 기본은 맵을 돌아다니며 사건해결의 단서를 찾아 헤매다 쓸만한 아이템이 보이면 그걸 줏어서 여차저차한 뒤 저쪽에다 끼워맞춘 다음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이렌은 그런 어드벤쳐의 기본에 대단히 충실하다.
스테이지가 시작되면 어디가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은 헤매야 된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어렵지않게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시인이 등장하면서 문제해결이 녹록치 않게 되버렸다. 게임의 각 인물들은 죽지 않는 시인들을 상대로 이겨낼 수가 없는 것이다. 무기를 들면 맞붙어 싸울 수도 있지만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고, 힘겨운 싸움끝에 이겨도 잠시동안 시간여유만 주어질 뿐이며, 몇몇 에피소드에선 아예 무기가 주어지지 않는데다, 시인들이 멍청한 것도 아니라 길목에 서서 총을 겨누고 있기가 일쑤다. 그러다보니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고, 스테이지시작에 앞서 주어지는 힌트도 불충분해 어디로 가야할지 난감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돌아다니면 죽여줍쇼~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 죽여줍쇼~해야 한다.
[ You must do anything... to survive! ]
호러 어드벤쳐는 공포를 즐기려는 사람들을 위한 게임이다. 그런데, 사이렌의 문제는 별로 안 무서운 호러게임이라는 것이다. 시스템도 좋고, 설정도 좋고, 몬스터도 좋고, 사운드도 좋다. 충분히 무섭다. 하지만, 게임이 기본적으로 너무 어렵다. 게임안에서 정해진 길과 방법을 모르면 알때까지 죽어야 한다. 그러다 알게 되면... 무서울 까닭이 없다. 공포심은 무지에서 생겨난다고 했던가. 나를 죽이려는 몬스터가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이 문을 열고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한발짝 내디디는 것조차 불안해 못견딜 때, 바로 그 때 게이머는 무섭다고 느낀다. 11시 방향 지붕꼭대기에 스나이퍼가 이 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고, 7시 방향에 머저리 몬스터 두 녀석이 헤메고 있고, 쭉 달려가다 3시방향으로 턴한 다음 열쇠를 집어 5시 방향 문을 따고 나가면 된다는 것을 알아버렸는데... 어떻게 무서울 수가 있겠는가.
[ 이쯤되면 '양촌리 코만도스' 내지는 '논두렁 잠입액션' ]
그럼, 알기전까지는 어떨까? 지붕꼭대기 스나이퍼 위치도 모르고, 열쇠가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저 막막하면 무서울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앞서 말했지만, 이 게임은 일단 죽여놓고 시작한다. 이리 가다 죽고, 저리 가다 죽고, 가만히 있다 죽고... 줄창 죽은 다음에야 안 죽는 방법이 보인다. 그러다보니, 처음 필드에 도착하면 예의상 서너번은 죽어주고 시작하게 된다. 인물들의 체력을 표시하는 게이지도 없는데, 그도 그럴것이 하나같이 체력이 바닥이다. 시인에게 잡혔다치면 거의 죽음이고, 어디선가 날아오는 총알두방이면 당연 죽음이다.(체력은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회복된다) 시인에게 발각당할시 잠깐 화면전환이 된다지만 그때는 이미 때늦은 경우가 허다하다. 다행히, 죽어도 스테이지 리스타트시의 로딩이 쾌적하고 대개의 에피소드도 무척 짧은 편이라 부담이 없다.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든데다 죽어도 부담이 없으니 아예 지키려는 노력조차 안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틀렸구나 싶으면 최소한의 반항도 포기하고,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듯 시인과 하나가 된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냐' 싶다. 안 죽을래야 안 죽을수가 없다보니, 공포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게임오버가 남발되다 보니, 어떤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할 목숨이 하잘 것 없는데다 가장 피해가고 싶고 당하기 싫은 게임오버가 당연시 되다보니 눈에 뵈는 것도, 무서울 것도 없다.
[ 죽고, 또 죽고... 이쯤되면 막 나가자는 얘기다 ]
그렇다면, 사이렌은 하나도 안 무서운 호러게임인가? 아니, 그것도 아니다.
이 게임의 면면을 찬찬히 살펴 보면 안 무서울수가 없을 것 같다. 신선한 뷰재킹시스템부터, 실사같은 그래픽, 흡인력있는 스토리, 그 외 모든 것들이 공포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 불만이라고 얘기한, 어려운 난이도 또한 긴장감을 적정선에서 유지만 해줬다면 게임의 공포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요소다. 그리고 아래에서 얘기하겠지만, 조금 불편한 조작과 맘먹은대로 되주지 않는 전투도 게이머의 불안함을 극대화시킨다. 게임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분명 공포를 체험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어려운 난이도에 대한 짜증이 게임플레이의 무서움을 짙눌러 버리고 있지만...
별로 안 무서운 호러게임이라니... 그러나, 그것대로 나름의 재미가 있다면 용서받을 수도 있으리라. 바이오 하자드 역시 호러보다 액션에 치중했지만,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사이렌은 안 무서운 것이 아니라 너무 어려워 느끼지 못할 뿐이다.(그게 그거지만...) 더군다나 필자의 경우, 무섭고 안 무섭고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갑작스레 튀어나와 나무섭지 하는 식의 억지공포보다는 스토리와 시스템을 통해서 스며드는 공포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원래가 무서움을 별로 타지 않아 큰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 강심장인 척 했지만, 이 두게임은 솔직히 무서웠다 ]
필자가 사이렌에서 가장 불만스럽게 여기는 부분은 부재중인 호러나 극악의 난이도가 아니라 불편한 액션이다.
이동은 흔히 바이오 하자드식이라고 하는 2D타입(스틱전방=전진, 스틱좌우=선회)인데, 카메라위치가 백뷰라서 아날로그 스틱으로도 플레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가끔 아이템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고정카메라로 변환될때에는 상당히 헷갈리지만 크게 문제삼을 정도는 아니다. 백뷰란 조작하는 캐릭터의 등을 쫓아가는 시점으로 사방이 막힌 곳보다 뻥뚫린 곳에서 주로 쓰인다. 또한, 방향전환할때마다 화면이 움직여서는 심하게 떨리게 되는지라, 백뷰를 채택한 대개의 게임들(진삼국무쌍, 스프린터 셀 등)은 기본적으로 시간적인 갭을 두고 카메라가 따라오며 필요한 경우에는 우스틱이나 락온버튼이 이용된다. 헌데, 사이렌에선 방향전환을 하면 바로 카메라가 쫓아온다. 해서 조작감이 조금 가벼운 편이고, 이동시 상당한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또한, 전투시스템이 조금 조악하며 타격감도 부족하다. 무기는 크게 망치나 부지깽이같은 근거리용 무기와 중거리용 권총, 원거리용 라이플로 나뉘는데 시스템은 간단명료하다. 락온버튼으로 전투자세를 유지하다 사정권에 적이 들어오면 공격하면 된다. 콤보같은 건 없다. 근거리 무기의 경우 버튼을 누르고 액션이 취해지기까지 시간적인 갭이 존재하고, 라이플은 상대를 락온하지 않고 바로 스나이핑 모드가 된다. 근거리 공격을 할라치면 왠지 너한대 나한대 사이좋게 때리게 되고, 라이플은 상대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유지되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그러다 죽는다) 권총은 그나마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총기류에는 탄약제한이 있어서 죽지 않는 시인들을 상대하는데는 근거리무기가 더 듬직하다. 무엇보다, 때리고 맞을 때의 타격음이 들릴듯 말듯이고, 진동을 온으로 설정해도 도통 떨리지를 않는다.
조작감에서 밝힌 문제들은 아마도 애초 의도된 것이리라.(타격감은 이해가 안가지만) 만약, 이 게임의 난이도가 평이하거나 조금 어려운 정도에 머물렀다면 조작의 사소한 불편따위 오히려 메리트가 되었을 것이다. 호러게임의 전투는 원래 그래야 한다. 몬스터를 만나는 것 자체가 두렵고 싸워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서도 안된다. 하지만, 이 게임은 굳이 전투가 아니더라도 너무나 어려운 게임이다.
이런 조작과 전투에 관계된 불편들은 에피소드를 재도전해야 할 경우에 엄청난 스트레스가 된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겨우겨우 탈출구로 가는 과정을 알아냈는데, 이같은 이유로 죽어버리면 다시 해도 그 곳까지 갈 자신이 없다. 시인을 피해갈 수 없어 그들과 맞붙어 싸워야 하는 장소라도 있다면 아주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요는 이런 시스템이 애초 어느 정도 불편하라고 만든 것이 돼나서 익숙해지기도 어렵고 익숙해지나 아니나 별반 나아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 왜색이라고 해봤자 이런 정도. 전설의 고향틱 ]
게임의 전체분위기는 왜색이 짙지만 동양이라는 교집합안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진 않는다. 이야기는 흥미로울 것이고 감정이입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정식발매가 되면서 한글화는 물론 한음화까지 이루어졌다. 폰트도 게임과 어울리고 이식도 잘 되었다. 하지만, 스테이지내에서 인물간의 대화를 듣다보면 갑작스레 뉘앙스가 변해버리기도 한다. 그 동안 한음화된 다른 게임들도 이건 마찬가지였다. 아주 고질적이다. -_-; 이벤트대사는 또 다르지만, 게임플레이 도중의 대사들은 구절구절이 따로 녹음되기 때문이다. 특히 사이렌은 게임플레이 도중의 대사가 많고 감정을 고조시키는 주요한 역활을 하고 있기에 이런 부분이 쉽게 드러나고 아쉬움도 크다. 또한, 몇몇 음성들은 배경음과 따로 놀기도 하는데 후시녹음의 위력(...)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래도, 성우들의 연기는 훌륭했고, 특히 시인들이 광장해서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운 편이다. 앞으로 한음화가 일반화되면서 너하우가 좀 더 쌓였으면 하고 바랄뿐이다.
-GRADE : B+
왜 이 게임이 초반 떠들썩하던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묻혀가는지도 이해가 간다. 분통터지는 난이도에다 게임의 시스템도 익숙치 못한 것이 태반이니 욕부터 나오리라. 게임내 힌트도 불충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갑갑하고 스토리전달과 설정도 확실치 않으니 뭐가 이런게 있나 싶으리라.
이런 얘기가 떠오른다. 입도 잘 생겼고, 코도 잘 생겼고, 눈도 잘 생겼는데... 모아놓고 보니 이주일이라나. 古 이주일 선생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이렌 역시 그런 느낌이다. 조각조각 다 괜찮은데 아우르는 과정에서 이가 하나둘 빠져 삐끗거리는 것 같다. 그래도, 당신이 게임매니아라면 조심스레 이 게임을 추천한다. 게임을 붙잡은지 10분이면 그림이 대강 그려지고, 해서 대개의 게임들이 식상하고 지루하다면 사이렌을 감히 추천한다. 눈에 안 차는 구석도 많지만, 만족해마지 않을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게임을 하면서 좌절과 낙담에 빠져 필자를 원망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 당신의 가슴도 뚜근뚜근? 그렇다면 도전하자 ] [ But, 어중간한 기분으로 나서지 말아주세요 ]
일본 패미통의 리뷰어가 사이렌에 관해 이런 말을 했었다. 어중간한 기분으로 나서지 말아주세요. 아마도 이 게임은 지극히 무서우니 마음 단단히 먹으란 의미일 것이다. 필자는 조금 다른 의미로 어중간한 기분으로 나설 사람들을 막고 싶다. 게임에 대해 확신이 안서거나 제비뽑기하는 마음으로 구입할 생각이라면, 그리고 대개의 게임들이 재미있다면 사이렌은 조금 뒤로 미뤄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P.S. 사이렌 홈피는 국외가 더 이쁘게(?) 꾸며졌더군요. 아직 감이 안 온다면 아래를 클릭.
북미 사이렌 홈피가기 일본 사이렌 홈피가기
P.S. 2 이건 분통터진 분들을 위한 서비스. 게이머TV의 공략
P.S. 3 아래는 게임안에서 언급되는 실제사이트.
오컬트 랜드 도시 전설 조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