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왕도 벨리타를 향해서 -
스마트 폰에 맞춰둔 알람 시간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어제 하루 고단한 바쁜 일정을 소환한 덕분에 늦잠을 자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 정신은 맑았고 체력적으로도 무리는 없었다.
단지 무척이나 배가 고파왔다.
어쩌면 내가 잠에서 일어난 원인은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빨리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 일지도 모른다.
이른 새벽 아침..
아침 해가 도시에 생기를 붙어 넣어주며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그 햇살이 오늘따라 유달리 달갑지가 않았다.
내 짐이라고는 옷 2벌과 롱소드 그리고 미스릴 체인 메일이 전부였다.
딱히 여행가방 같은 것을 사지 않아 옷가지를 담는 물건이 없어 곤란하던 참이었다.
하긴 이곳에서 최소 한 달을 생활할 생각이었으니 서둘러 준비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 뿐이고,결과가 이렇게 된 것은 그 누구에 잘못도 없다고 생각한다.
난 상의 하나를 펼쳐 다른 3가지 옷들을 깔끔하게 정리 한 뒤 펼쳐 뒀던 상의 위에 올려놓고 소매로 매듭을 지었다.보기는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완벽한 보따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 옷들을 골라 준 것은 전부 엘리샤였다.
침대 시트를 가지런하게 정리한 뒤 짐을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눈치를 볼 필요는 없지만 내가 떠나는 것을 미야에겐 들키고 싶지 않았다.
조심히 문을 열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와 현관 앞에 설 무렵 부엌에서 엘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은 먹고 가.. 이건 계약 사항이었으니깐 지키지 않으면 찝찝할 것 같아서..”
식탁 위에는 모닝 빵과 스프 그리고 소시지 사라다가 올려져 있었다.
배는 고팠고 엘리샤의 호의를 무시하긴 싫었다.
그녀 역시 나름대로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차려준 성의를 봐서 아침은 먹고 가야겠군”
난 부엌으로 발걸음을 돌려 식탁에 앉았다.
엘리샤는 팔짱을 끼고서 말없이 창가 쪽을 주시할 뿐이었다.
어제만 해도 셋이서 함께한 매우 즐겁고 유쾌한 아침 식탁이었는데,오늘은 매우 쓸쓸한 1인 식탁이라 먹는 기분마저 적적했다.
식사를 반쯤 마친 무렵 엘리샤가 입을 열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
“이해해..”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도,미안해 할 일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선택에 순간은 오고 그 결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엘리샤는 자신이 이륙한 이 모든 것과 하나 뿐인 동생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난 그것을 이해하며 존중한다.
비록 모든 일이 완벽하게 해결 되어 더 이상 그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장담하고 있지만 이점을 강조한들 엘리샤는 결코 납득하지 않으려 할 것이 분명하기에 조용히 물어나기로 마음먹는 것뿐이다.
“잘 먹었어.. 그리고 빌린 11은화는 갚을 께.. ”
“아니!그러지마.. 그냥.. 가줘”
스스로에게 자책을 느끼는 엘리샤의 표정은 어둡고 무겁기만 했다.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갔다.
엘리샤도 나를 따라 현관까지 걸어 나와 주었고, 열린 문으로 나가는 날 배웅해 주었다.
“이별이네.. 이틀뿐이었지만 즐거웠어,미야 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난 이 길로 이 도시를 나갈 생각이야.. 그러니깐 해결사를 했던 모든 부담은 떨쳐 버렸으면 좋겠어”
“.............”
떠나는 마지막 모습은 웃는 얼굴이고 싶었다.
죄책감 갖지 말라고..
미안할 필요 없다고..
떠나는 화랑의 뒷모습을 지켜본 엘리샤는 집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차라리 욕이라고 퍼부었다면.. 비난하며 화를 냈다면 마음이 더 편했을 것이다.
“바보 자식.. 저렇게 멋있게 돌아서면 더 미안해진단 말이야”
이른 시간,어디로 가야할지 알 길이 없었다.
엘리샤에게는 도시를 떠난다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단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백의 거짓말.
막시무스 공작이 내 사정을 듣고 아론이 경거망동 못하도록 손을 써 주신다고 말했다.
그럼 더 이상 엘리샤가 우려하는 사태는 생기지 않을 테니 내가 도시를 떠날 이유는 사라진 샘이다.
거기다 아리아 칼테 가르시아 공녀로부터 포상을 약속 받았기 때문에 그녀를 따라 왕도 벨리타로 가야하므로 에텔을 벗어 날 수 없는 실정이다.
마지막으로 미야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그 녀석이 울먹이며 붙잡으면 발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아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선 것이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
퓨에게 듣기로는 에텔 도시에서 유일하게 24시간 연중무휴로 돌아가는 매우 스페셜 한 장소가 있다고 들었다.
그건 바로 용병 주점이다.
모험가 주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문을 열지만 용병 주점은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으로,이는 아침 일찍 떠나는 상단의 여건에 맞추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사실 미야와 엘리샤를 따라 모험가가 되어 볼까 했지만,왕도 벨리타로 가면 또다시 유동적으로 움직일 것을 고려해 그냥 용병으로 등록해 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용병이 되면 경우에 따라 사람도 죽여야 할지도 모르지만.. 오크랑 맞짱 뜬 마당에 범죄자 소탕 못할까 보냐?
용병 등록을 마치면 노예 시장도 구경 차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같은 신사가 갈 곳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세상을 보는 식견을 넓힌다는 매우 고귀한 뜻이 숨어 있을 뿐이다.
결코 여성의 노출이나 몸매 따위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다.어디 노예 시장에 여자만 있겠는가?남자도 있을 테고 경우에 따라 이종족들도 있을 지도 모르는 바다.
21살이나 된 성인 남자가 노예 시장 한번 가보지 않고서 이 세계 사람과 소통이 되겠냐 이 소리다.
그러므로 꼭 노예 시장은 갈 거다.
그렇게 마음먹고 서둘러 용병 주점을 향해 나아갔다.
용병 주점은 엘리샤의 집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여인들의 거리 근방에 존재했다.
아 그러고 보니 여인들의 거리도 가보지 않았다.
그곳은 돈을 주고 여인과 하룻밤 동침하는 곳이라고 퓨한테 들었다.
대부분 누군가의 노예로 그곳에서 평생 몸을 팔며 살아가야 하는 비운의 여성들이라고 들었다.
딱히 그런 곳에도 관심은 없지만 지나가야 한다고 하니깐.. 마지못해 그곳을 지나가 볼 생각이다.이례뵈도 동정은 뗀 몸이다.뭐 딱 2번 해봤지만..
가능한 은화를 아끼기 위해 운동도 할 겸 걸어서 여인들의 거리로 갔다.
한산한 도시 거리는 행상인들의 짐마차와 치안 경비대 말고는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경비대에게 길을 물어 물어 20분을 소비한 끝에 여인들의 거리에 다다르게 되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다.
환락의 밤거리라고 들은 대로 시간 때가 이르면 평범한 도시거리와 다를 것이 하나 없는 한선한 동네의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잠자리를 마치고 나오는 남자들은 헐벗은 여인들과 이별 키스를 마치고 헤어지는 시간대에 난 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거리를 빠져 나오는 사람 대부분은 용병이거나 상인 혹은 도시에 거주중인 남자들로 차림새들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귀족들이 대 놓고 이런 곳에 올 이유가 없겠지..
노예를 사거나 하녀에게 밤시중을 들게 하면 그만 일 테니깐..
환락이 사라진 거리는 나에게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그때 후드를 눌러쓴 남자와 교차하면서 어쩐지 낮 익은 냄새를 맡고는 바로 돌아서게 되었다.
“뭐지?이 냄새 어디선가...”
내 후각은 현재 오크의 것으로 굉장히 민감한 상태이다.
저 녀석에게서 향수 비슷한 채취와 그외 어디선가 맡아본 냄새가 풍겨왔는데,어디 였는지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 시선을 의식한 남자도 나를 잠시 돌아보더니 이내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워낙 많은 냄새를 맡고 돌아다니는 통에 우연히 지나치다 반응하게 되는 현상일 테니깐.
대수롭지 않은 일에 일일이 뇌를 가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발걸음을 재촉하여 나아간 곳에는 용병 주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용병 주점은 3층 정도 되는 높이에 각층마다 테라스가 있었으며 1층 입구는 미국 개척 서부 마을 술집에서나 볼 법한 양 면식 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시간 때가 일러서 그런가, 문 너머로 보이는 빈 테이블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용병 등록을 하러 온 것이니 차라리 잘 됐다 싶은 기분이다.
어디든 있는 잘난척하는 녀석들이 치근덕거리는 건 싫으니 말이다.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용병 주점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50평정도 되는 넓이에 5인석 둥근 테이블이 20여개 정도 깔려 있었다.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 모두 원목으로 되어 있었으며 실내는 램프로 밝히고 있었다.
몇몇 테이블에 앉아 있던 건장한 체격에 남자들과 후드를 뒤집어 쓴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잠시 집중 됐지만 이내 관심 없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입구 옆에는 대형 메모판이 있었고 그곳에는 현상금 수배서와 깨알 같은 글자가 적힌 종이들이 무수히 붙어 있었다.
우선 글을 모르는 문맹이므로 눈앞에 유리잔을 닦고 있는 주점 마스터에게 문의해 보기로 마음먹고 그에게로 걸어 왔다.
서부의 전통식 바를 연상 시키는 분위기와 나비넥타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머리 헐크 호건 같은 낯짝을 한 신장 201, 오른쪽 눈 부위에 흉터가 있는 험상궂은 남자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고용하러 오셨습니까?아니면 일을 의뢰하러 오셨습니까?”
용병을 은퇴한 남자의 눈에는 화랑이 결코 용병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등 뒤에 보이는 훌륭한 롱소드가 눈에 띄어 혹시 몰라 질문을 한 것이다.
난 그 남자의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당히 말했다.
“용병이 되고 싶습니다.. ”
주점 마스터는 별 감흥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용병이 되고 싶으시다구요?저에게 정보료를 주신다면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얼씨구.. 정보를 주는 조건으로 돈을 달라니..
“얼마를 드리면 됩니까?”
“1은화입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맥주를 사서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는 것이 났겠다.
맥주 하나 기껏 해봐야 20실링 하는 거..
난 주변을 돌아보며 일행 없이 혼술을 하거나 시간을 때우는 사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 구석진 창가 쪽에 홀로 술을 마시는 사람을 발견했다.
후드를 눌러 쓰고 있어 성별 식별이 어려웠지만 체격은 나보다 작아 보였다.
거기다 탁자에 걸친 한손 무기를 보니 일단은 용병이 분명해 보였다.
“맥주 2잔 주세요.. ”
“60실링입니다”
우악!비싸!
일반 주점보다 무엇이든 비싸다 이 소리구만...
난 은화 1개를 주고 40실링을 거슬러 받았다.
주점 마스터는 나에게 맥주 두 잔을 건네줬고 난 그것을 받고서 혼술 하는 사람한테로 다가갔다.
“실례 합니다.. 괜찮으시면 합석..”
“안돼”
“네?”
후드 안에 비친 얼굴은 다름 아닌 여성이었다.
짙은 노랑에 가르마펌을 한 짧은 헤어스타일 소녀는 강렬한 토파즈 색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내 일행이 곧 올 거야.. 미안하지만 다른 테이블로 가줘”
살짝 짜증이 났지만 상대방 입장을 고려하지 못한 내 실책도 있으므로 옆 테이블로 슬쩍 건너가 중년 남성에게로 맥주잔을 건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중년 남성은 화랑을 용병 지망생쯤으로 여기며 흔쾌히 잔을 받고서 술을 들이켰다.
“무슨 용건이지 젊은 친구?”
“실은 용병이 되고 싶어서 말입니다.. ”
“음...”
탁자 옆에 둔 롱소드를 본 중년 남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진 모르겠지만 용병이 되겠다면 말릴 이유야 없지.. 용병이 되기 위해선 일단 주점 마스터의 추천장이 있어야 하네..”
헐~
이럴 줄 알았으면 은화 1개 주고 저 양반한테 물어 볼걸 그랬지?
“대게 간단한 시험을 통해 용병에 자질을 테스트 하고나서 추천장을 하나 써주는데,그걸 가지고 사법 관리국 1층에 자리한 용병길드로 가져가면 비로써 노멀 등급에 용병 자격증을 내줄 것일세..”
“노멀이요?”
“자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용병에겐 노멀,브론즈,실버,골드,플래티넘 등급으로 5가지가 등급이 있다네.. 노멀은 햇병아리 용병들에게 발급하는 기본적인 자격증이네.. 그것을 발급 받고 1년 동안 죽지 않는다면 브론즈 자격을 건네주게 되지”
“아무것도 안하고 가지고만 있어도요?”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네.. 보통 노멀 등급에 용병에게 일을 의뢰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렇군요.. 그럼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것은 브론즈 등급부터 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용병들이 맡는 일은 호위부터 몬스터 토벌 그리고 경호등등 다양하네만.. 보통은 실버 등급의 용병부터 고용하려는 것이 일반적이네... 노말과 브론즈는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에 지나지 않아 불안하긴 마찬가지니깐”
듣고 보니 그렇다.
노멀 용병에서 브론즈 용병이 되기 위해 나름 성과를 내야한다면 모를까..
1년동안 노멀 자격증을 가지고만 있어도 된다면 1년간 용병을 직업을 삼을지 말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할 시간을 준 것이나 다름없다.
목숨을 거는 일인 만큼 1년간 수많은 소문과 이야기를 통해 심사숙고 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을 준 것이리라..
“그럼 브론즈에서 실버로 넘어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경력을 쌓아야지.. 용병 주점에서 일을 의뢰받으면 의뢰증을 받게 되는데 임무를 완수하면 고용인으로부터 대금과 함께 싸인을 받게 되지.. 그걸 가지고 각 도시에 있는 용병 길드에 제출하면 임무 등급에 따라 실버 등급을 내어 준다네.. 물론 어지간해서는 주지 않지만 말이야”
“그럼 실버에서 골드로.. 골드에서 플래티넘까지 가는 과정도 같은 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네.. 단지 높은 실적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 사항이긴 하지만..”
용병 주점에 오면 거저 되는 줄 알았더니 상당히 복잡한데?
모험가는 등록하기 조금 더 편하다고 하던데...
그래도 마음먹고 왔으니깐..
일단 노멀을 가지고 있다가 1년 후에 브론즈로 바꿔 보도록 하자...